프루스트 클럽 반올림 6
김혜진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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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아이는 누구일까? 무엇을 알면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부를 이름이 있고, 조금 이상하더라도 그냥, 같이 앉아 있을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이상한 것이었으니까, 끝까지 이상해도 좋을 것이다. 그제야 '이상함'을 대체할 단어가 생각났다. 그건 '특별함'이었다.-39쪽

나는 아무리 봐도 오데뜨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떨 때는 이십대, 가끔씩은 깜짝 놀랄 정도로 나이 들어 보이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른 여자들을 떠올리며 어림짐작으로 나이를 맞혀 보려 해도 불가능했다. 내가 아는 여자 어른들이란 친척과 선생들이 전부였으니까. 오데뜨는 그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은 것 같았다. 세상엔 저런 여자도 있다. 새로운 발견이었다. 내가 알아왔던, 그런 여자 어른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43쪽

"별로 하는 것 없어요." / "그런 것도 나쁘지 않지." / "하는 게 없는 게?" / "뭐든지 할 수 있단 얘기잖아."-46쪽

그리고 곧, 괴로워졌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얼굴은 밋밋하여 아무런 특징도 없다. 나는 빚다 만 반죽. 새기다 만 조각. 지운 흔적만 남은 스케치. 숨기고, 감추고, 잊으려 하는 무엇. 벽 안에 갇혀, 벽 그늘에 가려져 숨죽이고 있는 아이.-117쪽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어. 그런 게 일상이니까. 비가 내리고 얼음이 어는 것처럼, 상처는 생기니까. 그리고 또 흉터가 생겨. 그것도 어쩔 수 없어. 시간이 지나면 지워져 가겠지만, 완전히 사라지는 흉터는 드물지. 그럼 그 흉터를 가지고 잘 살면 돼. 거기 적응하면 돼. 상처를 받았다고, 흉터가 있다고, 그걸로 인생이 끝인 건 아니잖아. 어쩌면 그 상처와 흉터 덕분에 삶이 나아질 수도 있겠지. 가끔은...그래. 가끔은 그냥 아프기도 해. 후회가 되기도 하고, 막 원망스럽기도 해. 어쩌겠어. 내버려 둬야지. 지나갈 때까지. 다시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169쪽

눈이 가려지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어디론가 실려와 눈을 가린 천이 풀렸을 때, 눈앞에 막막하고 끝없는 메마른 벌판이 펼쳐져 있어 남은 여생을 그 곳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기분이었다.-171쪽

죄책감을 가지고도, 행복해지면 안 돼? / 잘못한 사람은 더 나빠지는 것 외에, 나아질 방법은 없어?-208-209쪽

그 책은 약속의 담보 같은 것이었다고. 무엇도 믿을 수 없었기에 우리는 그 책을 읽기로 한 것이었다고. 아주 어렵고 길고 읽기 힘든 것을 다 읽을 때까지 곁에 있자는 약속. 아주 어렵고 길고 힘든 때에 함께 있자는 약속. 끝내 지키지 못한 약속.-256-257쪽

차라리 막무가내로 왜 어제 말도 없이 중간에 나갔냐고 화도 내고, 제대로 하라고 하고, 걔가 죽은 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고, 수능이 백 일도 안 남았는데 공부나 하라고 소리를 쳤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도 잔뜩 가시를 세우고 바락바락 덤비면서 소리 지르고, 맞고, 울고, 그랬을 것이다. 그럼 넘어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두는 그렇게 여리고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부딪쳐 폭발할 수 있는 벽조차 없으므로 나도 그렇게 멈추었다.-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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