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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 0 호. 영원히 발간되지 않을 신문, 발간될 계획이 없는 신문이다. 그 이유는 밖으로 드러나서는 안될 정보를 담을 것이기 때문에. 제 0호 라는 제목의 이 책은 언론, 즉 저널리즘이 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진지하게 묻고 있는 책이다. 우리는 보통 언론이 진실을 보도해야 하고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제 역할 - 진실 보도 - 을 다하고 있는 언론은 얼마나 될까? 예를 들자면, 국민이 정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안이 보도되어야 할 시기에 갑자기 연예인 사생활 관련 스캔들이 터진다.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드러나지 말아야 할 무엇을 막기위해 필사적인 거물을 위해서 언론이 벌이는 속임수인가?
정치인의 고스트 라이터 ( 자서전 등을 대신 써주는 사람 ) 역할이나 하며 가끔가다 번역일을 간간이 하던 주인공 콜론나에게 신문 - 그런데 발간되지 않을 신문 - 을 함께 만들자는 제안이 들어온다. 시메이라는 주필이 만들고자 하는 책은, 한 저널리스트의 회상록으로써, 발간되지 않을 신문을 내기 위해서 1년동안 준비하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 하는 책이다. 신문의 제호는 [ 도마니 ], 다소 모순적인 이 이름의 뜻은 [ 내일 ] 이다.
나오지도 않을 신문을 발간하는 이유는? 자금줄인 거물 콤멘다토르 비메르카테라는 사람이 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금융계와 은행계의 거물들이 모이는 성역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신문이다. 그는 신문에 거물들의 비밀스런 정보를 싣기를 원한다.
제0-1호, 제0-2호 이런 식으로 12호에 걸쳐서 예비 판을 창간하면 콤멘다토레가 직접 검토하여 몇 몇 인사들에게 기사들을 보여주고 자신이 그 거물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거물들은 신문 창간 계획을 중단하라고 요청하게 되고, 그들의 요청에 따라 콤멘다토레는 [ 도마니 ] 라는 신문을 포기한다는 계획이다. 그렇게 포기한다는 조건으로 콤멘다토레는 자연스레 그들의 성역에 들어가게 된다는게 그의 계획이다.
일을 함께 하기로 하고, 주인공 콜론나는 함께 작업하는 다른 기자들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다. 모두 6명인데 다들 독특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로마노 브라가도초라는 사람은 다소 괴짜로 느껴지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다. 언론에 대해서 거침없는 독설과 음모론에 가까운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게 진실로 들린다.
그가 주인공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를 잠깐 인용해본다.
[ 61쪽 인용문 ]
" 하지만 아버지의 푸념을 들으면서 나는 뉴스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버릇을 들이게 되었어. 신문도 거짓말을 하고 역사학자도 거짓말을 해. 오늘날에는 텔레비젼도 거짓말을 해. 1년전 걸프 전쟁 때 뉴스에서 가마우지의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기억나나?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퇴각할 때 ....(중략).... 원유에 죽어 가는 가마우지의 영상을 내보냈지. 그런데 나중에 확인된 바에 따르면 그 계절에는 페르시아만에서 가마우지를 찾아볼 수 없었고....... "
브라가도초는 이와 같은 언론에 대한 독설 외에도 황당한 음모론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무솔리니 대신 그의 대역이 잡혀서 처형당했다는 것. 진짜 무솔리니는 바티칸 대성당의 도움을 받아서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사제로 변장한채 살다가 편안한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다. 그의 장광설을 듣고 있자면 이 괴짜인 브라가도초는 알아선 안될 비밀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는 사람같다. 실제로 그는 거리를 걸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마치 누가 뒤를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와 동시에 콜론나의 인생에 들어오는 또 한 명의 사람. 이번에는 여자이다. 마이아라는 이름의 기자중 한 사람인데, 항상 자신의 의견이 묵살당하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그런데 멍청해서 그런게 아니라, 너무 똑똑해서이다. 그녀는 기자로써의 제 역할 - 진실보도 - 을 하기를 원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도 알고 있지만, 자금줄인 콤멘다토레의 눈치를 봐야하는 시메이 주필에게 항상 무시당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일 영향력이 적은 별자리 운세를 다루는 일을 맡게 된다.
콜론나는 마이아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그녀가 매우 똑똑하면서 재미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런 시궁창 같은 신문사에 있을 여성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보호해주고싶은 마음마저 든다. 자신이 아버지 뻘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빠져드는 주인공 콜론나. 뭔가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그녀의 곁에서 안정감.. 애착심이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괴짜 브라가도초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신문사는 제복 차림의 남자들로 가득하고 그들은 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심문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에코님의 냉소적인 유머가 곳곳에 묻어나오는 것 같다. 브라가도초가 데스크 콜론나를 불러내어서 언론에 대한 공격을 하거나 무솔리니와 가톨릭과의 관계에 대한 음모론을 펼칠때면, 입안가득 음식을 물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그럴 때면 브라가도초는 마치 에코님의 분신처럼 보인다. 매우 빠르게 많은 정보를 끊임없이 토해낸다. 마치 컴퓨터처럼. 음모론의 진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 라는 속담이 있듯이 누군가를 향해 - 부패한 정권, 정권에 영합하는 언론 - 펜이라는 검을 휘두르는 듯 보인다.
사실 이 책에는 이탈리아 지역이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이 많아서 가독성은 조금 떨어졌다. 그러나 에코님이 시메이 주필의 입을 빌어서 언론을 조롱하는 부분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는 마치 기술자처럼 다양한 작전을 써서 진실과는 거리가 멀고 매우 부당한 기사들을 마치 면을 뽑듯이 입에서 줄줄 뽑아내는 일부 언론들의 모습을, 시메이 주필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신문사의 자금줄과 그와 이해 관계가 얽힌 사람들을 위해서다. 상대편에 대한 흠잡기, 논점을 흐리는 물타기, 등등등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이 너무 재미있었고 다시 한번 꼼꼼하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