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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파는 외계인, 미친 초록별에 오다
웨인 W. 다이어 지음, 김보영 옮김 / 21세기북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발전되는 과학과 가능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우리의 사고수준은 진화되어야 한다.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해 우리를 관찰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는 외계인의 객관적인 관점을 순수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현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헛된 믿음으로 잠식된 사고방식을 외계인의 객관적인 눈을 통해 깨닫고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자 웨인 다이어의 (요약)서문이다. 이 글을 읽으며 참 많은 기대를 했더랬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작가에 자기계발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심리학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있는 웨인 다이어. 기대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비록 웨인 다이어를 처음 접하는데다 자기계발서적을 그닥 즐겨하지 않는 독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포부도 당당한 서문과 표지를 장식하는 무려 '유쾌한 행복소설' 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책이라면 좀 더 재밌어야 하는게 아닐까? 명성에 걸맞는 깊은 성찰 또한 우러나야 하는게 아닌가?

 

결론부터 까고 들어가자면 기가 막혀 말이 안나온다.

 

시작은 우라노 공식을 해독한 과학자 어스본으로부터 시작한다. 지구를 거울에 비췬 것처럼 꼭 닮은 우라노스라는 행성에서 어스본은 우라노스인과 지구인의 차이점을 찾고자 한다. 어스본이 찾아낸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해줄 전문가는 마침 호텔 티비를 통해 걱정지수를 예보하고 있던 에이키스라는 아름다운 아나운서였고 급하게도 약속을 잡은 어스본은 그녀와 만나 우라노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껍데기는 닮았지만 근본은 완전히 다른 두 세계의 남녀의 대화는 평행노선을 그리고 결국 어스본이 에이키스를 지구에 초대하기에 이른다. 두달여간 지구를 둘러본 에이키스는 거침없는 비판을 토로한다. 시종일관 굽신거리는 어스본은 에이키스에게 한눈에 반한 모양이다. 아, 사랑이란 사람을 가리는 법이 없지. 어스본(웨인 다이어)의 눈에 에이키스와 그녀가 속한 우라노스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 인류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이상향이다.

 

솔직히 나 역시 에이키스의 주장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에이키스가 아닌 저자 웨인 다이버의 생각일 터이지만 그가 말하는 행복은 평소 내가 그려오던 이상이기도 하다. 행복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단 하나, 의연한 마음가짐만이 필요하다. 핑계거리를 만드느라 시간을 허비하며 불행을 정당화시키려는 노력 자체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 에이키스의 말이 구구절절 옳다. 비록 그녀가 저자의 설정만큼 똑똑해보이지도, 순수해보이지도 않을지라도 에이키스가 하는 말만큼을 옳다. 바꿔 말하자면 저자 웨인 다이어의 주장은 퍽 완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감할 수 없다. 이성적으로 완벽한 논리가 감성적으로는 와 닿지 않는다. 대체 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책을 썼을까? 터무니 없이 부족한 개연성, 빈약한 스토리, 우라노스를 향한 맹목적인 (신앙에 가까운)동경, 현시대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 에이키스라는 외계인의 눈에 지구인들은 터무니없이 어리석고 나약하며 비겁하게 비춰진다. 단 한줄로 요약되어버린 2달간의 체류기간동안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책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에이키스의 오만에 가까운 주장만 듣고있어야 한다. 그 사이사이에 양념처럼 곁들여지는 어스본의 비굴한 모습은 보너스인가?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좌절과 만난다. 공허한 성공이 삶의 목적인양 다그치는 세상은 몇번이고 나를 배신한다. 진정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타인의 부족함을 이해하고, 불완전한 인간을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에이키스의 주장처럼 행복은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누가 억지로 앉히고 구구절절 주입시킨다 해서 교육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만에 빠진 심리학자의 자기과시적 소설에 내가 공감 코빼기라도 할까보냐. 차라리 웨인 다이어의 주장이 그렇고 그런 자기계발서적으로 나왔다면 백번 공감하고 생각을 다잡았을지도 모른다. 지구인 어스본의 깊은 감상과 고뇌, 성찰이 어우러졌다면 동감했을지도 모른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외계인 에이키스, 인간이 아닌, 인간일 수 없는 에이키스의 입을 통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웨인 다이어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예수나 부처가 아냐. 평범한 인간일 뿐이지. 제 아무리 훌륭한 이론을 정리했다 하더라도, 계명을 설파한다 하더라도 개인은 행복해지지 않아. 대중은 어리석지만 어스본처럼 어수룩하지도 않지. 진리는 에이키스의 말처럼 단순명확하지도 않아. 당신의 말처럼 쉽게 이뤄지는게 이상이라면 세상은 골백번도 더 변했게? 정신차려. 적어도 당신은 나보다는 똑똑한 사람이지. 그렇다고 완벽하다는 소리는 아냐. 제발 다시는 교훈적인 감동을 빙자한 설교적 소설을 쓰지 말아줘. 종이가 아깝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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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칼라스 - 내밀한 열정의 고백 삶과 전설 6
앤 에드워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해냄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마리아 칼라스 -내밀한 열정의 고백-

