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의 비밀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백설자 옮김 / 현암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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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지요, 친애하는 주인님. 나는 내 존엄성을 찾기 위해 주인님을 죽일수밖에 없겠지요.'

 

한때는 이 밉상맞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커이고 싶었다. 삐딱한 생각으로 사람이든 신이든 가리지 않고 파괴해대는 조커이기도 했다. [카드의 비밀]은 꽉막히고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힌 꼬마였던 내 유년시절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그 작은 머리통에 무수히 많은 질문의 시작을 끊어준 책이였다.

 

나의 스승 가아더는 철학이 철학의 계보나 철학자들의 사상을 줄줄 외워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말이지 먹고사는 것과 하등 상관 없는 사치스러운 질문들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왜 중요한지 말한다. 그렇기에 한번도 만난 적 없는 할아버지 요슈타인 가아더는 휘몰아치던 십대때부터 나의 철학 선생님이다. 또 나를 매료시킨 나만의 영웅이기도 하다. 현명하고 빛나는 문장들은 멋모르던 꼬마를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아.. 요슈타인 가아더! 나는 아직도 이 이름을 들으면 심장이 뛴다. (내 안에 황금관을 쓰고 앉아있는 작가들은 가아더 외에도 몇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들에게도 다시금 시간을 할애할 작정이다.)

 

사실 [카드의 비밀]은 가아더와의 첫만남이 아니다.
당시 중학교 도서관에는 가아더의 다른 작품들이 많았고 역시 가장 유명했던 것은 [소피의 세계]였다.
길고 긴 그 책의 절반은 도덕책의 확장이나 다를바 없었다. 그야말로 수업을 듣는 것 같은 설명조의 문장들의 행렬이였다. 주인공 소피의 일상과 그 아이를 둘러싼 수수께끼가 마음을 사로잡아 지루한 수업을 참아넘기게 했지만 썩 즐겁게 읽은 책은 아니였다. 맞다. [소피의 세계]에서 가아더는 심술을 부렸다. 심술을 부릴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길 바랐지만 그보다 먼저 이 땅에 살았던 훌륭한 조커들의 사상들도 기억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가아더는 [소피의 세계]의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부분을 꾹꾹 참았다가 마지막에서야 풀어놓았다. 끝까지 읽고서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책이라니, 그러기엔 심술궂게 많은 분량이였다. 그리고 이제와서야 느끼지만 너무 멋지게 철학사를 소설로 풀어 놓았었다.

 

좌우간 지금 말하고자 하는 책은 [소피의 세계]가 아니다. 사설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가아더가 [카드의 비밀]주인공 한스가 여행에서 돌아와 읽을만한 책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소피의 세계]를 썼기 때문이다. 가아더는 자신이 창조한 아이들과 직접 소통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린아이는 존재에 경의로움을 느끼는 능력을 타고나기 때문에 스무살에 철학책을 읽는 것은 너무 늦다고 말한다. 이 능력은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잃지 않도록 유지시켜주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정말이지 나는 이 작가가 너무 좋다. 아이들에 대한 이 작가의 애정이, 그 작은 눈에서 배우고자 하는 겸허한 태도가 좋아 미칠것 같다.

 

