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
마르탱 파즈 지음, 용경식 옮김 / 작가정신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바보가 되고 싶은 걸까.
  오해하지 말자. 이 책에서 말하는 '바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멍청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사회에 적당히 편입해서, 적당히 튀지 않는, 적당히 성공한 속물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러니까 비판의식을 적절히 거세하여 삶에 대해 진지하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원체 '살아있는 것' 자체에 관심이 적다보니 이런 이야기를 읽고 나면 어쩐지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지금도 앞으로 10년 동안 어떻게 살아야지,라는 생각은 사실 부끄럽게도, 진지하지 않다.(솔직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이 더 강하다-)

  엊그제였나, 동기가 쓴 '지식인'에 관한 글을 읽은터라- 지금 드는 생각은 조금 복잡, 미묘하다.
  앙투안이 방황할 수밖에 없던 것은- 아마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독립적이어서, 그리고 전반적으로 얕은 관심으로 얻은 지식이기에, 대타로 강의를 할 수는 있어도 그 과목 담당 교수가 될 수 없는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재주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다는 말, 아마 그냥 나온 말은 아닐 것이다.
  어느 하나의 사회나 조직으로 편입해들어갈 수 없는 두루뭉수리한 지식의 덩어리- 그렇기 때문에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 될 수도 없고 '영향력있는 지식인'이 될 수도 없다. 행동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지식인은 사회와 괴리되어 있고, 어디에도 편입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가족이라 하더라도.(앙투안이 과연 그네들을 비판 없는 눈,으로 볼 수 있을까. 오히려 비판과 애정 사이에서 더 괴로워하지 않을까-)
  앙투안은 행동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고, 목소리를 내기에는 그의 지식의 관심사가 편중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게다가, 그는 '정치적 신념'이 아닌 '양심' 즉 '도덕적 신념'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21세기에, 정치적이지 않은 지식인이 '조직'과 '사회'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시 묻자. 나는 바보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반쯤은 발을 걸친채로 눈치를 슬슬 보고 있다. 앙투안보다는 덜 과격하게나마 '사회인'이 되려고 버둥대고 있다. 그럼, 나는 정말 바보가 되고 싶은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내 사회 생활이 지속적이지 않다.

  나의 삶과 닮아 있는 앙투안의 삶을 들여다보면서(물론 나는 그보다 덜 지성적이고 더 속물적이다.), 그가 사회로 기어들어가 영위했던 삶이, 자신이 바보가 되기를 선언하며 봉인해버린,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던, 플로베르 전집에 산산조각날만큼,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것에 또 한 번 좌절해버렸다. 

  엑소시즘을 지나 앙투안이 자신과 닮은 사람들과 의지하며 지내는 것에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과 역시 자신과 닮은 길에서 만난 클레망스와 유령놀이를 하는 것으로 결말을 짓는 과정이 조금 급작스러웠으나- 이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앙투안이 행복해지려면,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곰팡이가 슬지 않으려면, 이 방법 말고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스물 일곱, 나는 이대로 살아도 될지 모른다는 것에 조금,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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