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지독하게 비극적일 수 있다. 죽음이라는 덫이 언제 어디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군다나 그 죽음이 평온하지 못했다면 더욱 더 비극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은 평생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 미스터리로 남겨진 죽음이라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태양처럼 찬란했던 한 소녀의 죽음과 그것이 남기고 간 깊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 이 소설 [ 레몬 ] 속에 등장하는 노란빛은 밝지 않다. 한 미스터리한 죽음이 던져두고 간 깊은 절망과 범인에 대한 복수를 상징하는 듯한 강렬한 노란빛의 [ 레몬 ].

 

“ 죽음은 우리를 잡동사니 허섭스레기로 만들어요. 순식간에 나머지 존재로 만들어버려요.” ( 179쪽 )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던 19세 소녀 해언은, 나라가 월드컵으로 들썩이던 2002년 어느 날, 공원에서 두개골이 파열된 채 죽은 상태로 발견된다. 그녀가 죽기 바로 전 그녀와 함께 있었거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했던 이들이 용의자로 지목된다. 치킨을 배달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해언을 목격했다는 한만우. 한만우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타고 있던 신정준의 여자친구 윤태림. 그리고 해언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 있었던 신정준. 그들은 모두 용의자로 몰리지만 결국 아무도 결정적인 혐의점이 없다. 누구도 해언의 죽음에 책임을 지지 않은 채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가는데.....

 

“ 언니는 누구나 한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내용 없는 텅 빈 형식의 완전함이 주는 황홀 그 자체였다. 하물며 열아홉이었음에랴. 그 아름다운 형식을 파괴한 자는 누구인가. 한만우인가, 신정준인가, 아니면 제 3의 인물인가. 나는 이제 안다. 그날의 살인자가 누군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누가 아닌지는. 아니다, 나는 살인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것이고, 죽을 때까지 내가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도 알고 있다 ” (34쪽)

 

해언을 죽인 자는 과연 누구일까? 그러나 이 소설은 속시원하게 범인을 밝혀주지 않는다. 각 주요 등장인물들의 독백을 통해서 범인의 윤곽을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언니가 죽고 난 이후에 깊은 공허함에 시달리는 다언의 독백 속엔 뒤틀린 그녀의 존재감과 복수심이 보인다. 해언이 살아있을 적에도 태양의 그늘에 가려진 달처럼 떠다니던 다언은 언니의 죽음 이후에 이상한 부채감에 시달린다. 자신이 언니의 존재를 대신하려는 듯 성형수술을 감행하고 언니가 죽은 날 입었던 레몬색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괴상하기 짝이없는 다언의 모습.

 

“ 내가 눈을 떴는데도 엄마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없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건 마치 뿌리가 깊은 거스러미를 억지로 뜯어낸 손톱에서 피가 배어나는 걸 지켜보듯, 지극한 고통을 견디는 표정이었다. 나는 엄마가 내 얼굴이 아닌 다른 얼굴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는 다른 얼굴을 원하고 있었다. 내가 보고 싶은 얼굴은 어디로 갔지? 이 자리에 왜 그 얼굴이 아니라 네 얼굴이 있는 거지? (87쪽)

 

다언은 형사가 마지막까지 취조했던 한만우를 추적한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가 범인이라고 믿고. 한만우의 혐의를 밝히고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한만우와 가족을 만났던 다언..... 그러나 힘겹게 살아가던 이들 가족의 모습에서 삶에 찌들렸으나 선하디 선한 모습만을 발견할 뿐이다. 한만우가 범인이 아니라면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책은 추리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으나,,,,, 단순 흥미를 추구하는 책이 아닌 듯 하다. 한 소녀의 죽음과 죽음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삶이란게 얼마나 불안하고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평온하기를 바란다. 평온하게 살고 평온하게 죽기를 바란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비밀을 안은 채 불안하게 살아간다. 깊은 죄책감과 고독을 함께 동반한 비밀을 안은 채 말이다.

언니의 얼굴을 하고 언니의 원피스를 입고 돌아다니던 다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전화상담을 통해서 밤잠 못 자는 자신의 고통을 부르짖던 윤태림의 목소리에서,

다언의 고통을 위로하려다 오히려 잃어버린 자신의 삶을 발견한 상희의 독백에서,

나는 읽을 수 있었다. 죽음보다 더 큰 삶이라는 절망이 있을 수 있음을. 복수를 다짐했고 또 실행했던 다언은 그 이후로 평온해졌을까? 책장을 덮은 뒤 그것이 제일 궁금했다. 이제 [ 레몬 ] 을 떠올리면 상큼한 맛보다는 강렬한 복수의 다짐이 떠오를 것 같다.

" 드디어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고 노란 빛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듯 했다. 노란 천사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레몬, 이라고 나는 의미없이 중얼거렸다. 복수의 주문처럼 레몬,레몬,레몬이라고 " (9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