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드디어 터졌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광복 이후 첫 금메달이 나왔다. 영광의 주인공은 양정모. 그는 레슬링 페더급에서 오이도프(몽골)를 꺾고 그토록 염원하던 금메달을 땄다. 1976년 7월 31일 캐나다 몬트리올 하늘에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양정모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대한민국은 온통 울음바다가 됐다. 금메달을 따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결승에서 오이도프에 10-8로 판정패한 양정모는 벌점 3점을 받았다. 그러나 오이도프는 예선에서 이미 3벌점을 기록하고 있던 상황. 당시에는 이겨도 근소한 차로 이기면 벌점 1점을 주는 룰이 적용됐다. 따라서 양정모에 가까스로 판정승한 오이도프에게 벌점 1점이 추가됐다. 결국 양정모는 벌점 1점 차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집집마다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저기서 '장하다 양정모'라는 노래가 흘러 나왔다. 양정모는 한국의 스포츠 영웅으로 우뚝 솟았다.
한국은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1, 은1, 동메달 4개를 따내며 종합 19위에 올랐다. 특히 여자배구팀은 동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올림픽 구기사상 최초로 메달을 따내는 감격을 맛봤다. 당시 여자배구 동메달의 주역인 '나르는 작은 새' 조혜정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유도 동메달리스트 조재기에 관한 일화도 유명하다. 조재기는 헤비급에서 메달 사냥에 실패하자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기 위해 머리를 확 밀어버렸다. 삭발이 효험을 발휘한 것일까. 그는 무제한급에 나가 동메달을 따내는 투혼을 발휘했다.
▲ 1984년 L.A 올림픽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했던 한국은 8년 만에 84년 L.A 올림픽에 참가했다. L.A 올림픽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보이콧으로 '반쪽대회'로 치러졌다. 그러나 한국이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 대회이기도 하다. 한국은 21개 종목에 281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보냈는데, 규모에 걸맞게 성적도 좋았다. 금6, 은6, 동7개를 획득, 당당히 종합순위 10위에 올랐다. 올림픽 출전 사상 최초로 '톱10' 안에 진입하는 쾌거였다. 한국이 48년 런던 올림픽부터 76년 올림픽까지 8차례의 올림픽에서 딴 메달은 총 18개(금1, 은6, 동11개). 이번 대회에서 한 방에 그 기록(18개)을 깬 것이다.
유도에서는 안병근(라이트급)과 하형주(하프헤비급)가 나란히 금메달을 메쳤다. 김원기(레슬링 그레꼬로만형 62kg급)는 한국팀 대회 1호 금메달리스트가 됐고, 유인탁(레슬링 자유형 68kg급)도 부상투혼을 발휘하며 금메달을 따냈다. 신준섭(미들급)은 복싱에서 유일하게 금메달을 거머쥐었고, 서향순은 양궁에서 금과녁을 맞춰 한국 최초의 여성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당시 여고생이었던 서향순은 우승 소감을 묻는 질문에 "팥죽이 먹고 싶다"고 대답해 주위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특히 여자 핸드볼, 여자 농구에서 따낸 은메달은 '금메달 못지 않게 값진 은메달'이었다.
▲ 1988년 서울 올림픽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유통기간(?)이 한참 지났건만 가사와 멜로디가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난다. 진짜 지겹도록 불렀다. 정말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질리지 않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오! 필승코리아'처럼 말이다. 1988년 9월 17일, 잠실종합운동장에 '손에 손잡고'(올림픽 공식 주제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울 올림픽이 개막되었다. 역대 최다인 160개국이 출전하고, 12년 만에 동-서 진영이 한 자리에 모인 지구촌 축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대회 슬로건처럼 전 세계 50억 인구가 하나 되는, 가슴 찌릿찌릿한 순간이었다.
개최국인 우리나라는 올림픽 역사를 다시 썼다. 놀라지 마시라. 한국은 금12, 은11, 동10개로 종합순위 4위를 차지했다. 자유진영 국가 중에서는 미국 다음이었고, 아시아권에선 성적이 가장 좋았다. 한국은 폐막 하루 전(10월 1일)까지만 해도 7위 였지만 마지막 날 불가리아, 헝가리, 서독을 추월해 4위로 올라섰다. ‘여고생 궁사’ 김수녕은 여자양궁 2관왕에 오르며 '신궁'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특히 여자양궁 단체전에서는 한국 선수들이 금,은,동을 모조리 휩쓰는 위업을 달성했다. 남자유도 60kg급 금메달리스트 김재엽은 추석날 멋드러진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라가 국민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했고, 한국 선수끼리 금메달을 다툰 탁구 남자단식도 명승부 중의 명승부로 꼽힌다. 또한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딛고 메달을 일궈낸 남녀핸드볼, 여자하키 경기는 ‘보고 또 봐도’ 감동적이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사라 브라이트만-호세 카레라스는 녹아들 듯, 빨려들 듯 감미로운 음성으로 올림픽 공식 주제가 '영원한 친구'를 불렀다. 그리고 노래 제목처럼 바로셀로나 올림픽은 인종, 종교, 정치를 초월한 '화합의 올림픽'이었다. 서울올림픽을 보이콧했던 북한, 쿠바 그리고 인종차별문제로 추방됐던 남아공이 24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6년 간 '절름발이' 신세였던 올림픽은 이제서야 똑바로 섰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금12, 은5, 동12개를 따내며 종합순위 7위를 기록, 3회 연속 ‘톱10’에 올랐다.
