슉슉~ 쿠바의 복싱선수 펠릭스 사본입니다. 복싱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제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는 2001년에 은퇴해서 지금은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선수시절이 그리울 때는 없냐구요? 당연히 그립죠. 제가 복싱 좀 했잖아요.^^ 후배들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착 올라간답니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옛날 생각도 많이 나구요. 하지만 지도자라는 직업도 힘든 만큼 참 매력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처음에는 별 볼일 없던 선수가 눈에 띄게 기량이 좋아졌을 때, 제가 가르친 선수가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그때 기분은 한 마디로 짱이죠. 쿠바는 아테네 올림픽에서 복싱 종합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 복싱도 특유의 매운 맛 보여주세요.
꼬맹이였을 때는 육상선수로 뛰었어요. 그러다가 15살 때 복싱으로 전환을 했죠. 복싱이 저한테는 잘 맞았나봐요. 데뷔한 해에 국내 아마복싱 헤비급 챔피언이 됐거든요. 일단 국내무대를 평정한 후 세계무대에 도전장을 내밀었죠. 85년 18살 때 세계주니어선수권에 나갔어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무지 떨리고 긴장됐죠. 그렇게 큰 대회는 처음이었거든요. '경험 삼아' 나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죠. 세상에! 근데 덜컥 금메달을 땄지 뭡니까. 이 대회를 계기로 제 이름이 세계 복싱계에 알려지기 시작했죠. 하지만 겨우 첫 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했어요.
저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처음 금메달을 땄습니다. 아쉽게도 88년 서울 올림픽은 쿠바가 불참해서 나가지 못했죠. 쿠바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바르셀로나 대회에 나갔어요. 많은 사람들이 눈빛을 빛내며 관심 있어했죠. '아마복싱 최강국 쿠바가 금메달을 몇 개나 가져갈까'. 그 실력이 어디 가겠습니까. 쿠바는 12체급 중 7체급을 석권했답니다. 저도 한 몫 단단히 했죠. 92년 대회에서는 8강전이 고비였어요. 대널 니콜슨(미국)은 의외로 강했습니다. 접전 끝에 13-11로 이겼죠. 그 다음부터는 수월했어요. 결승전에서 데이빗 이존라텔을 14-1로 이기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죠.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별다른 경쟁자가 없었어요. 결승 상대였던 데이빗 디피본(캐나다)을 20-2로 여유 있게 꺾고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죠.
"조국의 국민을 위해 링에 오르고 있고, 국민에게 이 영광을 바치겠다". 제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뒤 한 말이에요. 그때 제 나이는 복싱선수로는 환갑이랄 수 있는 33살이었죠. 주변에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어요. '너무 나이가 많은 거 아니냐'구요. 하지만 전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경기에서 모든 걸 보여주겠다' 이를 악물었죠. 결승전 상대는 술타나메드 이브라모프(러시아)였어요. 2라운드까지 9-1로 앞서나가다가 4라운드에서 왼쪽 눈 밑이 찢어져 피를 흘렸죠. 저는 악착같이 버텨냈고, 잠시 후 종료벨이 울렸습니다. 21-13. 주심이 제 손을 번쩍 치켜들었을 때, 가슴이 한없이 벅차 올랐습니다. 올림픽 복싱 헤비급 3연패를 달성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으니까요.
이쯤 해서 마이클 베네트(미국)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네요. 시드니 올림픽 복싱 최고의 빅카드는 저와 베네트의 8강전이었어요. 이 경기는 사실상 결승전이나 다름없었죠. 교도소 출신 복서 베네트는 복싱 입문 2년밖에 안 된 신예지만 실력은 짱짱했어요.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었죠.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경기는 싱겁게 끝이 났어요. 저는 3라운드 1분57초 만에 RSC로 베네트를 제압했죠. 1라운드를 7-2로 마친 후 2라운드에서 17-6으로 점수차를 벌렸어요. 3라운드 초반부터 거세게 몰아 부쳤고, 종료 3초 전 주심이 경기를 중단시켰죠. 베네트는 저의 적수가 되지 못했어요. 경기 후 베네트가 그랬다죠? "그 앞에서 나는 그저 링 위에 선 표적에 불과했다".
