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여자들
설재인 지음 / 카멜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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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목고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무급 복싱선수가 되었다는 설재인 작가의 단편 소설집 [ 내가 만든 여자들 ]. 우선 작가 소개글에 매일 불행한 눈동자들을 마주하다가 한강에 몸을 던질뻔 했다는 대목에서 크게 공감했다. 나도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내가 혹시 입시 괴물들을 낳는 건 아닐까? 고민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전직 수학 선생님의 화려하고 맛깔나는 글솜씨에 깜짝 놀랐다. 입시가 낳은 시험 기계들의 공허하고 우울한 눈동자 앞에서 반드시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르게 살 수도 있다는 걸.... 제때 말하지 못해서일까? 그녀는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풍성하게 풀어놓고 있다.

 

그녀가 이 책에서 다루는 13편의 단편집은 여성의 이야기이다. 남성들이 보기에는 약간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여자들은 엄청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많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소설인가? 음... 잘 모르겠다. 누군가를 비난한다거나 날선 목소리가 크지는 않지만, 공동체 안에서 어쩔 수 없이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실려있다. 국가 차원에서 ( 결혼 이주 여성 ) 회사 차원에서 ( 남성 위주의 조직 속 여성 ) 가족 차원에서 ( 도움이 안되는 남자친구와 아버지의 의미 )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여성 이야기가 흘러나오는데, 공감도 가면서 매우 신선하고 독특하다 !!! 각 단편들은, 현실 혹은 초현실이라는 옷을 입은 채 독자들을 만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들자마자 후딱 읽어버리게 된다.

 

[ 엔드 오브 더 로드웨이 ]

두 명의 엄마를 두었던 주인공의 태국 방문기 [ 엔드 오브 더 로드웨이 ]. 엄마의 애인이었던 혜순 아줌마가 아무 말없이 태국으로 이주를 한 이후로 엄마는 말이 없어졌다. 엄마는 유언으로 유골함을 혜순 엄마에게 전달해달라는 말을 남기는데...

"그 십여년 동안 가장 아픈 사람은 엄마도 나도 아니었다.

아줌마였다.

아니, 그냥 우리 모두 아팠다.

똑같이, 한 몸처럼 아팠던 것이다 ."

 

[ 리나, 찡쪽 ]

한국으로 시집왔다가 불행한 일을 겪은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 태국 여성 리나 이야기. 그녀의 이야기를 찡쪽이라는 초록색 태국 도마뱀이 들려준다. 이주 여성의 결혼 문제가 얼마나 엉성한지.. 제대로 제도화되지 않은 그 문제를 일깨워주는 이야기.

" 그러니까 가장 큰 문제는 이거지. 리나가 태국에선, 서류상으로 유부녀라는 거지.

혼인신고도, 아이 출생신고도, 할 수가 없어.

없는 부부이고, 없는 아이야.'

 

[ 내가 만든 여자들 ]

비밀을 잔뜩 품고 있는 수상한 임차장님을 추적하는 한 회사의 신입 이야기. 전혀 예상치 못한 기가 막힌 이야기. 그녀는 조직의 보스인가? 혹은 킬러인가?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통쾌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도시 괴담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처럼 다소 괴기스럽다.

" 손끝에 그런 게 있었어요.

검은 머리카락 몇 올이 달린 살가죽 같은 게요.

그 작은 조각이, 차장님의 손가락 끝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죠.

손톱 밑은 김장한 것마냥 약간 벌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고요.

그러고 보니 파우치도 아까보다 불룩해져 있었어요. "

 

[ 바지락 봉지 ]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슬픈 이야기. 인연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지상의 차원을 넘어서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

" 남편이 쓰러진 날부터 온 세상은 논리와 개연성,

인과관계를 무시한 채 멋대로 돌아갔다.

' 왜 ' 를 찾을 수 없는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둥그런 연속체를 이루었다.

그 연속체가 그녀의 팔다리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설재인이란 작가가 글을 안 썼으면 큰일날 뻔 했다. 누가?    독자들이.. 진흙 속의 진주를 발견한 느낌이다.  세상에는 시스템이라는 틀 속에서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자신만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설재인이라는 작가는 두 번째 케이스인 것 같다. 현실 속에서 또 소설이라는 가상의 공간 속에서 틀에 갇히지 않은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간 사람. 그렇기에 독자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많은 모양이다. 완전 통쾌한 이야기, 분노하게 만드는 이야기, 슬픈 이야기... 그녀의 펜 끝에서 각양각색의 색깔을 가진 이야기가 흘러내려와 무지개빛 강물을 이룬 느낌이다. 추천해주고픈 단편 소설, 특히 여성의 삶을 다룬 이야기를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이 책을 선물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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