'한국에서 한국으로 끝난 대회'. 한국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대회 첫 금메달과 마지막 금메달을 모두 따내는 쾌거를 이뤘다. 여갑순은 사격 공기소총에서 대회 1호 금메달을 땄고,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는 손기정 이후 56년 만에 월계관을 쓰며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했다. 역도 56kg급에 출전한 전병관은 한국역도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무대에서 정상에 올랐다. '작은 거인'이 마침내 세계를 번쩍 들어올렸던 것이다. 투기종목의 강세도 여전했다. 한국의 메달밭, 레슬링에서는 안한봉(그레꼬로만형 57kg급)-박장순(자유형 74kg급)이 금메달을 보탰다. 특히 안한봉은 결승전에서 리파트일디츠(독일)를 맞아 치열한 접전 끝에 6-5 역전승을 거두고 금메달을 따냈다. 처음 정식종목이 된 배드민턴에서도 금메달 2개를 거둬들였다. 박주봉-김문수 조, 황혜영-정소영 조가 남녀복식 동반우승을 차지한 것. 그야말로 '환상적인 호흡' 이었다. 또한 여자핸드볼은 결승에서 노르웨이를 누르고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건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이었다. 황영조는 끈질기게 따라붙은 일본의 모리시타를 따돌리고 가장 먼저 결승점에 골인했다. 그 순간 대한민국 국민 모두 만세를 불렀다. 눈시울은 점점 불거지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오늘은 내가 국적을 찾은 날이야. 내가 노래에 소질이 있다면 운동장 한복판에서 우렁차게 불러보고 싶어". (고) 손기정 옹은 92년 8월 9일 황영조가 우승한 직후 소감을 이렇게 밀했었다.
▲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대회. 한국은 금7, 은15, 동5개로 종합순위 10위를 차지했다. 4회 연속 '톱10'에 들었지만 기대치에 못 미치는 성적. 이번 대회는 한국 엘리트체육 정책의 한계를 절감한 대회였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의 투혼은 여전히 반짝반짝 빛났다. 여자양궁은 84년 L.A 올림픽 이후 개인전 4연패, 단체전 3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특히 여자양궁 2관왕 김경욱은 수 차례 골드 정중앙에 있는 카메라를 명중시켜 '퍼펙트 골드'라는 말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전기영-조민선은 유도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메쳤다. 특히 전기영은 알고서도 당한다는 업어치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상대선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시상대에 섰는데, 이것이 2002년 월드컵 '태극기 패션'의 원조라는 '설'도 있다. 또한 지난 대회에서 은메달에 그친 방수현은 '숙적' 수지 수산티에 통쾌한 설욕전을 펼치며 '셔틀콕 여왕'으로 등극했다. 김동문-길영아 조도 예상을 뒤엎고 결승에서 박주봉-라경민 조를 물리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편 북한은 여자유도의 계순희가 일본 유도영웅 다무라 료코를 꺾고 우승하는 파란을 일으키며 금2, 은1, 동2개로 종합 33위를 차지했다. 계순희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57kg급에 출전,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을 노린다.
▲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시드니 올림픽은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대회였다. 남,북한은 개막식에서 한반도기를 흔들며 동시입장 했다. 근대올림픽에서 분단국이 각각 출전해 동시입장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TV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시울은 점점 불어졌다. 올림픽 남북 동시입장은 전 세계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의 국기인 태권도가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한국 스포츠사에 한 획을 긋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국은 금8, 은10, 동10개로 종합 12위를 차지했다. 5회 연속 '톱10' 진입이 좌절된 것도 아쉽지만 그보다도 메달이 극소수 종목에 편중되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드러났다. 금메달 분포를 살펴보면 태권도 3, 양궁 3, 펜싱 1, 레슬링 1개다. 태권도가 아니었다면 종합 12위는 어림도 없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김영호가 남자펜싱 플뢰레 결승에서 세계랭킹 1위 비스도르프를 꺾고 플로어에 주저 않아 함성을 지르는 순간, 국민들도 덩달아 포효했다. 펜싱 불모지에서 일궈낸 금메달. 그것은 아름다운 이변 이었다. '작은 거인' 심권호는 한국 올림픽 역사를 다시 썼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그레꼬로만형 48kg급에서 우승했던 그는 이번 대회에서는 54kg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한국 레슬링 사상 첫 올림픽 2연패의 위업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현재 대표팀 트레이너로 있는 심권호는 자신을 꺾고 대표로 선발된 임대원에게 열심히 금메달 비법을 전수해주고 있다. '만년 2위' 남자양궁도 오교문-장용호-김청태 트리오가 환상적인 팀워크를 과시하며 금과녁을 뚫었다. 한편 이 대회에서 아깝게 은메달에 그친 문의제-김인섭(이상 레슬링), 이동수-유용성 조(배드민턴)는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한다. 기필코 '시드니의 한'을 푼다는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