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마
나혜원 지음 / 사유와공감 / 2025년 3월
평점 :
진한 푸른 빛깔의 물속에 젊은 여성과 해마가 깊이 잠수하는 듯한 표지. 나혜원 작가의 소설집 [해마]의 표지는 소설 내용이 품은 외롭고 쓸쓸함이라는 이미지를 전달한다. 물에 빠지면서 그녀는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소설들을 다 읽고 난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아마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을 피해 고요한 침잠을 택한 그녀가 이제야 비로소 평안할 거라는 생각이다. 소설집과 같은 제목의 단편 <해마>의 주인공은 자신과 아버지를 해마에 비유한다. 가족을 버린 엄마 대신 평생 자신을 거둬준 아버지는 평생 수컷이 새끼를 품으며 살아가는 해마와 같다는 것. 그런 아버지를 닮기 위해 그녀가 취한 행동은 무엇일까? 이 소설집은 어쩐지 모성 혹은 모정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에 따르면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라고 한다. 이 단편소설집 [해마]에도 사랑이 넘쳐나는 이상적인 가족보다는 다양한 불행을 품고 균열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가족들이 등장한다. 갈등과 불화로 인해 갈리지는 부부, 정신병을 가진 가족력을 가진 엄마와 살인자 형을 둔 아빠, 자신의 불행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결국 알코올 중독에 걸려 간암으로 사망하게 되는 가장 등등... 그런데 문제는 부모의 불행은 고스란히 자식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단편의 각 주인공들은 ( 대부분이 여성 ) 어딘가 어긋나있고 고장이 나 있는데, 불행한 유년기의 기억은 결국 어른이 된 후에도 죽음과 살인 등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뭔가 굉장히 잔인하고 냉정한 현실을 비추는 느낌이다.
첫 번째 단편 <변호할 권리>에서 주인공 변호사 신수영은 자기 엄마를 찔러 죽인 이영주를 접견하게 된다. 존속살해라는 엄청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는 이영주. 엄마의 의부증으로 인한 이혼, 아빠의 알코올중독과 간암으로 인한 죽음 그리고 다시 나타난 엄마.... 그러나 결국 엄마와의 만남은 존속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데... ( 엄마를 정신병자로 모는 딸, 그러나 그녀가 거짓말에 능한 경계선 인격장애자라는 느낌이 팍팍 왔다 ) 단편 <상흔>에서 정신적인 문제를 가진 엄마와 살인자 형을 둔 아빠의 딸인 '나"는 가족의 해체 후 보육원에서 성장한다. 성인이 되어 작은 회사에 경리로 취직한 나는 짝사랑하던 남자 사원과 하룻밤을 보내고 그만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사장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식을 올리는 그의 환한 미소를 보게 되는데.... ( 결말이 다소 끔찍하고 잔인했던 걸로 기억나는 소설... 타인을 장난감 대하듯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준다 )
세 번째 단편 <해마>에서 작가가 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던 백수 청년인 주인공은 기분 전환을 위해 제주도로 여행을 가게 된다. 거기서 그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혼자 여행을 하고 있던 젊은 여성을 만나게 되고 그녀에게서 끔찍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 이게 실화라면 평생 트라우마가 남을 듯.... ) 네 번째 단편 <마리모>에서 주인공 최유연은 대학 졸업 이후로도 임용고시 준비를 위해 학교 도서관을 들락거리고 있다. 그녀는 해조류 같은 마리모를 키우면서 외로움과 고독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달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이 15학번 남자 선배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도서관 앞에서 시위를 하는 남자 재원을 만나게 되고 15학번 지승우와의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데 .. ( 다른 단편에 비해서 조금 더 길었던 소설. 뭔가 안타까운 독립 영화처럼 다가왔다. 체리 새우와 마리모는 결코 함께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 )
우리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사랑 이야기에 본능적으로 끌린다. 선남선녀가 만나 서로 아끼고 사랑하고 서로를 꼭 닮은 자식들을 낳아서 영원히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 꿈... 모두가 꾸는 꿈일 테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게 장밋빛만을 품고 있지는 않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폭력적인 면을 가지고 있고, 그런 면으로 인해 우리는 매일 뉴스에서 데이트 폭력, 누군가의 죽음으로 치달은 부부갈등 그리고 끔찍한 존속 살해 등등과 같은 비극적 소식을 듣게 된다. 나혜원 작가의 단편 소설집 <해마>는 이렇게 보고 싶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지만 엄연히 우리의 현실인 비극적 뉴스 속 우리가 알지 못하던 누군가의 사연을 읽고 있는 느낌을 준다. 이 소설집은 나혜원 작가가 인간에 대한 기대감을 모두 버리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이 마냥 아름답고 행복하지만은 않다는 차가운 현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나혜원 작가의 소설집 [해마]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