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한국 문학을 번역해서 세계에 널리 알린다는 취지의 K-Fiction 시리즈.
이번에는 [ 검은 방 ]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만나게 되었다.
[ 검은 방 ] 은 문자 그대로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으나,
이제는 미래의 삶이 보장이 되지 않는, 기억과 추억이 뒤섞인 한 노년의 의식 속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젊은 날 빨치산 활동을 하며 이념과 조국을 위해서 살았던 투사였던 그녀는,
이제 빛이 고통스러운 나이 아흔 아홉 살이 되었다.
어둠이 내려앉을 즈음에야 비로소 생기를 띄는 그녀는, 살아있으되 살아있지 않은,
삶과 죽음 그 사이에서 헤매는 존재가 되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과거의 기억은 오히려 더 선명해지고 생생해진다.
밤하늘에 흐르는 반짝이는 은하수처럼, 어두운 방 속 그녀 주위에서 차고 흐르는,
빛나는 과거의 기억과 추억들.
일찍이 산에서 첫 남편을 떠나 보낸 후 빨치산 동료였던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린 주인공은 늦은 나이 마흔에 딸아이를 얻었다.
피가 끓는 젊은 날에는 대의와 이념 그리고 조국을 위해 싸웠으나
이제 그녀에게는 딸아이가 세상 전부가 되었고 그녀 존재의 이유가 되었다.
딸아이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허리 굽혀 밤을 주웠고 껍질을 깠으며
이제 다 자라서 대학 강사가 된 딸아이에 대한 걱정이 한 가득이다.
| 딸의 일상이 사소하게 흔들리면 그녀의 삶에서는 우주가 흔들린다. 전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그녀다. 사상을 잃은 뒤로 딸이 그녀의 사상이 되었고, 딸이라는 사상 앞에서는 잠시도 초연할 수가 없다. 사상이 위대한 것인지, 혈육이 위대한 것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