 

위대한 작품을 대함에 있어 작품이 가진 아우라가 크면 클수록 보는이는 위축되고 만다. 작품의 본질적인 매력이 아닌 명성과 가격에 놀라 감탄을 하고야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나 그 작품이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고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깊이 음미할 새도 없이 번쩍거리는 포장만 보고 정신을 잃는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가치가 있는 것이라 멋대로 정의한 채 의례적인 탄사를 내뱉고 집으로 돌아와 익숙한 대중가요와 티비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과연 그럴까?

 

우리시대 고전이 되어버린 모든 음악과 그림들 역시 당시의 대중을 열광케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영혼을 울리는 특별함은 쉽사리 퇴색되지 않는다. 오래된 것들이 오래토록 사랑받는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비록 달라진 시대적 상황과 관념들에 의해 작품의 위대함이 살짝 감춰졌을지라도 보고자 하는 이들의 눈에는 여전히 위압적이고 아름답다. 우리시대의 매체와 고전은 다수를 감동시키기 위해 태어났다는 점에서 동일한 출생의 이유를 갖고 있다. 뭐가 다른가? 오래되었단 이유만으로 주춤거릴 필요가 전혀 없다. 걱정과 근심은 위대한 작품들을 감상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마음을 여는 것만으로는 이해할수 없다. 현시대의 기준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과 귀에 고전은 난해하고 때로는 기묘할 따름이다. 여전히 어렵고 뜬구름마냥 막연하기만 하다.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던 매력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걸까? 마음을 사로잡는 천재성은? 번득이는 착상은? 과거 그들을 감동시킨 샘은 말라버린 것이까? 그렇지 않다. 뒤로 물러났을 뿐이다. 고전을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약간의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작품이 태어났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사건들을 소스처럼 곁들여야 비로소 진정한 맛이 우러난다. 이러한 절차마저도 번거롭다는 사람은, 그래 괜찮다. 현시대인들을 위해 쏟아지는 매체들 역시 훌륭하다. 그것들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기 바란다. 지금을 살고 명멸하는 무수히 많은 작품들 가운데 몇십년, 몇백년 후의 사람들에게까지 영감을 주는 작품이 몇이나 될까. 우리 가운데 그러한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인간은 단 몇초 후의 세상도 예상할 수 없다. 우리에게 확실한 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것들 뿐이다. 고전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이미 질긴 생명력을 증명한 작품들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여기 위대한 예술가가 있다. 화가는 붓을 놀려 작품을 낳았고 작곡가는 악보에 혼을 싫었지만 연주자와 가수들은 그럴수가 없었다. 그런면에서 레코드가 등장한 이후를 살았던 마리아 칼라스는 운이 좋은 편이다. 비록 그녀의 오페라가 영상으로 남진 못했지만 몇장의 사진과 목소리를 녹음한 음반은 남았다. 작가들 역시 직접 보고 듣지 못할 후세 사람들을 위해 그녀의 천재성과 위대함을 글로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반편뿐인 찬사일지라도 사람들을 매료시킨 디바의 명성은 이어지고 있다.