결국 순서는 뒤집어 졌지만 그래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카드의 비밀]을 먼저 읽었다면 치기어린 마음에 [소피의 세계]는 눈에 차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저울에 두 작품을 달고자 한다면 우열을 가릴 수가 없지만 재미라는 면에서 [카드의 비밀]은 가아더의 다른 모든 작품들에 비할바가 아니다. 근원적인 질문과 사색, 무수한 상징성으로 가득 찬 [카드의 비밀]은 '내가 조커임을 잊어선 안된다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있지 않은가. 조금씩 물들어 결국은 세속적인 다른 카드들과 같아지길 바라지 않는다. 내 안에 날을 벼려라. 가아더가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전해준 가르침이다. 아이들이 본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지만 어쩌면 이미 익숙한 것을 당연히 여기는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스스로가 여기는 것만큼의 손톱만큼도 똑똑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가아더는 조커를 자칭하며 매일 아침 펑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한스의 아버지가 아닌 (아직 발아하지 않았지만)선천적으로 삶에 대한 경의로움을 발견할 재주를 타고난 한스를 주인공으로 정했을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었지만 잃어버린 재주..무관심하지 않는 법. 한스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함으로 잠시 잊었던 이 재주를 발전시킨다. 그 사건에 대해선 비밀, 당연히 줄거리에 대해서도 비밀, 요즘 너도나도 달고 나오는 반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단 사실이 마음이 미어지지만 [카드의 비밀]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다! 아.. 이 선전문구 같은 문장이라니, 하지만 역시 줄거리는 하나라도 누설되어선 안된다. 결국 뜬구름 잡는 소리밖에 늘어 놓지 못해 이런 서평을 이 책에 달아야 하나, 이 정도밖에 못쓰나 하는 자괴감이 들지만 그래도 역시 추천하고픈 책이기에 비루한 글을 써내린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만나는 모든 사람의 손을 잡고 '읽고 감상을 들려주라' 청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나는  남들과 다른 사고를 하고 존재의 본질을 의심하는 조커가 되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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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 지음, 임희선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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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의식하고 있진 않지만 사람들은 꽤 복잡하게 사고하고 있다.
구물구물 몰려있는 사람들은 모두 촘촘한 거미줄처럼 인연의 끈을 달고 있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치밀하게 짜여진 인과관계에 묶여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물 위를 헤엄치며 수면 위로 떠오른 것들만으로 만족하고 산다. 아래까지 돌아볼 여유가 어딨느냐 핑계를 대더라도 사실 이유는 하나다. 관심이 없는 것이다. 물 아래는 잔잔하고 들어난 상황은 지독하게 치열하다. 치열한 생활에 매달려 관념적인 문제는 서랍안에 넣어버린다. 그런 와중에 세상에는 간혹 괴짜들이 태어난다. 한걸음 물러나 거미줄의 일부를 들여다보고 곰곰히 생각해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는 괴짜 말이다.
그런 괴짜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졌지만 그 중 가장 대중적인 직업이 작가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당연, 당연하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일본과 닮은점이 많다. 그 섬에서 유행했던 것들은 바다를 건너 곧 여기서도 유행을 하고, 그 땅에서 일어난 경제적 용틀임도 비슷하게 답습해졌다. 더불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개인적인 문제들도 사회라는 큰 틀을 따라 흘러들어왔다. 부인할 수 없게도 사람 사는 모양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무수히 많은 문제들 중에 오쿠다 히데오는 직장생활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을 관찰했다. 걸과 노처녀, 독신과 결혼, 맞벌이와 전업주부, 시대가 요구하는 선택 사이에서 길을 잃고 갈팡질팡 하는 여자들을 들여다 보았다. 오쿠다 히데오는 꽤 날카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가상의 인물들에게 적절한 답을 찾아주는 것으로 이야기들을 채웠지만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다. 사실.. 솔직히 털어 놓자면 식상하다.

 

나이많은 여자가 회사와 부모로 부터 받는 대우, 관리직의 여자와 남자부하직원과의 미묘한 알력, 안정된 가정을 꾸린 다른 여자들을 부러워하는 커리어 우먼, 그런 직장여성을 꿈처럼 바라보는 전업주부, 육아와 직장생활, 맞벌이와 싱글맘, 발에 밟힐 듯 많은 여성지들과 순정만화들에서 언급된 소재들이다. 심지어 요새 방영되는 드라마 속의 달자씨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까지 한다.

그래, 이 분야의 문제들은 이미 충분히 화자되고 있구나. 몹시 뜨거운걸. 하는 생각이 다시 확인되었다.

 

남자가 어쩜 이렇게 여자의 심리를 꽤뚫고 있을까로 시작된 감탄은 끝으로 갈수록 기세가 약해진다.
'이미 충분히 여자들 사이에서 얘기되어 지고 있는걸 관심없어 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인게 세상이야. 그걸 편견없이 들여다보려는 자세를 갖춘 남자가 있다고 해서 그리 놀랄필요는 없어. 적을 뿐이지 충분히 그럴법도 하잖아. 어쨌든 여자는 남자만큼이나 머릿수가 많으니까.'
오쿠다 히데오는 들여다보려는 자세를 갖춘 남자다. 그는 젊고 재기발랄한 글을 쓰는 일본 작가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고, 그럴 자격이 충분한 재밌는 책들을 쓰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공중그네의 심리치료는 석연치 않았다. 왜그랬을까? 걸도 석연치 않았다. 즐겁고 공감가고 놀랍고 유쾌하고 날카롭지만 어딘가 석연치가 않다.

