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저벨
듀나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8월
평점 :
" 이곳에 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듀나의 소설을 [제저벨]로 시작하는 자, 모든 이해와 해석을 버려라..로 읽어버렸다. 물론 독자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SF와 영화에 대한 지식이 한참 떨어지는 나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 이 "제저벨" 은 마치 물리나 수학 공식과도 같았다. 뭔가 읽고 있긴 한데 이게 무슨 소리인지 한참 헤매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누군가 좀 안내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데 멀리서 응원하고 있는 작가님이 보이는 듯도 하다. 듀나 월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반복해서 읽어보니 이야기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야기 구조가 논리적 뼈대가 있다기보다는, 마치 수다스러운 탐험가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신의 모험담을 남들에게 들려주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링커 네트워크에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행성 크루소. 거대한 함선을 타고 수요일, 목요일 그리고 토요일 등으로 이름 붙여진 대륙을 오가며 벌어지는 사건들에 양념을 쳐서 맛깔나게 들려주는 모험가가 보이는 듯하다.
모든 것은 "도서관 큐브"에서 비롯된다.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 큐브"는 자궁을 만들어내고 이 자궁에서는 무기와 배 등이 생성된다. 링커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인해 유전자가 변형되어 독특한 형태와 외모로 진화된 생명체들도 보인다. 예를 들자면 함선 "제저벨"을 지휘하는 선장은 곰인형의 모습으로 태어나 남들에게 반려동물로 인식되는 굴욕적인 삶을 살아왔고 항해사는 고양이의 외모를, 엔지니어는 녹은 유리를 뒤집어쓴 갈색 악마처럼 생겼다.
" 수많은 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지만, 링커들이 끊임없이 유전자 풀을 흔들어놓기 때문에 정작 아이들은 거의 태어나지 못하는 곳. 개떡 같은 곳이야." -16쪽-
행성과 행성을 연결하는 공항의 역할을 하는 듯한 건물의 이름이 "올리비에"이고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아자니" 와 자급자족이 가능한 배 "제저벨" 까지, 왜 사람의 이름을 붙였나..라고 생각해 봤는데, 듀나 작가가 지독한 영화광인 영화평론가라는 사실에 조금 단서를 얻었다. 아! 이 거대한 세계, 즉 링크 바이러스의 영향을 끊임없이 받아 변종 생물들이 태어나고, 특정 대륙에서는 2차 세계 대전의 영광이 재현되는 이곳은 작가가 바치는 영화와 영화배우들에 대한 하나의 헌사로구나! 그렇다면 옛 영화를 보고 지식을 좀 얻으면 이 거대한 링크 네트워크 안의 우주가 좀 이해가 되려나?
이야기라기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로 느껴지는 소설 [제저벨]. 18세기 무렵, 아프리카와 신대륙을 오고 가며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야만적인 유럽인들의 잔상도 엿보이고 오래된 전차에 올라타고 죽음을 불사하며 전쟁에 뛰어드는 독일인과 소련인들의 모습도 보이는 듯하다. 시공간이 뒤틀리고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흐려진다. 외모와 형태도 다 다른 독특한 종족들은 전쟁과 파괴의 유혹에 쉽게 빠지고 그들은 죽음과 멸망의 공포로 두려움에 떨면서도 진화하고 살아남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링커 바이러스로 연결되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와 같은 링커 우주. 그 안에서 날아다니고 전투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생명체들을 보고 있자니 태초에 발생한 생명활동을 보는 것 같아서 매우 흥미진진했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몸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서로 떨어져 있지만 동시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인간 내부 장기들을 보는 것 같았달까? 틀은 SF이지만 내용은 너무나 고전 할리우드 영화스러운 작품 [졔저벨].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듯, 영화 지식을 갖추고 있는 독자들은 좀 더 재미있게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SF 소설 [졔저벨] 이었다.
*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