 

오페라는 무척이나 총괄적인 매체다. 오페라 가운데는 스토리가 있다. 삶과 죽음, 사랑과 분노, 인간의 본성과 이성을 아우르는 오페라의 레퍼토리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작가들을 매료시키는 단골소재이다. 오페라에는 음악이 있다. 위대한 음악가들은 스토리와 만나 더욱 공고해지는 극적인 작곡을 마다하지 않았다. 지휘봉을 통해 언제고 다시 재현되는 오케스트라의 울림을 말이다. 그리고 오페라에는 디바가 있다. 스토리와 음악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전해야 하는 가장 빛나는 존재, 역설적이게도 오페라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인간의 목소리는 디바의 죽음과 함께 사그라들고야 만다. 오페라가 탄생한 이후로 얼마나 강력하고 화려한 디바들이 있어왔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른 예술가들과는 달리 손과 목으로 감동을 전하고자 했던 연주자들과 가수들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들의 진가는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운 좋게 앨범 몇장과 드라마틱하게 아름다운 미모를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던 마리아 칼라스 역시 마찬가지다. 극에 대한 그녀의 깊은 이해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표정과 제스쳐, 온 몸을 관통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단지 전설적인 디바에 대한 찬사만이 남았을 뿐이다.

 

마리아 칼라스 평전은 쪼가리에 불과하다. 여타의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그녀, 타고난 재능을 날카롭게 벼린 고난에 대한 서사시를 읇? 결여된 애정을 예술로 승화시켜야만 했던 소녀, 무대위에서만 진정한 충일감을 얻을 수 있었던 여인, 천재들의 삶은 늘 그렇듯 지독히도 잔인하다. 저자는 고통으로 얼룩진 칼라스의 삶을 구구절절 늘어 놓으며 그녀에게 찬사를 보낸다. 어쩐지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대한 애도의 글처럼 느껴진다. 평전을 읽고 마리아 칼라스의 삶과 열정을 이해했지만(이해했다고 착각했을 따름일지라도) 어디에서도 그녀의 오페라는 볼 수가 없다. 칼라스는 말 그대로 전설이 되어버렸다. 때로 지나간 것들은 닿지 않기에 더욱 아름답게 추억되곤 한다. 지금의 나로써는 저자가 늘어놓는 찬사들이 미화된 애도의 마음인지 알 길이 없다. 또한 지나치게 스캔들 위주로 점철된 이 평전을 백펴센트 신용할 수도 없다. 칼라스의 극과 음악에 대한 성찰보다는 그녀의 불안정한 가정사와 애증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마리아 칼라스의 죽음 후에도 공고한 그녀의 위명과 범인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예술가의 치명적인 삶 뿐이다. 분명 불꽃처럼 매력적인 여인임에 틀림없다. 나에게 마리아 칼라스는 유명세를 치른 오페라 여가수에 불과했다. 지나치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고음으로 아리아를 부르는 소프라노 여가수, 클래식이나 오페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는 내 귀에는 그저 부드럽게 이어지는 기교로 점철된 예쁘장한 아리아가 달았다. 마리아 칼라스가 유명하단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어딘가 거칠고 과장된 그녀의 목소리는 추상화가의 그림처럼 머나먼 이야기었다. 나는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를 즐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고전이 갖는 아우라에 지레 포기하는 사람들처럼..

 

마리아 칼라스의 평전을 읽음으로 그녀에게 한발자국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 칼라스의 아리아를 듣는다면 그녀의 목소리만이 갖는 풍부한 질감을 어느정도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부른 아리아들이 갖는 스토리를 알고나면 더욱 즐거우리라. 오페라를 작곡한 작곡가들의 삶과 시대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더욱 완벽히 극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고전을 이해함에 있어 '아는만큼 보인다'처럼 좋은 명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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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상자의 역습 - 대중문화가 어떻게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었나?
스티븐 존슨 지음, 윤명지.김영상 옮김 / 비즈앤비즈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바보상자의 역습.