 

왜냐하면 오쿠다 히데오의 스타일은 하나도 새롭지 않으니까.
그의 세상은 명료하다. 모든 아픔엔 치유가 있고 문제엔 깨달음이 있고 난관은 극복되어진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지친 마음이 위안을 받는것은 사실이다. 나는 위안이 절실한 현대사회의 한 개체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명료하지 않다. 사실 앞에 구구절절 떠들어 놓은 것처럼 모든 일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거창한 이유를 붙여가며 '그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따위의 나레이션을 깔수 없다.
나에게 성숙은 어느날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을때 지난날의 내가 지금으로썬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양일때 갑자기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하나 계단을 밟듯 모든 문제가 맞춤표를 찍으며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 삶이다. 그런 나에게 이런글은 너무 이상적이다.

 

약간의 석연찮음은 바로 이거였을까?
나는 책을 읽는 마음 그대로 걸을 읽어내렸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책을 읽는 느낌 정도로만, 아 참 재밌는 책이였다. 그녀들이 맞서는 문제에 내 경험들을 비추어보며 통쾌함을 느끼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혹은 나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그녀들이 힘내는 모습을 보며 응원도 하고 그래, 재밌게 보았다.

 

그리고 끝.

더이상의 여운은 없다. 이미 이런 스타일에 할당된 여운은 이전에 만난 다른 작품들에게 모두 소비해버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오쿠다 히데오는 전형적인 트랜디 작가로 보인다. 이슈화되고 있는 문제들에 바람을 주입해 마음 먹먹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만드는 솜씨, 적당히 살을 붙이고 양념을 쳐서 이야기를 뽑아내는 재주, 그런 이야기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와 오쿠다 히데오는 궁합이 잘 안맞는 모양이다.
뭐 괜찮다. 누구든 모든 작가들에게 친한척 하며 살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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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궁의 묘성 1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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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다 지로.
예상치 못한 사각에서 날린 펀치로 날 넉다운 시킨 전력의 작가다.
그의 착품 철도원을 영화 인지도에 힘입어 읽지도 않고 들여놓았을 도서대여점의 주인이 한없이 고마웠다.
작은 우연이 아니였다면 내가 아버지뻘의 노작가를 들여다보기나 했을까.
마주 앉았지만 다른 세대에 속한 나와 나의 부모님과는 달리 아사다 지로 작품속에서의 옛날은 따뜻하고 친근했다. 그의 작품을 만나기 전 나에게 내부모님의 젊은시절은 막연했고, 그 시대는 과거였을 뿐이지만 그의 작품을 만난 후 이전 세대를 살아간 젊은이들 역시 나와 똑같은 피가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크고 큰 바다를 건너 다른 땅에서 살아온 작가지만 아사다 지로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무엇보다 감동적이였다.
모두가 한탄만하는 세상을 이처럼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얼마나 강할까. 아픈 상처 위에 꽃잎을 바르고 다시 웃는 이들을 그리는 사람은 얼마나 큰 마음을 가졌을까. 아사다 지로의 작품들을 읽으며 내내 묻고 또 물었던 질문들이다.

그런 그가 '나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 라고 말했다. 대체 어떤 작품이 그로하여금 넘치는 자부심을 감추지 않게 만들었는지 궁금해 견딜수가 없었다. 나에게 창궁의 묘성은 이렇듯 견딜수 없는 궁금함으로 다가왔다.

창궁의 묘성은 청나라의 마지막 자락을 배경으로 하고있다. 이 시대를 이야기 하고자 할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 하나 있다. 무수히 많은 학자들과 작가들의 펜 끝에서 극과 극의 모습으로 그려진 서태후는 청의 유구한 역사 몰락의 중심에 선 여인이다. 당연히 창궁의 묘성에서도 가장 큰 존재감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이번엔 그녀가 주인공이 아니다. 고된 노동과 굶주림에 못 이겨 아비가 죽고, 큰 형이 죽고, 둘째 형이 죽고, 셋째 형마저 떠난 집에서 자기보다 더 어린 여동생과 미쳐버린 어머니밖에 안을 것이 없는 춘아가 주인공이다.

