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5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배구 '추억의 올스타전'이 열린다. 고려증권 OB팀과 통합 OB팀간의 '꿈의 대결'이 펼쳐지는 것. 특히 98년 팀 해체 이후 6년만에 다시 뭉친 고려증권 선수들은 일주일에 세 차례 모여 맹연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지라 예전만큼 점프도 잘 안되고, 마음만큼 몸도 안 따라 주지만 무슨 상관이랴. 올드팬이라면 추억의 스타들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에 매일밤 잠 못 이루지 않을까.

"김호철 토스하고, 강만수 공격하는 것도 보고 싶고, 이쪽에서는 장윤창 스파이크 하는 거. 돌고래 타법, 그게 얼마나 멋졌는데. 정의탁 개인시간차도 보고 싶구요."

그런데 선수들과 팬들 못지 않게 '추억의 올스타전'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또 있다. 바로 '배구중계의 대명사' 유수호(58) 아나운서다.

"그 양반이랑 하면 세상 편하지"

"배구 중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콤비는?"

학창시절, 백구의대제전(현 슈퍼리그 전신)과 함께 주말 오후를 만끽한 기억이 있다면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오관영(성결대 교수)-유수호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만큼 오-유 콤비는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 유수호 아나운서와 구수한 입담이 일품이었던 오관영 해설위원은 찰떡 호흡을 자랑했다.

두 사람이 처음 호흡을 맞춘 건 80년 라디오 중계였다. 그리고 나서 9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18년 동안 같이 했으니까 '배구중계=오관영-유수호'라고 생각하는 것도 절대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이 콤비 중의 한 명인 유수호 아나운서를 만났다.

사실 두 사람이 알고 지낸 지는 훨씬 더 오래됐다고 한다. 70년에 처음 안면을 텄으니 '30년 지기'다. 나이로는 9살 차이가 나지만(오관영 교수가 윗사람이다) 죽이 잘 맞는 '술친구'였고, 평상시에는 형님, 아우처럼 격의없이 지내던 사이였다. 원체 친하기도 했지만 중계할 때 두 사람 모두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타협형'이라서 호흡이 척척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방송에는 안 나갔지만 처음에는 중계하다가 싸운 적도 있다고 한다.

"제가 "이거 이건 뭐 아닙니까"라고 하면 동조를 해줘야 되는데 "아니다"라고 나와요. 그럼 싸우는 거예요. 일단 제가 주(主)니까 강하게 나가면 슬쩍 피해서 가고, 자기 의견하고 다르면 대답 안 하고. 그런 적도 좀 있었어요."(웃음)

하지만 좀 지나고 난 후에는 '척 하면 착'이라서 싸울 일도 없고,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 재밌게 했어요. 근데 오관영씨가 내용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의견에 반대하는 게, 경기를 그렇게 흥미롭고, 재밌게 해주는 건 그 양반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고려증권 팬이라면 오관영씨가 해설할 때 유독 고려증권을 심하게 다그치고, 호되게 야단치곤 했던 것에 대해 다소 섭섭한 감정을 가졌을 법도 한데 사실은 그게 다 '작전'이었다는 걸 아는가.

오관영씨는 고려증권 팀을 만든 주인공으로 단장을 역임했었다. 아무래도 고려증권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오히려 그 반대로 했다고 한다.

"고려증권이랑 현대가 결승전에서 붙으면 오관영 씨는 자기도 모르게 고려증권 편들 수밖에 없잖아요. 그럼 제가 그래요. "나는 고려증권 편든다. 오 선배는 현대 편을 드시오." 짜고 들어가. 그럼 중립이 되잖아요. 오관영씨가 팀 책임자니까 잘 하면 그냥 내버려두는데 못하면 또 화를 내요. "저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는데." 그러면 제가 고려증권 편을 들어주면서 균형을 맞추는 거죠."(웃음)

2월 15일에 열리는 '추억의 올스타전'에서 오관영-유수호 콤비의 감칠맛 나는 중계를 다시 듣고픈 사람이 어디 기자 한 사람 뿐이랴.

