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KT&G 여자배구단 체육관에서는 전지훈련 차 방문한 일본 도레이 팀과 KT&G와의 친선게임이 열렸다. 코트에서는 양팀 선수들이 한창 몸풀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체육관 한 켠에서 코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선수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선수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다름 아닌 최광희였다.

최광희(KT&G·30)는 얼마전 일본에서 개최됐던 여자배구 월드컵(11월 1일~11월 15일) 폐막 전날인 14일, 폴란드전에서 3세트 초반, 리시브 하는 도중 양쪽 무릎이 꺾이는 부상을 당했다.

당시 부상으로 교체된 뒤 무릎에 붕대를 감고, 심각한 표정으로 벤치에 앉아있던 최광희의 모습이 TV중계 카메라에 여러 차례 잡히기도 했다. 다행히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부상이 심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래저래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는 듯했다.

이번 대회는 1~3위 입상팀에게 2004아테네 올림픽 본선 직행티켓이 주어지는 중요한 대회였다. 우리나라는 직행티켓은 고사하고 12개 출전국 중 최종순위 9위(3승8패)에 그쳤다. 95년 5위, 99년 4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실망스런 결과가 아닐 수 없다.

"풀세트까지 가서 진 경기도 많았고, 월드컵에서 성적이 이렇게 저조한 경우도 이번이 처음이라서 아쉬움이 커요. 준비기간이 좀더 있었더라면 풀세트 경기는 승리해서 지금보다는 성적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이번 대회는 보름 동안 각 팀당 11게임을 소화해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 보다 우리가 부진했던 가장 큰 원인은 준비기간이 너무 짧았던 탓이다. 전국체전(10월 11일~10월 16일), 실업대제전(10월 21일~10월 26일)이 끝나고 난 뒤 다음날 바로 일본으로 출국했기 때문에 선수간에 손발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4일에 불과했다.

"국내볼이랑 국제볼이랑 볼도 달라요. 볼에 적응하려면 적어도 2~3주정도 지나야 되는데, 선수들이 다 피로한 상태니까 체력 소모도 컸고, 볼적응도 늦어서 더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다 보니 자연 대회 막바지에 가서는 체력이 바닥나기 마련. 따지고 보면 최광희의 부상도 준비기간 부족 탓이 크다. 체력이 떨어지면 그만큼 부상도 입기 쉬우니까 말이다. 또한 세 차례의 풀세트 경기(미국, 일본, 쿠바전)를 모두 내준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올해 4월부터 대표팀 완장을 차고 있는 최광희로서는 더욱 아쉬움이 크다. 사실 그녀는 작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쉴 틈이 없었다. 국내경기건 국제경기건 자신을 부르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묵직한 스파이크를 때려대고, 코트에 부지런히 몸을 날렸다. 하지만 생각만큼 결과가 안 나오니 기운이 빠질 수밖에.

"힘들어도 어디서든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감사해요. 근데 이번처럼 성적도 안 나고, 다치기까지 했을 때는 정말 의욕이 상실돼요. 힘들어도 성적이 좀 나고, 주위에서 '수고했다', '잘했다' 이런 말 들으면 보람도 있고, 극복하기 쉬울텐데…."

체력도 달렸지만 정신적으로도 무척 피곤하고 힘든 대회였다고 고백한다.

"보는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밖에 못할까', '왜 저런 미스를 할까' 말을 하지만 하는 사람들도 너무 속상하고 답답한 거예요. 이렇게밖에 못하니까. 더구나 국내에서 혹평을 들었을 땐 사기저하 되고, 코트에 서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어찌보면 1라운드 첫 경기였던 미국전부터 어긋났다. 세트 스코어 2-3(21:25 19:25 25:21 25:22 13:15)으로 패했던 미국전을 승리로 이끌어서 상쾌하게 스타트를 끊었다면 다음날 이탈리아, 일본전에서 흥에 겨워 했을텐데 결과적으로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던 게 연패의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전도 아쉬움이 많이 남기는 매한가지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실력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당일 컨디션에 따라서 경기결과가 많이 좌우되는데, 객관적인 전력상 50:50 또는 60:40으로 우리가 일본을 다소 앞선다는 것이 최광희의 평가다. 하지만 미국전과 마찬가지로 풀세트(25:23 21:25 28:26 15:25 12:15)끝에 역전패 당했다.

