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방 The Black room K-픽션 26
정지아 지음, 손정인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검은 방에는 그녀의 구십구 년이 안개처럼 고여 있다.

그녀의 숨결에 따라 어떤 기억은 물안개로 피어오르고 어떤 기억은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피어오르는 것은 묵은 기억들이다. (...)

그녀는, 살아있는 그녀는, 오직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다


좋은 한국 문학을 번역해서 세계에 널리 알린다는 취지의 K-Fiction 시리즈.

이번에는 [ 검은 방 ]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 검은 방 ] 은 문자 그대로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이제는 미래의 삶이 보장이 되지 않는, 기억과 추억이 뒤섞인 한 노년의 의식 속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젊은 날 빨치산 활동을 하며 이념과 조국을 위해서 살았던 투사였던 그녀는, 

이제 빛이 고통스러운 나이 아흔 아홉 살이 되었다.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에야 비로소 생기를 띄는 그녀는,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않은,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헤매는 존재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과거의 기억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 생생해진다.

밤하늘에 흐르는 반짝이는 은하수처럼, 어두운 방 속 그녀 주위에서 차고 흐르는, 

빛나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들.






일찍이 산에서 첫 남편을 떠나 보낸 후 빨치산 동료였던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 주인공은 늦은 나이 마흔에 딸아이를 얻었다.

피가 끓는 젊은 날에는 대의와 이념 그리고 조국을 위해 싸웠으나

이제 그녀에게는 딸아이가 세상 전부가 되었고 그녀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딸아이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허리 굽혀 밤을 주웠고 껍질을 깠으며 

이제 다 자라서 대학 강사가 된 딸아이에 대한 걱정이 한 가득이다.


딸의 일상이 사소하게 흔들리면 그녀의 삶에서는 우주가 흔들린다.

전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그녀다.

사상을 잃은 뒤로 딸이 그녀의 사상이 되었고, 딸이라는 사상 앞에서는 잠시도 초연할 수가 없다.

사상이 위대한 것인지, 혈육이 위대한 것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누군가의 딸이었고 아내였고 어머니였던 그녀는 이제 삶보다 죽음에 더 가까이 서 있다.

미래는 희미하고 현재는 어둠에 싸여있다.

과거에 대한 기억은 마치 가족처럼, 친구처럼, 

그녀의 곁에 머물며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녀의 삶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은 하나 더 있다.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 강사 자리를 포기하고 내려온 딸아이.

그녀가 아흔 아홉이라는 긴 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딸아이 덕분이다.

그녀가 어둠 속에서도 불을 켜지 않는 이유는,

딸아이가 기거하고 있는 윗집 등불에 비친 딸아이의 모습을 더 잘 지켜보김 위함이다.


밤이 깊어갈수록 어둠은 농밀해진다.  손을 뻗으면 어둠의 질감이 느껴진다.

솜이불처럼 두텁고 무거운 어둠이다.

모든 것을 삼킨 어둠은 죽음 그 자체 같기도 하다.

아침이 오고 빛이 스며들기 전까지 그녀는 죽음 속에 고요히 누워 있다.


어둠 속에 마치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지만, 그녀의 머릿 속엔 과거가 살아나 생생하게 숨쉬고 있다.

남편이 죽은 뒤 동료의 수의를 지어주던 젊은 자신의 모습과

지리산 활동을 " 사랑의 밀어 " 처럼 함께 나누었던 두 번째 남편과의 일생 그리고

양갈래 머리로 촐랑거리는 딸아이의 모습과

토벌대에 쫓겨 폭설이 내리는 천왕봉 아래 눈구덩이에서 몸을 숨기고 며칠을 굶던 빨치산 시절의 기억이 있다.


K-Fiction 시리즈의 책은 매우 작고 내용도 짧다. 

그래서인지 이야기가 함축적이고 간결한 편이다.

서사구조가 장황하거나 복잡하지 않고 딱 하고자 하는 말만 전달하는 것 같다.

한 여인이 있었다.

아흔 아홉해의 삶은 어디론가 떠나버렸지만

그 기억과 상념, 회한과 욕망은 서로 뒤엉켜서 그녀 옆에 머무른다.

진득하니,,, 그러나 무겁지 않게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지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