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날의 비밀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7월
평점 :
우리에겐 일본의 식민지였던 뼈아픈 역사가 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땐, 1930년대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에게 크나큰 비극을 안겨준 불행한 전쟁을 겪은 시기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까? 그러나 인류에 대한 책임감과 윤리의식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던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비밀회동은 그런 가능성을 0%로 불식시켜버린다. 그들의 비밀회동은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대재앙에 하나의 역할을 더했을 뿐이고...
" 커다란 재앙은 살금살금 다가온다 "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1930년대 유럽. 1933년 2월 20일 독일 베를린에서 스물 네명의 인사들이 비밀회동을 한다. 그들은 바로 독일의 산업과 금융을 움직이는 거물들이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총리에 지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 국회 의장을 만나기 위해서 .... 그리고 회동에 참석한 히틀러와 괴링은 참석자들에게 거침없이 정치헌금을 요구한다.
“경제 활동을 위해서는 견고하고 안정된 체제가 요구된다고 했다. 스물네 명의 신사들은 경전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영자들의 역사적 순간이자 나치스와의 미증유의 타협이라 볼 수 있는 1933년 2월 20일 회동은 크루프 일가, 오펠 일가, 지멘스 일가에게는 사업하다 보면 겪게 되는 매우 일상적 일화, 진부한 모금 활동과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그들은 곧장 모금함으로 달려간다. 사실상 정경유착에 익숙했던 사업가들에게 별로 새로울 게 없는 제안이었다. 거액을 헌금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평소에 하던 것과 같은 모금 활동에 불과했던 것. 이렇게 이 책에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배경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유명했던 외교적 협상이나 치열한 전투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대신 이 책은 어떤 식으로 그 당시 정경 유착이 이루어졌는지는 상세히 묘사한다. 나치스는 독일 기업들에게 포로수용소의 수감자인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착취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서 1943년 크루프 공장에 도착한 유대인 6백여명 중에서 1년 후 남은 사람은 단 20명. 범죄적 열정과 정치적 가식 뒤에서 그들은 잇속을 마음껏 챙겼다.
그 이후로도 이 책에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사소한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영국 추밀원 의장인 핼리 팩스가 나치스와 히틀러를 만났지만 그의 귀에는 견제의 목소리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영국 귀족이자 외교관인 이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이는 한 광인이 전쟁의 불꽃을 쏘아 올릴 수 있게 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 민족주의와 인종 차별주의는 강력한 힘이지만 나는 그것이 자연에 위배된다거나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 나는 이 사람들이 진정으로 공산주의자를 혐오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 처지라면 우리도 똑같이 느낄 것이라고 장담한다."
1938년 오스트리아 총리인 슈슈니크와 히틀러의 비밀회동이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 오스트리아 병합 ' 이 이루어진 것. 슈슈니크는 히틀러의 내정간섭에 순순히 두 손을 들어버린다. 나치당원인 잉크바르트의 내무부 장관 임명과 나치 당원 사면 등등... 이로 인해 유럽의 운명은 결정되어버리고.. 한편 오스트리아 독립 유지를 묻기 위한 국민 투표를 실시하지만 국민들은 99.75%가 독일과 오스트리아 병합에 찬성표를 던지는데.....
책 마지막 장에 거대 군수 기업이자 유대인 수용소에서 노동력을 빌려썼던 구스타프 크루프의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전쟁이 끝나고 히틀러는 죽었지만 크루프라는 기업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크루프는 치매가 있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재판을 받지 않았고 그의 아들은 경영권마저 승계받는다. 친일파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은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가 기억나는 대목이다. 크루프사와 같은 전범 기업의 문제.. 우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역사의 각 장면들을 짤막하게 다룬 작품이 프랑스의 큰 문학상을 받고 독자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말한다.
‘한순간이라도 이 모든 것이 먼 과거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본에게 지배되었던 쓰라리고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고 현재도 일본과의 갈등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저 말은 아주 생생한 울림이 되어 다가오는 것 같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고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말을 절실하게 보내오는 책 [ 그날의 비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