 

이 저돌적인 제목 뒤에는 어떤 글이 숨어 있을까?
아무리 내가 잘못된 지식을 잔뜩 싸 안고 세상을 살아 간다지만, 그렇기에 역발상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노력한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는가. 바보상자라고 알고 있던 티비의 역습이라니. 부제는 더더욱 가관이다. '대중문화가 어떻게 우리를 더 똑똑하게 만들었나?' 란다. 기가 막히는 소리지만 사실 날때부터 컬러 텔레비전을 끼고 살아온 나로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줘야 하는 부분이다. 적어도 하루 두세시간 이상씩을 꼬박꼬박 티비에 헌납해 왔다. 절대 티비에서 쏟아지는 것들이 질 좋은 정보라고는 못하겠지만(때때로 고급이 될때는 많다. 깊이가 부족해서 그렇지.) 그로인해 생활에 필요한 일상적인 정보들을 얻어 온 것은 사실이다. 요즘에 와서는 프로그램의 영역이 넓어지고 케이블이 보편화 되면서 티비가 부쩍 똑똑해졌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추상적으로는 느껴지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하라면 꽉 막혀 버리는 기분.

 

이 책이 이 모호한 기분을 명쾌하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족스럽다. 책의 저자 스티븐 존슨은 나의 기대보다 훨씬 명료하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바보상자=텔레비전 이라는 공식을 넘어 티비 이후에 등장해온 대중문화(영화, 비디오 게임, 인터넷) 전반에 걸친 저자의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정말 뭔가 하나 잘 배워 간다는 만족감을 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논제를 이끌어가는 페이스가 안정적이고, 다양한 에피소드들이 들어 있어 책을 읽는데 어려움이 없다. 잘 정돈되지 않아 난독의 어려움을 겪게 하는 책들을 만날때면 자꾸만 흐름이 끓겨 덮어 놓다가 결국 포기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특히 비문학에 약한 나에게 스티븐 존슨의 책은 입에 착착 달라붙는 감칠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몰입이 돈으로 이어지는 대중문화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런 방면으로도 도가 튼 모양이다. 자꾸 칭찬만 늘어 놓아 미안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텔레비전이 생긴 당시부터 당연스럽게 사람을 조급하고, 멍청하게 만든다 알고 있던 대중문화가 사실상 우리의 두뇌를 단련시켜 왔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난 멋지게 설득당해 버렸다. 저자는 꼼꼼한 조사를 바탕으로 상대가 빠져나갈 틈 하나 없는 그물을 쳐버린다.

 

대중문화는 일정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점점 더 정교하고 치밀하게 변해간다.

 

그리고 그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는 듯 하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누구나 아마추어 평론가나 학자가 되어 드라마나 롤플레잉 게임에 대해 평가하고 트릭을 풀어 자랑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급격해졌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만 하더라도 아날로그 시대에는 직접 서점에 가서 페이지를 넘겨보는 수 밖에 없었던 책 고르기의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이용해서, 손쉽게 먼저 읽은 사람의 감상을 읽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대중문화는 가볍게 폄하할 수 없을 만큼 똑똑해졌다. 갖가지 정보가 범람하는 이 시점에서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다양한 가능성을 인정하는 넓은 시야를 갖는데 이 책이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남아있다.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찜찜하게 만든 무엇, 바보상자의 '역습' 이라는 제목의 바로 이 '역습' 마치 티비와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기기들이 인간의 역사와 함께한 아날로그적 문화를 잡아먹기라도 할 기세다. 로봇이 세상을 지배하게 되는 sf소설의 한 장면처럼 똑똑해진 대중문화 혁명이라도 일어난단 말인가? 각자의 장단점은 인정하지만 기술의 최첨단에 선 매체라 할지라도 삼백여페이지에 걸쳐 한가지 주제를 이야기하는 책의 진득함엔 비할 수가 없다. 다른 매체들로 인해 입지가 줄긴 했지만 책은 아직도 우리에게 가장 깊이 있는 전달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책만이 갖는 장점은 3D입체 영상으로 펼쳐지는 게임이나 블록버스터 영화로 도 표현 할 수 없다. 제 아무리 똑똑한 대중매체라 할지라도 책만은 대체할 수 없다는 믿음. 이 근거있는 믿음이 '역습'이란 단어에 불쾌감을 표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저자 스티븐 존슨은 제목 이후로 단 한번도 역습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럴거면서 제목은 왜 저렇게 도발적으로 지었담?) 그는 어디까지나 조금씩 더 지적인 자극을 원하는 사람들의 욕구에 따라 상향 곡선을 그리며 똑똑해지고 있는(슬리프 커브) 대중매체에 대해 다루고 있지, 책을 비롯한 아날로그적 매체를 삼키고 당장이라도 지구정복이라도 할 기세의 대중매체를 논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단지 우리가 편견에 사로잡혀 없수이 여기는 대중매체 역시 다양한 자극으로 우리의 뇌를 단련시키고 있으며, 계속 진화 함으로 그 정도를 더 하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새로이 등장한 대중매체들이 독서, 만남, 대화, 마음을 전하는 포옹, 미소, 친절 등의 미덕을 대체 할 수 있단 터무니 없는 주장 따윈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다른 매체가 아닌 책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침으로 아날로그적 매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하고 있는 얘기는 대중매체의 역습이 아닌, 대중매체의 진화이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 않은가?
영화들은, 드라마들은, 게임들은,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다. 우리 역시 다양한 자극으로 인해 (일부 측면에서만) 더 똑똑해지고 있다. 비록 대중매체가 우리에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와 사랑은 가르쳐 줄 수 없을 지라도, 트릭을 풀어내고 문제를 빠르게 인지하는 능력 같은 부분은 충분히 가르칠 수 있다. 갈수록 진화하는 대중매체를 바르게 파악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바로 지금이 하나의 편견을 깨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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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의 비밀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백설자 옮김 / 현암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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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지요, 친애하는 주인님. 나는 내 존엄성을 찾기 위해 주인님을 죽일수밖에 없겠지요.'