"드디어 일본을 꺾었습니다"

유수호 아나운서가 처음 배구중계를 시작한 것은 79년이었다. 69년 TBC 아나운서로 입사한 후 71년부터 고교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는데, 60년대 당시 배구로 유명했던 학교(덕수상고)를 나온 덕분에 배구중계 마이크도 함께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로 일일이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배구 중계를 해왔지만 '가장 기억나는 경기'를 말할 때 항상 첫 손가락에 꼽는 경기가 있다. 바로 79년 바레인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아남자배구선수권대회다.

이 대회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대회였다. 우선 유수호 아나운서의 배구 중계 데뷔 무대였고,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 남자 배구가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격파한 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우리 나라는 일본에 두 세트를 먼저 내주고, 3세트를 내리 따내면서 통쾌한 역전승을 거뒀다.

"바레인 체육관이 거의 울음 바다였어요. 그때 한창 중동에 건설붐이 일 때라서 우리 게임 있을 때면 한국 사람들이 최소 1천 명씩 왔어요. 그날은 건설 현장 다 노는 거예요. 체육관이 거의 한국 응원단으로 꽉 들어찼어요. 그런데 일본을 이겼으니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어요."

그 당시 국제대회는 민·관 합동중계방송을 했었다. 아나운서는 KBS에서 무조건 한 사람, 나머지 4개(TBC, 문화방송, 동아방송, 기독교방송) 방송사에서 돌아가면서 한 명씩 갔는데, 마침 TBC 차례였다. 유수호 아나운서에게 기회가 왔다. 또한 그때만 해도 아나운서가 한 세트씩 바꿔가면서 중계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운 좋게도 5세트는 유수호 아나운서 순서. 덕분에 감격적인 순간을 국민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1시 무렵이었는데, 중동 지역에 우리 나라 방송단이 최초로 가서 중계를 한 거였어요. 다 들었죠. 눈물도 참 많이 흘렸어요. 이기고 나서 해설가가 막 우는 거예요. "드디어 이겼습니다." 마무리 하면서 같이 울어야지 어떡해. 저는 엉엉 울 수는 없으니까 계속 울먹거렸어요."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경기로는 한·일전을 든다. 배구가 한창 인기 절정이었을 무렵, 1만 명의 관중들이 잠실학생체육관을 가득 메웠다. 경기 시작 전, 애국가가 울려퍼지는데 1만명의 관중들이 일제히 애국가를 따라부르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장 기억나는 외국 선수는 누구일까?

"나까가이치죠. 나까가이치는 뻔히 알면서도 못 막았어요. 후위에 갔다 그러면 어느 자리에 있든지 간에 백어택 준비하고 있어요. 걔는 수비 절대 안 해요. 바로 앞에 와도 도망가. 옆에 놈이 받아주지. 그럼 백어택을 하는 거야. 나중엔 체력이 달려서 점프를 못해서 잡았지만 그 놈 전성기 때는 아무도 못 막았지."

"10분이면 끝납니다"

중계 방송을 하다 보면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참 많이 생긴다. 특히 스포츠는 시시각각 경기 양상이 바뀌고, 승부를 미리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물론 베테랑인 유수호 아나운서도 예외는 아니다. 중계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참 많다.

시청자들이 중계 방송 보다가 가장 김빠질 때는 박빙의 순간, 한참 손에 땀을 쥐어가며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나운서로부터 이런 멘트가 흘러나올 때다.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경기 결과는 스포츠뉴스 시간에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때마다 시청자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손바닥에 '참을 인'자를 새기면서 마음을 가라앉혀 보지만 한 번 난 화를 누그러 뜨리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어디 시청자들만 답답하랴. 중계하는 입장에서도 애가 타서 발을 동동 구르기는 마찬가지다. 승패의 갈림길, 그 아슬아슬한 순간을 생생하게 전달해 주지 못하니 얼마나 안타까울까. 유수호 아나운서는 이런 경우에 대처하는 노하우를 공개했다.

