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 중인 시체 Corpse on Vacation K-픽션 스페셜 에디션
김중혁 지음, 정이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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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일반인이라면 일상 생활에서 자주 죽음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너무 자주 “ 죽음 ”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혹은 그녀는 몸이나 마음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에 “ 죽음 ” 에 유혹을 느끼고 성큼 다가가는 두 사람이 있다. 한때는 성공한 논픽션 작가로 유명세를 떨쳤으나 이제 두 번째 삶을 준비해야하는 주인공과 관광 버스를 개조하여 캠핑카처럼 만든 뒤, “ 나는 곧 죽는다 ” 라는 다소 불길한 문구를 붙이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는 버스 기사이다.

주인공이 매우 열정적으로 삶을 이끌던 시절, 그가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주목했다. 동료와 함께 스튜디오를 꾸려나갔고 부모님은 건강하게 살아계셨다. 그러나 마치 신기루처럼 그 모든 것은 한순간에 사라져버렸다. 주인공은 이젠 내일 죽어도 아깝지 않은 삶이라고 스스로 자조하며 죽음의 유혹에 시달린다.

“ 불안과 공포와 환멸과 싫증과 권태와 무력이 액체가 되어 내부로부터 나를 익사시키기 직전이었다 ” (10쪽)


그러던 중, TV 프로그램에서 자신과 매우 닮아있는 누군가를 발견하는 주인공. 관광 버스를 개조해서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는 어느 버스 기사의 이야기를 듣고 자석에 이끌리듯 그를 찾아간 주인공. 그 버스 기사에게 주원이라는 가명을 지어주고는 함께 동행할 것을 부탁한다. 그런데 무뚝뚝한 외모와 다르게 의외로 말이 많은 주원씨. 그런데다가 희한하게도 꺼내는 말마다 왠지 철학적인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삶에서 큰 고통을 겪었거나 아픔을 겪어서 일반인과는 약간 다른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의 느낌을 풍기는 듯 하다.

“ 사람은 얼굴이 답안지예요.

문제지는 가슴에 있고 답안지는 얼굴에 있어서 우리는 문제만 알고 답은 못 봐요.

그래서 답은 다른 사람만 볼 수 있어요.

사람과 사람은 만나서 서로의 답을 확인해줘야 한 대요.” (24쪽)

“ 도망 다니는 나한테로부터 도망 다니는거.

아니면 도망 다니면서 계속 어디로 갈 수 있을지 알아보는 건지도 모르겠고.

실은 여기에다 절 가두는 거죠.

유폐라는 말 알아요? 아득하고 깊은 곳에다 가둬 놓고 잠가버리는 거.” (18쪽)


그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그는 뭔가로부터 계속 도망중이다. 도망자는 잠도 편안하게 이룰 수 없는 모양인지, 주원씨는 갑자기 믿기 힘든 충격적인 일을 벌이기 시작한다. 자다가 갑자기 자신의 뺨을 내리치기 시작하는 주원씨. 한 대가 두 대가 되고 두 대가 세 대가 되고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았는지 창문에 자신의 머리를 찧거나 버스 밖으로 뛰쳐나가 고함을 지르며 달리기를 하는 주원씨. 퉁퉁 부은 얼굴로 돌아온 그를 보며 주인공은 의문을 품는다. 그런 행동을 일으키는 비밀.. 과연 뭘까?


이 책은 일종의 로드무비같다. 일상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두 남자는 정처없이 인생을 여행한다. 다만 어딘가로 향하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피해서 도망치는 느낌이 강하다. 혹시 강하게 끌리는 죽음의 유혹으로 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이 책에서 매우 재미있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 두 남자가 글쎄,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명대사를 가지고 대사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러나 가슴을 울리는 대사를 탁구치듯 주고 받으며 친해지는 두 사람.. 그런데 두 명의 이야기가 어째 한 명의 이야기 같다. 죽음을 내내 염두에 두고 있는 두 남자.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책에 나오는 명대사들을 가지고 재치있게 주고 받을 수 있는 문학적 소양을 갖춘 두 남자. 그 둘은 어쩌면 세상에 꼭 하나 있다는 쌍둥이, 도플갱어처럼 서로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자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지금부터 내 몸이 너의 칼집이구나. 단검아, 그 속에서 녹슬어서 나를 죽게 해 다오"

운전하던 주원씨는 나를 돌아보았다. 자신만 알고 있던 비밀을 내가 발설이라고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읊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48쪽)


" 잠은 매일매일 죽음을 불러온다는 말이 맞구나.

어제의 일을 기억 못하니 너는 부활한 유령이 분명하다."

" 가련한 자들만 죽음과 삶을 구분하지.

생사의 구분이 없는 자에게 부활이란 말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겠는가." (54쪽)

[ 휴가 중인 시체 ] 는 참으로 독특한 책이었다. 한국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쓰여져 있고 한 손에 딱 들어오는 작은 크기이지만 메세지의 묵직함이 마음을 울린다는 점에서. 영어로 번역했다는 것은, 한국의 훌륭한 문학 작품을 세계에 홍보하기 위함인가? 그렇다면 이 책은 그 목적에 매우 적절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에서 얻은 상처로 인해 죽음을 고민하며 떠돌아다니는 두 남자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잠시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 삶과 죽음을 고민하는 것은 책 속에 나오는 실패한 작가 혹은 과거의 한 사건으로 인해 상처받은 괴짜 버스 드라이버만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도 마음 속이나 머리 속에서 들려오는 끊임없는 죽음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면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인간 존재를 보여주는,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지닌 책 [ 휴가 중인 시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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