 

한때는 이 밉상맞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커이고 싶었다. 삐딱한 생각으로 사람이든 신이든 가리지 않고 파괴해대는 조커이기도 했다. [카드의 비밀]은 꽉막히고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힌 꼬마였던 내 유년시절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그 작은 머리통에 무수히 많은 질문의 시작을 끊어준 책이였다.

 

나의 스승 가아더는 철학이 철학의 계보나 철학자들의 사상을 줄줄 외워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말이지 먹고사는 것과 하등 상관 없는 사치스러운 질문들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왜 중요한지 말한다. 그렇기에 한번도 만난 적 없는 할아버지 요슈타인 가아더는 휘몰아치던 십대때부터 나의 철학 선생님이다. 또 나를 매료시킨 나만의 영웅이기도 하다. 현명하고 빛나는 문장들은 멋모르던 꼬마를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아.. 요슈타인 가아더! 나는 아직도 이 이름을 들으면 심장이 뛴다. (내 안에 황금관을 쓰고 앉아있는 작가들은 가아더 외에도 몇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들에게도 다시금 시간을 할애할 작정이다.)

 

사실 [카드의 비밀]은 가아더와의 첫만남이 아니다.
당시 중학교 도서관에는 가아더의 다른 작품들이 많았고 역시 가장 유명했던 것은 [소피의 세계]였다.
길고 긴 그 책의 절반은 도덕책의 확장이나 다를바 없었다. 그야말로 수업을 듣는 것 같은 설명조의 문장들의 행렬이였다. 주인공 소피의 일상과 그 아이를 둘러싼 수수께끼가 마음을 사로잡아 지루한 수업을 참아넘기게 했지만 썩 즐겁게 읽은 책은 아니였다. 맞다. [소피의 세계]에서 가아더는 심술을 부렸다. 심술을 부릴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길 바랐지만 그보다 먼저 이 땅에 살았던 훌륭한 조커들의 사상들도 기억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가아더는 [소피의 세계]의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부분을 꾹꾹 참았다가 마지막에서야 풀어놓았다. 끝까지 읽고서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책이라니, 그러기엔 심술궂게 많은 분량이였다. 그리고 이제와서야 느끼지만 너무 멋지게 철학사를 소설로 풀어 놓았었다.