"예전에는 정규 방송 시간이 5시였잖아요. 4시 50분, 풀세트 간다 그러면 의도적으로 그래요. "5세트는 15점제이니까 10분이면 끝납니다. 10분." 그럼 편성팀에서 5분만 연장해 주면 되겠냐 방법을 찾자 그래요. 그렇게 해서 끝까지 중계한 적도 있어요. 기분 좋지. 그 다음엔 "경기 끝났습니다." 바로 이름 올라가는 거죠. 그리고 저도 불만이 그거예요. 중간에 끊었으면 제발 자막이라도 넣어달라."(웃음)

유수호 아나운서는 중계방송 할 때 조심해야될 사항 두 가지를 알려준다. 우선 선수들의 기량이나 감독의 작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말 것. 왜냐하면 중계방송은 파급 효과가 엄청 나서 함부로 말했다간 본의 아니게 선수나 감독이 피해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리 점수차가 많이 나더라도 '어느 팀이 이겼다'고 앞질러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일방적인 경기에서 승패가 뒤집히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고려증권이 믿기 어려운 '뒤집기쇼'를 곧잘 연출했었고, 91년 독일월드컵 한·독전에서도 5세트에서 11-14로 지다가 역전시킨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은가.

요즘처럼 남자부, 여자부 모두 독주체제일 때는 특히 아나운서의 역할이 중요할 듯 싶다. 유수호 아나운서에게는 재미 없는 경기도 재밌는 것처럼 중계하는 나름의 비법이 있다.

"예전에 서브권제였을 때는 15-0 게임 중계도 몇 번 해봤어요. 그때는 재미없다고 안 해요. 간단해요. 한 점을 나느냐, 한 점 나면 마치 그 팀이 이긴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서 '한 점 났습니다' 그러는 거죠."(웃음)

스포츠 캐스터 계보 잇고파

"종목 중계는 제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많이 했을 거예요. 90년 북경아시안게임 때는 17개까지 했고, 86년 아시안게임부터는 2년마다 아시안게임, 올림픽은 빼놓지 않고 다 했어요."

그래서 가끔씩 '스파이크' 해야 되는데 '스매싱'하기도 하고, 전혀 엉뚱한 용어가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던 적도 있지만 시청자들에게 생소한 종목을 중계할 때면 마치 '비인기종목 전도사'가 된 것 같아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중계하면서 눈물 날 뻔한 적은 숱하게 많다. 그 중에서도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예상치 못한 금메달을 땄을 때, 당연히 진다고 생각했는데 이겼을 때가 가장 감격스럽다. 특히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사격에서 여갑순이 우리 나라 대회 1호 금메달을 땄을 때와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김영호가 펜싱 금메달을 확정짓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한다.

"그때는 정말 목이 메이는데 전 그걸 피하지 않아요. 그냥 울먹이면서 방송해요. 감격적인 순간에 논리정연, 침착함을 유지한다는 건 말이 안 돼죠. 그래야 듣는 사람들도 같이 울고요. 국제대회인데 편드는 건 당연하지."

그렇다면 사전에 감동적인 멘트를 준비할까.

"88서울올림픽 때 탁구에서 유남규(남자단식), 양영자-현정화(여자복식) 조가 금메달 땄을 때 중계를 다 했어요. 그땐 감격적인 멘트를 미리 준비했었어요. 근데 녹화해 놓은 걸 보니까 미사여구는 좋은데 왠지 흥이 안 나더라구요. 그 후로는 말이 엉키든 씹히든 무조건 즉석에서 생각나는 대로 해요. 신기한 건 나중에 들어보면 '준비도 안 했는데 내 입에서 어떻게 저렇게 좋은 얘기가 나오지' 싶을 정도로 술술술…."(웃음)

유수호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세월이 비껴간 듯하다. 예나 지금이나 낭랑한 목소리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스포츠 현장에서 선수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면서 보낸 것이 어느덧 반 평생.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친숙한 목소리로 우리 곁에서 때로는 감격의 순간을, 때로는 안타까운 순간을 전해주고 있는 유수호 아나운서도 내년(9월)이면 정년을 맞는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심혈을 기울일 마지막 대회가 될 거"라고 말하는 유수호 아나운서는 "앞으로 어떤 스포츠 캐스터로 기억되고 싶냐?"고 묻자 그 전까지 시원시원하게 답변하던 것과는 달리 잠시 뜸을 들인 후 나직나직 말을 잇는다.

"그동안 '스포츠' 한 우물을 팠고, 제 천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바란다면 스포츠 캐스터 계보를 잇고 싶고, 어느 방송이 됐든 앞으로도 계속 목소리 들려드리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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