"심리적으로 가장 부담이 됐던 팀은 일본이에요. 우리나라 정서가 일본한테 지면 거의 매국노 분위기니까(웃음). 그리고 일본은 배구인기가 좋아서 관중들의 호응도가 크거든요. 아무래도 경기할 때 좀 위축이 되죠. 실력차가 확 나는 게 아니라서 저희가 준비기간이 좀 있었으면 덜 했을텐데,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나갔으니까 아무래도 외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죠"

경기는 패했지만 이번 대회를 통해서 얻은 소득도 있다. 대표팀에 어린 선수들이 많아 결정적인 순간, 경험 부족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경기를 거듭할 수록 선수들이 자신감이 붙는 것 같다고 최씨는 말한다. 특히 한국배구가 발전하려면 장신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야 되는데, 그런 면에서 대표팀 새내기인 임유진(180cm), 김향숙(190cm)의 성장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에 아시아는 약게 했어요. 근데 요즘은 유럽도 아시아 스타일을 많이 따라와요. 암만해도 아시아 쪽은 수비가 든든하고, 유럽이나 남미 쪽은 신체적인 조건이 좋으니까 블로킹이랑 서브가 강한데, 요즘엔 별 차이를 못 느끼겠어요. 신장도 좋은데다가 배구도 '낮게 빠르게' 하니까 갈수록 유럽이나 남미 쪽 상대하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최광희는 "한국배구의 장점인 수비와 리시브를 더욱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팀이 장신화 되는 건 바람직하지만 아무래도 경력이 짧아지고, 키가 커지다 보니 예전과 비교했을 때 수비에서 헛점이 많이 보이는 까닭이다.

94년에 처음 태극마크를 단 최광희는 1996년, 2000년 올림픽에 모두 참가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메달권 진입에는 실패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은 선수로서는 마지막 올림픽인 만큼 각오가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96년에는 진짜 얼떨결에 나갔던 것 같아요. 2000년 올림픽 때는 미국한테 2-3으로 져서 4강에 못 들어갔어요. 그때 생각하면 정말 자다 깰 정도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데, 일단 내년 5월에 있을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티켓을 따는 게 급선무고요. 올림픽에 나가게 되면 다시 마음 합쳐서 4강에 들 수 있도록 죽어라 하고 연습하는 수밖에 없죠. 진짜 연습밖에 없는 거 같아요.(웃음)"

본인은 순전히 '짬밥' 때문이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실력적으로나 실력 외적인 면에서 최광희가 대표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크다. 대표팀 주장으로서 때로는 '카리스마'로, 때로는 '자상함'으로 후배들을 다독거리는 최광희. 혹시 주장으로서 힘든 점은 없을까.

"나도 아픈데, 나도 쉬고 싶을 때 있죠.(웃음) 내색을 못하니까 속상할 때도 있어요. 근데 팀을 생각하면 당연히 해야 되는 거고, 애들 입장에서는 '언니가 말해줬으면…'하는 게 있잖아요. 중간에서 그런 역할 하는 게 힘들지만 애들이 잘 따라줘요. 참고 팀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모습 보면 고맙죠"

최광희의 눈빛에선 오기와 독기가 뚝뚝 묻어난다. 평소 말할 때는 털털함과 인간미가 넘치는 여유있는 모습이지만 경기할 때만큼은 악바리 근성으로 똘똘 뭉쳐 눈매가 매섭기 그지 없다. 대표팀에서 최고참인 만큼 체력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데, 누구보다도 체력훈련에 열심인 모습은 후배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어 준다.

"웨이트를 열심히 해요. 지금은 테크닉보다는 파워, 높이가 안 되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자사제품인 홍삼 많이 먹고(웃음). 나이 들어서 못하면 서럽잖아요"

일단 최광희로서는 재활훈련에 온 힘을 쏟을 생각이다. 2004V-투어대회(전신 슈퍼리그)가 20여일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하루 빨리 제 컨디션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올해 실업 12년차인 최광희의 최우선 목표는 팀 우승. 지금까지 우승을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고 MVP나 인기상 같은 개인상도 꼭 한 번 타보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미래의 실업팀 감독을 꿈꾸는 최광희는 올해 대학원(경희대 체육교육)에 입학했다. 이날도 1주일에 2번 있는 대학원 수업을 받으러 총총히 체육관을 떠났다. 얼굴에 미소를 듬뿍 머금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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