 

좌우간 지금 말하고자 하는 책은 [소피의 세계]가 아니다. 사설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가아더가 [카드의 비밀]주인공 한스가 여행에서 돌아와 읽을만한 책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소피의 세계]를 썼기 때문이다. 가아더는 자신이 창조한 아이들과 직접 소통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린아이는 존재에 경의로움을 느끼는 능력을 타고나기 때문에 스무살에 철학책을 읽는 것은 너무 늦다고 말한다. 이 능력은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잃지 않도록 유지시켜주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정말이지 나는 이 작가가 너무 좋다. 아이들에 대한 이 작가의 애정이, 그 작은 눈에서 배우고자 하는 겸허한 태도가 좋아 미칠것 같다.

 

결국 순서는 뒤집어 졌지만 그래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카드의 비밀]을 먼저 읽었다면 치기어린 마음에 [소피의 세계]는 눈에 차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저울에 두 작품을 달고자 한다면 우열을 가릴 수가 없지만 재미라는 면에서 [카드의 비밀]은 가아더의 다른 모든 작품들에 비할바가 아니다. 근원적인 질문과 사색, 무수한 상징성으로 가득 찬 [카드의 비밀]은 '내가 조커임을 잊어선 안된다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있지 않은가. 조금씩 물들어 결국은 세속적인 다른 카드들과 같아지길 바라지 않는다. 내 안에 날을 벼려라. 가아더가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전해준 가르침이다. 아이들이 본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지만 어쩌면 이미 익숙한 것을 당연히 여기는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스스로가 여기는 것만큼의 손톱만큼도 똑똑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가아더는 조커를 자칭하며 매일 아침 펑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한스의 아버지가 아닌 (아직 발아하지 않았지만)선천적으로 삶에 대한 경의로움을 발견할 재주를 타고난 한스를 주인공으로 정했을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었지만 잃어버린 재주..무관심하지 않는 법. 한스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함으로 잠시 잊었던 이 재주를 발전시킨다. 그 사건에 대해선 비밀, 당연히 줄거리에 대해서도 비밀, 요즘 너도나도 달고 나오는 반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단 사실이 마음이 미어지지만 [카드의 비밀]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다! 아.. 이 선전문구 같은 문장이라니, 하지만 역시 줄거리는 하나라도 누설되어선 안된다. 결국 뜬구름 잡는 소리밖에 늘어 놓지 못해 이런 서평을 이 책에 달아야 하나, 이 정도밖에 못쓰나 하는 자괴감이 들지만 그래도 역시 추천하고픈 책이기에 비루한 글을 써내린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만나는 모든 사람의 손을 잡고 '읽고 감상을 들려주라' 청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나는  남들과 다른 사고를 하고 존재의 본질을 의심하는 조커가 되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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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 지음, 임희선 옮김 / 북스토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의식하고 있진 않지만 사람들은 꽤 복잡하게 사고하고 있다.
구물구물 몰려있는 사람들은 모두 촘촘한 거미줄처럼 인연의 끈을 달고 있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치밀하게 짜여진 인과관계에 묶여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지 물 위를 헤엄치며 수면 위로 떠오른 것들만으로 만족하고 산다. 아래까지 돌아볼 여유가 어딨느냐 핑계를 대더라도 사실 이유는 하나다. 관심이 없는 것이다. 물 아래는 잔잔하고 들어난 상황은 지독하게 치열하다. 치열한 생활에 매달려 관념적인 문제는 서랍안에 넣어버린다. 그런 와중에 세상에는 간혹 괴짜들이 태어난다. 한걸음 물러나 거미줄의 일부를 들여다보고 곰곰히 생각해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는 괴짜 말이다.
그런 괴짜들은 다양한 직업을 가졌지만 그 중 가장 대중적인 직업이 작가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당연, 당연하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일본과 닮은점이 많다. 그 섬에서 유행했던 것들은 바다를 건너 곧 여기서도 유행을 하고, 그 땅에서 일어난 경제적 용틀임도 비슷하게 답습해졌다. 더불어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개인적인 문제들도 사회라는 큰 틀을 따라 흘러들어왔다. 부인할 수 없게도 사람 사는 모양은 어디나 비슷한 모양이다.