말똥이며 소똥을 주워 연명하는 작은 아이지만 금요람에 누워있는 아기보다 사랑스러운 춘아에게 점쟁이 백태태가 말한다. 가난한 이씨 집안의 넷째 아들 샤오리야. 너의 수호성을 오랑캐의 별, 묘성. 너는 반드시 천하의 모든 재물과 금은보화를 한 손에 거머쥐게 될 게다. 인간이란 동물은 얼마나 간사한지 좋은 점괘에 기뻐하고 나쁜 점괘에 몸을 떤다. 춘아는 결코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백태태의 점에 의해 주어진 가난의 굴레를 벗기 위해 몸부림친다.
분명 우리가 원하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영웅의 모습이지만 사억 인구의 거대한 덩치의 한 나라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시대에 춘아는 인생에 승자가 될수 없다.

춘아와 비슷한 비중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 문수는 어떤가. 시골 대지주의 서자로 태어나 형의 디딤돌 역활로 살아야 할 운명이였지만, 재상이 되리란 백태태의 점괘와 운명에게 떠밀려 젊은 세력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높은 자리에서도 맞지 않은 옷을 입은양 가난한 자들에게 연민을 갖는 곧은 사대부의 모습은 역시 영웅이 갖춰야 할 면모이다. 하지만 그 역시 지나친 존재감이 넘치는 시대에서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제국의 몰락을 막고자 하였으나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넘을 수 없는 인물들, 서태후와 평생을 걸쳐 그녀가 사랑한 영록, 그리고 효심 지극한 새장속의 불운한 천재 광서제가 수 놓은 역사를 뛰어넘지 못한다. 더욱이 신념과 카리스마의 화신같은 이홍장 장군이며 저널리스트의 사명을 품은 토마스와 게이, 모든이들을 너무 사랑해 눈물도 용기도 넘치던 담사동과 같은 사람들이 영웅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존재 자체로 영웅임을 증명하는 광서제는 논할 필요도 없다.

상황이 이러니 창아와 문수가 주인공이라고 정해져 있을진 모르나 결코 그들이 주역은 아니다. 모두가 주역이였다.
네권에 걸쳐 빼곡히 등장하는 인물들은 누구 하나 할 것없이 개성적이고 생기가 넘치며 필사적이다. 춘아와 문수의 비중이 큰 것은 사실이나 어느하나 조연이란 이름으로 미뤄 놓을 만큼 작지 않다.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호통을 치고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아사다 지로의 손에 의해 쓰여졌다. 공정한 아버지처럼 모든 인물을 누구보다 큰 사랑으로 쓰다듬고 있다. 전작들을 관통하는 아사다 지로의 인간애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몸을 관통하는 여운에 취해 도저히 창궁의 묘성에 대한 비평을 할수가 없다. 비록 무엇보다 아름다운 이 이야기가 알고있던 인물들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하여도, 어쩔수 없이 일본에 더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전작들에 비해 지나치게 진지해 특유의 위트와 촘촘한 짜임이 모자라다 해도, 그래도, 그럼에도, 절대 나쁜 말을 쓸수가 없다.

다시금 말하지만, 아사다 지로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그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작가이다. 그런 아사다 지로의 성향이 듬뿍 녹아 있는 이 작품을 깎아내리다니. 나는 그렇게 용감하지 않다. 창궁의 묘성은 분명 그가 자부한 역작임에 틀림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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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책들의 도시 - 전2권 세트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품절


삽화가 무척 맘에 들었던 [꿈꾸는 책들의 도시]입니다.
받아서 뜯자마자 감탄을 내질렀던 기억이 나네요.
삽화가 참 귀여워요.

이 책은 두권으로 되어있어요.
두권을 딱딱한 커버가 둘러싸고 있죠.
양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렇게 생긴 양장본입니다.
어찌보면 한권으로 묶여 나왔어도 괜찮았을 분량이네요.

아아..주인공 힐데군스트 폰 미텐메츠군의 초상화입니다.
아시겠나요? 이 책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공룡입니다.
린트부름 요새에 살고 있는 공룡들 중 하나죠.
아직 한편도 쓰지 않았지만 작가의 도시에서
작가의 운명을 타고난 공룡입니다.
린트부름 요새의 공룡들은 모두 타고난 작가들이니까요.

이 책의 곳곳에 포진해있는 삽화들이
재미를 더해주죠,
독특하고, 매력적인 그림들입니다.

힐데의 존경할만한 대부 단첼로트는 애석하게도 죽기 전 정신이 오락가락합니다. 이건 단첼로트 대부가 그 가락 어딘가에 걸쳐졌을때 쓴 시죠. 스스로를 먼지낀 안경들이 가득 찬 궤짝이라고 생각하며..

어쨌든 존경할만한 작가이자 정원사였던 단첼로트의 유언으로 힐데는 린트부름 요새를 떠나 그 유명한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떠납니다.

