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올림픽은 108년 만에 근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다. 한국의 목표는 금메달 13개 획득-종합 10위권 진입. 한국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태극기를 휘날리며 출전한 이래로 1980년 모스크바 대회를 빼곤 모두 참가했다. 1932년 L.A올림픽에 일장기를 달고 처음 출전했던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했다. 1980년대 이후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한 한국의 올림픽 출전사를 두 차례로 나눠 싣는다.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제 치하였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일본선수단에는 한국선수 7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24세 청년 손기정은 마라톤에서 월계관을 썼다. 그것도 2시간29분19초, 세계최고기록이었다. 함께 출전한 남승룡도 3위(2시간31분32초)를 차지했다. 하지만 손기정은 시상대에서 우울한 표정으로, 계속 땅만 쳐다봤다. 그의 가슴엔 일장기가 박혀 있었고, 스타디움에는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승 직후 손기정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마침내 우승은 했으나 웬일인지 울고만 싶소"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손기정-남승룡의 쾌거는 일제 치하에서 고통 받던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북돋워 주었고, 이것은 민족지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손기정은 86년에 국적을 되찾았고, 당시 부상으로 받은 투구도 다시 받았다. 또한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했을 때 히틀러는 손기정에게 그리스의 월계수 한 그루를 선물했는데, 이것은 지금 손기정공원(서울시 중구 만리동 소재)에 '손기정의 월계관수'(서울시 기념물 제5호)로 남아 있다. '한국의 스포츠 영웅' 손기정 옹은 2000년 향년 90세로 작고했다.

▲ 1948년 런던 올림픽

2차 세계대전 여파로 12, 13회 대회는 취소됐고, 12년 만인 1948년에 올림픽이 다시 열렸다. 이 대회는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참가한 올림픽. 한국은 7개 종목에 67명의 선수단을 파견했고, 동메달 2개를 따내 59개국 중 32위를 차지했다. 해방 조국에 첫 올림픽 메달을 선사한 선수는 김성집 이었다. 당시 28세 휘문고 체육교사였던 김성집은 역도 미들급에 출전, 인상, 용상, 추상(이후 폐지) 합계 380kg을 들어올려 동메달을 따냈다. 은메달리스트와는 불과 1.5kg 차이. 복싱 플라이급 경기에 나선 한수안(작고)도 동메달을 보탰다. 첫 출전 치고는 큰 성과였다. 무엇보다도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 1952년 헬싱키 올림픽

헬싱키 올림픽이 열린 1952년 7월, 한반도는 한국전쟁으로 포연에 휩싸여 있었다. 올림픽 출전 여부를 놓고도 찬반양론이 갈라졌는데, 결국 국회는 만장일치로 올림픽 파견 건의를 가결해 6개 종목에 43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은 전 대회와 똑같은 동메달 2개의 성적을 거뒀다. 김성집은 런던 올림픽에 이어 이 대회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고, 강준호도 복싱 밴텀급에서 동메달을 따냈다. 올림픽 두 달 전 보스턴 마라톤에서 3위에 입상해 많은 기대를 모았던 최윤칠은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에 밀려 아깝게 4위에 그쳤다. 한국은 참가국 69개국 가운데 39위로 대회를 끝마쳤다. 그러나 순위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올림픽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국 선수단의 모습에서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지친 국민들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던 것이다.

▲ 1956년 멜버른 올림픽

1956년 멜버른 올림픽은 한국이 올림픽에서 처음 은메달을 딴 대회다. 복싱 밴텀급에 출전한 송순천은 결승전에서 서독의 베렌트와 맞섰다. 1m58의 파이터 송순천은 베렌트를 거세게 몰아 부쳤고, 아무도 송순천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판정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베렌트의 3-2 판정승. 금메달을 눈 앞에서 도둑맞은 송순천과 한국 선수단은 망연자실해 했다. 잠시 후 시상식이 거행됐다. 묵묵히 시상에 오른 송순천은 태극기가 게양대에 올라가는 순간, 애써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찌 보면 금메달과 은메달을 가른 것은 실력 차가 아니라 국력의 차이였다. 한국으로서는 약소국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대회였다.

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두 사람은 32년 만에 재회했다. 그때 한국을 찾았던 베렌트가 송순천에게 그랬다지. "당신 주먹이 더 강했소. 그날 경기의 승자는 당신이요". 중년의 두 신사는 오랫동안 포옹을 나눴다. 진하게~ 뜨겁게~

▲ 1960년 로마 올림픽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와 훗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 캐시어스 클레이어를 탄생시킨 로마올림픽. 이 대회는 최초로 개회식을 비롯한 주요경기가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로 중계되기도 했다. 한국은 9개 종목에 76명의 선수단을 보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배의 연속이었다. 한국은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노메달 치욕을 당했다. 물론 부진에는 이유가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4.19혁명이 일어나는 등 정국이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나라가 그렇게 시끌시끌하니 선수들이 훈련을 제대로 했을 리 만무했다. 거기다 외국 선수들과의 실력 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는 상황. 메달을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었는 지도 모른다.

▲ 1964년 도쿄 올림픽

레슬링은 역대 올림픽에서 가장 많은 메달을 따낸 종목이다. 지금까지 금9 은10 동13개 등 모두 32개의 메달을 기록했다. 레슬링 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장창선은 한국 올림픽 레슬링 역사상 첫 은메달리스트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 특히 한국은 투기종목에서 강세를 보였다. 정신조가 복싱 밴텀급에 출전해 은메달을 보탰고, 이 대회에서 처음 정식종목이 된 유도에서도 김의태(미들급)가 동메달을 메쳤다. 한국의 올림픽 효자종목인 유도에서 처음 나온 메달이었다. 아사아 대륙에서 최초로 개최된 도쿄 올림픽. 이 대회는 지리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 열리는 지라 한국은 16개 종목에 출전국 중 5번째로 많은 대규모의 선수단(선수 165명, 임원 59명)을 파견했다.

▲ 1968년 멕시코 올림픽

1968년 올림픽은 멕시코 시티에서 열렸다. 제19회 올림픽 개최도시가 멕시코 시티로 정해지자 주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멕시코시티는 해발 2,240m에 달하는 고지대. 평지에 비해 기압, 온도가 상당히 낮기 때문에 선수들의 생체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많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은 예정대로 멕시코에서 열렸다. 그 와중에 한국은 76명(임원 21, 선수 55)의 소규모 선수단을 보냈고, 지용주(라이트플라이급)-장순길(밴텀급)은 복싱에서 각각 은1, 동1개를 따냈다. 다른 종목이 모두 전멸한 가운데 복싱에서 2개의 메달을 따낸 한국은, 108개국 중 36위로 대회를 마쳤다. 특히 올림픽 기간 중 파견한 예술문화행사단은 현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 1972년 뮌헨 올림픽

한국은 배구,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수영, 육상 등 메달에 근접한 종목을 선별해 총 62명(임원 6 선수 46명)이 참가했다. 오승립(유도 미들급)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금메달을 하나도 따내지 못해 종합 34위에 그쳤다. 반면 올림픽에 첫 선을 보인 북한은 덜컥 금메달을 따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 금1, 은1, 동메달 3개로 당당히 종합 22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호준은 사격 소구경 복사에서 금메달을 확정지은 뒤 가진 인터뷰에서 "원수의 가슴을 겨냥하는 기분으로 쐈다"고 말해 또 한 번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광복 후 3년 만에 벌어진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한국. 뮌헨 올림픽까지 총 7차례 출전했지만 금메달은 여전히 남의 몫이었다. 아, 언제쯤 금메달을 딸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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