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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 푸른숲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나는 가끔 여자로 태어났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말이나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럴 때마다 주위의 여자분들은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이득을 보는지 아느냐고 한마디씩 한다. 물론 그분들 말씀이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그래도 난 남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끔은' 버겁다.
가장 힘든 것은 사회생활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바에야 사회생활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내가 말하는 사회생활은 '남자들의 사회'에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책 <남자의 탄생>의 저자도 말하고 있는 바이지만 '아버지의 질서'로 대변되는 '남자들의 사회(세계)'는 수평적 질서보다 수직적 질서, 신분적 질서가 밑바탕에 있다. 그게 나이든, 직위든, 경험이든, 능력이든 상하와 우열에 따라 재빨리 재조정되는 그 질서가 싫다. 상황에 따라 재편되는 새로운 질서에 잘 적응하고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잘 알아서 행동하는 사람은 이른바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이고 눈치코치 없이 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간 '싸가지가 없는 새끼'가 되거나 '독불장군'으로 왕따 당하기 십상이다.
내 직장생활에서 가장 기분 나쁜 기억 가운데 하나는 남자들만 모인 어느 회식자리 2차 노래방에서 '어르신'이 노래 부를 때 앞에 나가서 춤을 추라고 선배들이 일으켜 세울 때였다. 평소 존경하던 나이가 50줄인 한 선배도 웃어른 비위 맞추시느라 어정쩡한 포즈로 춤을 추고 계셨다. 난 솔직히 역겨웠다. 그들의 음주문화도 맘에 안 들었고. 왜 회식자리에서 술잔을 들고 제일 위에서부터 아래로 찾아다니며 술을 권하는가? 아니, 직장생활 현장에선 별 관심들도 없고 어떤 문제상황에선 핏대 세우고 싸우던 양반들이 갑자기 술의 힘을 빌려 화기애애한 화합의 모드로 변하는가? 그땐 그때고 이땐 이때란 식의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일이 나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 한마디로 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개의 자아(페르소나) 역할을 잘 못하겠다. 아니 하기 싫다. 내가 왜?
그런 점에서 여성은 남자보다 자유로운 편이다. 얼마든지 '핑계'를 만들어 그런 자리를 피할 수 있을 뿐더러 그게 흉이 되지 않는다. 남자들은 단체행동에 있어서 '개인적인 주장(그게 핑계다)'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린다. 뭐 달린 사내새끼들은 남들 다 하는 일에 '계집애'처럼 저만 쏙 빠져서는 '의리' 있는 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보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이고 전체주의적이다. 남자들의 세계에선 늘 개인보다 집단이 우선이다. 그런 면에서 남자들은 여성보다 약하다. 자신의 욕구나 본성에 충실하기보다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에 충실한 것을를 '능력있고 남자답다'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길들여져서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가 없는 삶을 사는 경우가 많은가?
나는 남자들의 위계질서, 신분질서에서 파생되는 폭력성이 너무나 싫다. 그 동물적인 '힘'의 질서. 학창시절부터 사회에 나와서까지 지속되는 '힘'에 따른 서열경쟁과 지배-복종 관계가 싫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러한 남자들의 세계를 '연쇄적 중층적 권위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가정에서 발달한 신분관계가 학교, 회사, 군대, 국가 등과 같은 사회의 운영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 때 조폭 영화가 유행했을 때 <넘버3>란 영화가 있었다. 그 영화에서 자신의 말에 '토다는 새끼'는 모두 '배신'이라며 '똘마니'를 무지막지하게 패는 말더듬는 킬러 두목 역할을 한 송강호는 그 영화로 무명의 설움을 벗고 인기스타가 되었다. 왜 그 장면이 한국사람들에게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영화제목은 또 어떤가? <넘버3>. '넘버 원'도 아니고 '넘버 투'도 아닌 '넘버 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넘버 쓰리'는 '넘버 투'가 되기 위해, '넘버 투'는 '넘버 원'이 되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투쟁을 벌인다. <두사부일체> 시리즈는 또 어떤가? 두목과 스승과 아버지는 하나다?
<남자의 탄생>은 저자의 개인사를 회고하면서 자신이 한국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자기 가정의 역학관계, 아버지와 어머니, 어머니와 저자, 아버지와 저자 사이의 관계를 문화인류학적으로 때로는 정치사회학적으로 분석하면서 한국 특유의 가족문화와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하나의 '특수성' 속에 구현된 '보편성'을 요령있게 추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많은 시사점을 주는 책이지만 너무나 '사적(私的)'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어떤 부분에서는 일반화나 공감이 어려운 대목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나 절대화는 40세 미만의 세대에게는 공감이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유년기 분석에 치우친 나머지 저자가 '동굴 속의 황제'로 표현한 남자가 성인이 되어 어떠한 문제적 상황에 직면하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