오름을 위하여!
(물론 힐데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치 않지만)

와우, 독특한 페이지,
글씨가 보이지 않아야 할텐데요.
보면 재미가 떨어질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저기 보이는 외눈박이들은 제가 너무 좋아하는
ㅇㅇㅇ족입니다.

정말이지, 사랑스럽단 말로밖에 표현할수 없어요!
이름을 공개하지 않은건 책을 읽을 분들을 위해,
그분들의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기위해 불가피했습니다.

어쩐지..
너무 편파적으로 찍어댔네요.
좋아하는 ㅇㅇㅇ족만 잔뜩 찍었습니다;
뭐, 별수 없달까요.
아무튼 슬슬 눈치채셨겠지만 그야말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꿈꿀만한 세계입니다. 좋은 작품을 읽는것이 무엇보다 큰 행복이요, 작가가 가장 영향력 있는 직업이며, 온 도시가 책을 위해, 책으로 흘러가죠.

위대한 상상력을 위해 만세!

역시 ㅇㅇㅇ족,
세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삽화입니다.
비슷하게 생겼지만 모두 개성이 넘치죠.

보기엔 기괴해 보여도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종족이라니까요.

이건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맘에 들어 찍은 사진입니다.
부흐하임 지하에 사는 살아있는 책들은 눈도 있거나,
입이 있거나, 발이 있거나, 날개가 있죠.
책과 벌레를 잡아먹는 포악하고 위험한 책들입니다.

아아..
항상 가장 좋아하는 패이지를 찍게 되네요.
여길 읽으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왜인지 모르시겠죠? ㅎㅎ)

꿈꾸는 책들의 도시.
그야말로 환상적인 책입니다.
눈부신 상상력에 빛납니다.
완전소중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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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이야기 1
미하엘 엔데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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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일은 영원히 그렇게 계속되리라. 사물의 흐름 속에서는 변화라는 것이 실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오로지 소년만이, 바스티안만이 그 흐름에 끼여들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이 순환 속에 갇혀 있지 않으려면 그 일을 행해야만 했다. 소년에게는 이 이야기가 벌써 천 번은 되풀이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것에는 전(前)도 후(後)도 없고 모든것이 영원히 거기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제 소년은 노인의 손이 왜 떨렸는지 이유를 알았다. 영원한 반복의 쳇바퀴는 끝없는 끝이었다.
 
[끝없는 이야기 -미하엘 엔데-]
 
간혹 믿음을 보류해 둬야 하는 꿈들이 있다.
 
삭막한 생활에 젖어들며 모든 환상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행위다. 누구도 자신을 그토록 학대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아서 이미 우리의 아이들은 듣고 보고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살해되어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연하단 듯이 그들의 순수는 상실되어간다.
 
미하엘 엔데는 그들을 위해 눈물로 책을 빚었다. 그 눈물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않은 것이라 더욱 이채롭고 영롱하다. 아마 그는 모든 아이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그에게 바스티안이였다.
 
내가 다니던 국립 중학교는 2학년이 되던 해부터 부쩍 도서관에 힘을 주었다. 제일 구석에 있는 교실 하나에 간판 달고 책 몇권으로 구색을 갖췄으니 충분히 중학교 도서관 스러웠으나 그 해부터 교육 정책이 바뀌기라도 했는지(내가 학생 딱지를 달고 있는 동안에만도 몇번이나 바뀐 교육청의 정책이란 것은 이미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매달 수십에서 수백권의 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갈때마다 새로 온 책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채 바닥에 쌓여 있었고 매번 내가 기억하던 위치에 새로운 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곳은 내가 첫번째로 만난 신천지였다.
 
당시는 그야말로 탐독인 동시에 무한 소비의 시절이였다. 무수한 책을 읽어 댔지만 사실 기억에 남아있는건 반에 반도 안된다. 그때의 나는 엉성한 거름망처럼 읽는 족족 그냥 통과시켜 버렸다. 책의 내용 보다 단지 글짜를 읽는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겨진 몇 가지는 나에게 있어 절대적이기까지한 가치를 얻었다. 맘에 들지 않는 부분엔 가차 없더라도 맘에 드는 것에는 지금보다 더 쉽고 순수하게 몰입했던 탓이다. 
 
그렇게 내 마음속을 파고 들어 이후의 독서편력에 지표처럼 자리한 책이 있다.   
끝없는 이야기. 말 그대로 끝없이 되풀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다.
 