무수히 많은 문제들 중에 오쿠다 히데오는 직장생활이 자연스럽게 되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여성들을 관찰했다. 걸과 노처녀, 독신과 결혼, 맞벌이와 전업주부, 시대가 요구하는 선택 사이에서 길을 잃고 갈팡질팡 하는 여자들을 들여다 보았다. 오쿠다 히데오는 꽤 날카로운 시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가상의 인물들에게 적절한 답을 찾아주는 것으로 이야기들을 채웠지만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다. 사실.. 솔직히 털어 놓자면 식상하다.

 

나이많은 여자가 회사와 부모로 부터 받는 대우, 관리직의 여자와 남자부하직원과의 미묘한 알력, 안정된 가정을 꾸린 다른 여자들을 부러워하는 커리어 우먼, 그런 직장여성을 꿈처럼 바라보는 전업주부, 육아와 직장생활, 맞벌이와 싱글맘, 발에 밟힐 듯 많은 여성지들과 순정만화들에서 언급된 소재들이다. 심지어 요새 방영되는 드라마 속의 달자씨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기까지 한다.

그래, 이 분야의 문제들은 이미 충분히 화자되고 있구나. 몹시 뜨거운걸. 하는 생각이 다시 확인되었다.

 

남자가 어쩜 이렇게 여자의 심리를 꽤뚫고 있을까로 시작된 감탄은 끝으로 갈수록 기세가 약해진다.
'이미 충분히 여자들 사이에서 얘기되어 지고 있는걸 관심없어 하는 남자들이 대부분인게 세상이야. 그걸 편견없이 들여다보려는 자세를 갖춘 남자가 있다고 해서 그리 놀랄필요는 없어. 적을 뿐이지 충분히 그럴법도 하잖아. 어쨌든 여자는 남자만큼이나 머릿수가 많으니까.'
오쿠다 히데오는 들여다보려는 자세를 갖춘 남자다. 그는 젊고 재기발랄한 글을 쓰는 일본 작가다. 요즘 인기를 끌고 있고, 그럴 자격이 충분한 재밌는 책들을 쓰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공중그네의 심리치료는 석연치 않았다. 왜그랬을까? 걸도 석연치 않았다. 즐겁고 공감가고 놀랍고 유쾌하고 날카롭지만 어딘가 석연치가 않다.

 

왜냐하면 오쿠다 히데오의 스타일은 하나도 새롭지 않으니까.
그의 세상은 명료하다. 모든 아픔엔 치유가 있고 문제엔 깨달음이 있고 난관은 극복되어진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지친 마음이 위안을 받는것은 사실이다. 나는 위안이 절실한 현대사회의 한 개체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명료하지 않다. 사실 앞에 구구절절 떠들어 놓은 것처럼 모든 일에 인과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거창한 이유를 붙여가며 '그래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따위의 나레이션을 깔수 없다.
나에게 성숙은 어느날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을때 지난날의 내가 지금으로썬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양일때 갑자기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하나 계단을 밟듯 모든 문제가 맞춤표를 찍으며 앞으로 나아가지지 않는 삶이다. 그런 나에게 이런글은 너무 이상적이다.

 

약간의 석연찮음은 바로 이거였을까?
나는 책을 읽는 마음 그대로 걸을 읽어내렸다. 더도 덜도 말고 딱 책을 읽는 느낌 정도로만, 아 참 재밌는 책이였다. 그녀들이 맞서는 문제에 내 경험들을 비추어보며 통쾌함을 느끼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며, 혹은 나와 다른 입장에 서 있는 그녀들이 힘내는 모습을 보며 응원도 하고 그래, 재밌게 보았다.

 

그리고 끝.

더이상의 여운은 없다. 이미 이런 스타일에 할당된 여운은 이전에 만난 다른 작품들에게 모두 소비해버렸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오쿠다 히데오는 전형적인 트랜디 작가로 보인다. 이슈화되고 있는 문제들에 바람을 주입해 마음 먹먹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만드는 솜씨, 적당히 살을 붙이고 양념을 쳐서 이야기를 뽑아내는 재주, 그런 이야기꾼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나와 오쿠다 히데오는 궁합이 잘 안맞는 모양이다.
뭐 괜찮다. 누구든 모든 작가들에게 친한척 하며 살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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