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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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사람들, 곧 '부양을 받고 있을 뿐 그것의 실질적인 대가를 전혀 치르지 않는 소비자들'의 무리에 놀랍게도 예술가와 작가가 포함된다고 하지 않는가! -「생존시간카드」중-40쪽

열흘 전부터 아주 열심히 살고 있다. 일기 쓸 시간을 못 낼 정도로 삶이 분주하다. 이토록 짧은 삶에서 무엇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밤잠을 잊을 지경이다. 글을 쓰는 것도 예전과는 다르다. 정상적인 삶을 살 때 석 주나 걸려서 쓴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원고를 최근에는 나흘만에 헤치웠다. 그런데도 문체에선 전과 다름없는 광채가 나고 사유에는 변함없는 깊이가 있다. 쾌락을 추구할 때도 그와 똑같은 열의로 정력을 쏟고 있다. 세상의 예쁜 여자들을 모두 나의 여자로 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유감스러울 따름이다. 또 암시장에서 매일 두 끼씩 아주 푸짐한 식사를 한다. 흘러가는 시간을 온전하게 활용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복수심에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존시간카드」중-47쪽

그녀가 삶에서 일시적인 죽음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그녀는 내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웃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웃음소리가 뚝 그치며 눈앞에서 그녀가 가뭇없이 사라졌다. 마치 어떤 마술사가 그녀를 감쪽같이 숨겨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누워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로 정적이 밀려와 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꽤나 고통스러운 장면이었다. -「생존시간카드」중-51쪽

자기 생존 시간 배급표를 팔겠다는 그의 제안은 나를 몹시 난처하게 만들었다. 나 자신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식인귀(食人鬼)나 사람을 공물로 받았다는 옛날이야기 속의 괴물처럼 느껴졌다. -「생존시간카드」중-55쪽

나는 영벌을 받은 영혼처럼 고통을 겪고 있다. 이 고통의 끝에서 잘 팔릴 책이나 한 권 얻을 수 있으면 좋겠다. - 「생존시간카드」중-71쪽

자기의 정치적 신념에 비추어 차마 군비 확대를 정당화하는 그런 편향된 예를 선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 거였따. 그는 너무나 정직해서 자기의 소신을 저버릴 수 없는 사람이었따. 하지만 어렵게 생각해낸 그 소재를 버린다는 건 어쨌든 아까운 일이었다. -「속담」중-91쪽

"그래, 어서 베껴라."
그렇게 말하는 자코탱 씨의 어조에는 머리를 별로 쓰지 않아도 되는 부차적인 활동에 대한 경멸이 드러나 있었다. -「속담」중-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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