문예 출판사에서 두권 짜리로 나왔던 끝없는 이야기의 초판은 무려 1979년이다. 작년에 비룡소에서 한권 짜리로 다시 나온 모양이지만 번역이 조금 거칠더라도 내 기억속에 책장을 더듬는 편이 훨씬 좋기에 주저 없이 구판을 구입했다. 사실 극구 구판을 고집한 이유는 현실과 동화세계를 글씨 색으로 나눈 독특한 편집 때문이였다. 현실은 갈색, 환상계는 청록색이였다. 
 
용기 없는 한 소년이 환상계를 위험에서 구해내고 두려움에 맞설 줄 아는 진짜 어른으로 (정신적인)성장한다는 지극히 단순 명료한 줄거리 구조를 가진 책은 실상 그리 만만치가 않다.
아이러니 하게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환상이며, 꿈이며, 의지며, 긍지며, 믿음이라는 것을, 자꾸만 쉽게 바닥을 지워버리는 어른들을 위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 너희들이 그 안으로 들어서면 그것은 너희들에게 달라붙는다.
그 무(無)가 말이야. 너희들은 일종의 전염병이 되는거야.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 인간들은 겉보기와 진실은 수별할 수 없이 장님이 되는 거야. 그곳에서 너희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니?"
 
"몰라" 아트레유는 소곤거렸다.
 
"거짓말이라고 부르지!" 그모르크가 짖어댔다.
 
아트레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년의 입술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믿지 않는 꿈과 동화속 이야기는 거짓말일 뿐이다. 미하엘 엔데가 만들어낸 환상계의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無)가 환상계 전체를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어렸을때는 요정이나 도깨비를 믿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기 전에, 그들의 여왕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존재를 찾는다. 누구보다 확고한 신념을 고수할 수 있는 구원자. 주인공 바스티안은 책 저편에서 그들의 혼란과 긴 여정을 갈색 글씨로 바라보고 있다.
 
주체적이지 못한 겁쟁이였을 뿐인 소년은 책임과 두려움을 마주하는 용기를 배우고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메세지를 책 너머의 우리에게 전한다.
 
"사람들 중에는 영원히 환상계로 못 가는 사람들이 있단다." 코레안서 씨는 말했다. "또 갈 수는 있지만, 영원히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도 있어. 그리고 환상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거야. 바스티안 너처럼. 이런 사람들이 양쪽 세계를 건강하게 만든단다."
 
천 페이지가 넘는 기나긴 이야기를 마치고도 미하엘 엔데가 숨을 고르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라. 제목처럼 끝없는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금이야 이런류의 전개가 흔하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의 발아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포기 하지 않는 한 영원히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는 동화와 환상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같이 딱 맞아떨어지는 결말은 없다.

모든 이야기가(소설과 영화와 노래와 구전이) 스스로의 생동력을 가지고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믿음은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고 아직까지 유효하다. 내가 퍽퍽한 삶에서 힘을 얻는 모든 주전부리들은 그래야 한다. 추상적일지라도, 살아있어야 한다. 절대 잊혀져선 안된다. 끝없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펄펄 살아 날뛰고 있었다.

그렇게 미하엘 엔데는 닥치는 대로 읽던 내게 절대적인 기준 하나를 심어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커서 다시 읽는 그의 책은 그때와 같은 감동을 주진 않았다. 이미 많이 녹슬고 무뎌진 나의 천칭이 현실 쪽으로 더 많이 기운 까닭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리 없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미하엘 엔데가 보여주는 세상을 터무니 없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늦게나마라도 잃어버린 꿈을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속는 셈 치고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아이들보다 뻔히 눈에 보이는 것도 거짓이라 믿어 버리는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미 자유를 상실해버린 어른들은 더이상 동화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미하엘 엔데의 또 다른 책 [모모]가 더 걸맞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끝없는 이야기보다 인지도가 높은 모모는 좀 더 나이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의 눈 높이에 맞춰 똑같은 주제를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이미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는 방법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다시 환상의 세상으로 들어가려면 길을 안내해 줄 모모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고 다른 기회에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Ende-     

우리는 어린 시절 창조해 냈던 그 멋진 세상을 잊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한다.
대다수 사람이 커가며 잊어버리는 사실일지라도 잊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는 영원히 크지 않는 어린이거나, 어른이 아님에 분명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라는 숫자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아님에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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