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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 맺힘 ㅣ 문지 에크리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7월
평점 :
이 책은 저자인 김현이 생전에 발표했던 글들을 다시 편집해서 모은 에세이집이다. 1990년 " 김현 " 작가가 작고하시기 전 쓰여진 글들이 대부분이라 책의 내용들이 1960~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다지 큰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우리나라가 산업화를 이루면서 서구의 합리주의를 받아들이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동시에 팽배해진 물질만능주의, 도시의 삭막함, 개인주의의 만연 등등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겪는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 느껴졌다.
“아파트는 이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자기의 뛰어남을 확인하는 전시 공간이 된다.
같은 평수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끼리는 자동차가 있고 없음이,
자동차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끼리는 캐비닛형의 냉장고가 있고 없음이
사람 판단의 잣대가 된다.
그래서 너도 나도 기를 쓰고 남들이 사들인 것을 가장 짧은 시간 안에 사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p.37)
땅의 면적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에서는 어찌보면 아파트라는 생활 공간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생활 공간이어야할 아파트가 사람들의 계층을 나누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실제로 과거엔 아이들 사이에서 아파트 평수로 계급을 나누었다면, 오늘날에는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학교배정이나 주변시설을 이용하도록 하면서 계급을 나누고 있는 듯 하다. 사람이 우선인지 아파트 브랜드가 우선인지.. 어리둥절한 현실에 대해서 저자도 안타까웠으리라.
“아마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사과 먹는 것이나 비슷할 것이다.
세상의 좋은 면부터 봐나간다. 봐라, 이런 선의에서 일이 시작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결과는 신통치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세상의 나쁜 면에만 눈을 준다, 앞으로 잘되어나갈 것이다.
최소한도 이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면 잘사는 나라에 태어나지 않고 이따위 형편없는 나라에 태어난 게
한심해진다.”(p. 83)
식민지 치하의 소설가가 사과 다섯 알을 어떻게 먹어야할지 고민했던 글이다. 맛없는 사과를 먼저 먹고 맛있는 것을 남겨두고 싶지만 왜 굳이 맛없는 것을 먼저 먹어야할지 고민이 되고 맛있는 것을 먼저 먹어버리면 불쾌하게도 맛없는 사과가 남아버린다. 세상일도 마찬가지... 우리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을 동시에 겪을 수 밖에 없다. 저자 김현은 세상을 보는 관점이 이렇게 어려울 수 있음을 토로한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 남북한의 두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 화해무드가 조성되어서 국민들이 환호를 했지만 사실 앞으로가 더 문제일 수 있다. 독일이 겪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법이 어디 있을까?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 나라에 태어난 것이 불행하다고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통일이 되든 되지 않든 그 이후에 발생될 수 있는 좋은 일들을 꿈꿔봐야겠다. 여하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엔 정답이 없다.
“모르는 사람들 틈에 있고 싶다. 매일 나무 우거진 공원길을 산보하고 싶다. 오후 7시면 카페에 나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어 맥주를 마신다. 그래 네가 그토록 원하던 모든 것을 이제는 할 수 있다. 그러니 행복한가? (p. 159)
“ 삶, 그것 때문에 고통하지 않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그것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하는, 그래서 거기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한 미술가의 처참한 노력,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의 초상이었다.”(p. 265)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유학을 했던 저자. 그가 유학을 했던 1970년대만 하더라도 해외에 나간다는 것이 쉽거나 자유롭지 않았다. 국내와 외국의 경계가 다소 희미한 오늘날의 경우는 해외로 나가는 것이 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수의 이유로 외국을 나간다. 자아를 찾기 위해서 혹은 자기 계발을 위해 혹은 그냥 낯선 곳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여행을 하다보면 한국이라는 익숙한 지형과는 다른 낯선 장소, 낯선 사람의 틈바구니에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최근 들어서 낯선 환경에 자신을 던져넣고 새로운 나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자 또한 프랑스 외에 많은 도시를 여행한 듯 보인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만난 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삶이 무엇인지, 예술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이게끔 해주었다.
저자는 일상과 낯선 환경을 오가면서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사고를 이끌어내었다. 그의 문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식은 아니다. 산문이 아니라 운문처럼 낯설게 다가오는 그의 작품. 그러나 페이지를 넘기다보니 공감이 가거나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문장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내적 의식을 파고드는 " 김현 " 이라는 작가를 알게 된 소중한 독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