86년 복싱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 해 타이슨은 약관 20살의 나이에 프로복싱 WBC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죠. 그리고 저도 세계선수권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미래의 헤비급 '거물스타' 두 명이 동시에 눈도장을 찍은 거죠. 아직도 인터넷에 이런 질문이 종종 올라온다고 들었어요. "그때 사본과 타이슨이 싸웠다면 누가 이겼을까".^^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언제 어떠한 조건에서 어떤 룰을 정해놓고 싸우든 타이슨을 이길 자신 있다"고 말이죠. 현역시절, 끊임없이 프로행 유혹을 받았어요. 프로모터들이 수천만 달러의 스카우트 비용을 제시하면서 저를 괴롭했죠. 하지만 저는 돈을 거부하고 명예를 선택했습니다. 저의 우상 테오빌로 스테븐손처럼요.
지금까지 올림픽 복싱에서 금메달을 3개 딴 선수는 저를 포함해 3명입니다. 뮌헨, 몬트리올, 모스크바 올림픽 슈퍼헤비급을 3연패한 스테븐손(쿠바)과 48년(미들급)에서 56년(슈퍼웰터급) 대회까지 3연패를 이룬 라즐로 파브(헝가리)가 그 주인공이죠. 저는 '스테븐손의 영광을 잇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어요. 스테븐손은 어릴 적 제 영웅이었거든요. 스테븐손은 기량도 탁월했지만 경기 외적인 면에서 배울 점이 참 많았습니다. 그는 70년대에 프로로 전향해서 알리와 경기하면 거금을 주겠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끝까지 아마에 남았죠. 가난하지만 당당한 자세, 조국의 명예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태도, 돈보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 링에 오르는 모습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반할 만 하죠?^^
올림픽 3연패 못지 않게 세계선수권 6연패도 대단한 기록이 아닐까 싶어요. 저는 처녀출전 한 86년 세계선수권에서 우승한 이래로 97년까지 단 한 번도 세계선수권 우승을 놓치지 않았어요. 무려 11년 동안 정상을 지킨 거죠. 하지만 6연패를 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97년 대회 결승에서 우세한 경기를 하고도 루슬란 시가예프(우즈베키스탄)에 4-14로 판정패 당했죠. 그런데 우승자 시가예프가 프로권투 선수로 활약했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거에요. 시가예프는 금메달을 박탈당했고, 준우승자인 제게 금메달이 수여됐죠. 시가예프는 99년 세계선수권 8강전에서 다시 만났는데 제가 판정으로 이겼답니다. 99년 대회에서는 다른 체급 심판판정 문제로 쿠바가 선수단을 철수하는 바람에 경기도 못해보고 졌어요. 그때 결승전 상대가 베네트 였는데, 시드니 올림픽에서 KO로 확실하게 되갚아 줬습니다.^^ '한 번 진 상대에게 또 질 수는 없다'. 제 철칙이죠.
'살아있는 전설' '쿠바의 복싱 영웅'. 제 이름 앞에는 늘상 이런 수식어가 붙어 다녔죠. 그런 얘기 들으면 기분 어떠냐구요? 좋죠.^^ 저는 2001년에 은퇴했습니다. 내심 올림픽 4연패에 대한 욕심이 있었지만 '만 34세 이상은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없다'는 국제아마추어복싱연맹 규정 때문에 링을 떠났죠. 좌절보다 영광이 많았던 선수생활로 기억되는 데요.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쿠바 선수단 기수로 활약했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죠. 비록 나이 제한 때문에 글러브를 벗었지만 복싱은 제 인생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도자로서 모든 걸 쏟아 부을 작정이에요 저보다 더 나은 선수를 키워보고 싶어요. 참, 어떤 분이 그러더군요. 링에 입장할 때 고개 숙이지 않고 다리로 로프를 타넘고 들어오는 게 인상적이었다구요. 왜 그랬냐구요? 별 거는 없구요. 상대방 기 죽이려고 그랬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