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이야기 1
미하엘 엔데 지음, 차경아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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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일은 영원히 그렇게 계속되리라. 사물의 흐름 속에서는 변화라는 것이 실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오로지 소년만이, 바스티안만이 그 흐름에 끼여들 수 있었다. 그리고 소년은 이 순환 속에 갇혀 있지 않으려면 그 일을 행해야만 했다. 소년에게는 이 이야기가 벌써 천 번은 되풀이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그것에는 전(前)도 후(後)도 없고 모든것이 영원히 거기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제 소년은 노인의 손이 왜 떨렸는지 이유를 알았다. 영원한 반복의 쳇바퀴는 끝없는 끝이었다.
 
[끝없는 이야기 -미하엘 엔데-]
 
간혹 믿음을 보류해 둬야 하는 꿈들이 있다.
 
삭막한 생활에 젖어들며 모든 환상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행위다. 누구도 자신을 그토록 학대할 자격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가 않아서 이미 우리의 아이들은 듣고 보고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살해되어 껍데기만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연하단 듯이 그들의 순수는 상실되어간다.
 
미하엘 엔데는 그들을 위해 눈물로 책을 빚었다. 그 눈물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않은 것이라 더욱 이채롭고 영롱하다. 아마 그는 모든 아이들에게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은 그에게 바스티안이였다.
 
내가 다니던 국립 중학교는 2학년이 되던 해부터 부쩍 도서관에 힘을 주었다. 제일 구석에 있는 교실 하나에 간판 달고 책 몇권으로 구색을 갖췄으니 충분히 중학교 도서관 스러웠으나 그 해부터 교육 정책이 바뀌기라도 했는지(내가 학생 딱지를 달고 있는 동안에만도 몇번이나 바뀐 교육청의 정책이란 것은 이미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매달 수십에서 수백권의 책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갈때마다 새로 온 책들이 포장도 뜯지 않은채 바닥에 쌓여 있었고 매번 내가 기억하던 위치에 새로운 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곳은 내가 첫번째로 만난 신천지였다.
 
당시는 그야말로 탐독인 동시에 무한 소비의 시절이였다. 무수한 책을 읽어 댔지만 사실 기억에 남아있는건 반에 반도 안된다. 그때의 나는 엉성한 거름망처럼 읽는 족족 그냥 통과시켜 버렸다. 책의 내용 보다 단지 글짜를 읽는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겨진 몇 가지는 나에게 있어 절대적이기까지한 가치를 얻었다. 맘에 들지 않는 부분엔 가차 없더라도 맘에 드는 것에는 지금보다 더 쉽고 순수하게 몰입했던 탓이다. 
 
그렇게 내 마음속을 파고 들어 이후의 독서편력에 지표처럼 자리한 책이 있다.   
끝없는 이야기. 말 그대로 끝없이 되풀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였다.
 
문예 출판사에서 두권 짜리로 나왔던 끝없는 이야기의 초판은 무려 1979년이다. 작년에 비룡소에서 한권 짜리로 다시 나온 모양이지만 번역이 조금 거칠더라도 내 기억속에 책장을 더듬는 편이 훨씬 좋기에 주저 없이 구판을 구입했다. 사실 극구 구판을 고집한 이유는 현실과 동화세계를 글씨 색으로 나눈 독특한 편집 때문이였다. 현실은 갈색, 환상계는 청록색이였다. 
 
용기 없는 한 소년이 환상계를 위험에서 구해내고 두려움에 맞설 줄 아는 진짜 어른으로 (정신적인)성장한다는 지극히 단순 명료한 줄거리 구조를 가진 책은 실상 그리 만만치가 않다.
아이러니 하게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환상이며, 꿈이며, 의지며, 긍지며, 믿음이라는 것을, 자꾸만 쉽게 바닥을 지워버리는 어른들을 위해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좋아, 너희들이 그 안으로 들어서면 그것은 너희들에게 달라붙는다.
그 무(無)가 말이야. 너희들은 일종의 전염병이 되는거야. 그리고 그 병으로 인해 인간들은 겉보기와 진실은 수별할 수 없이 장님이 되는 거야. 그곳에서 너희들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니?"
 
"몰라" 아트레유는 소곤거렸다.
 
"거짓말이라고 부르지!" 그모르크가 짖어댔다.
 
아트레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년의 입술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어떻게 그럴수 있을까? 믿지 않는 꿈과 동화속 이야기는 거짓말일 뿐이다. 미하엘 엔데가 만들어낸 환상계의 피조물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無)가 환상계 전체를 잠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어렸을때는 요정이나 도깨비를 믿었다는 사실마저 망각하기 전에, 그들의 여왕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할 존재를 찾는다. 누구보다 확고한 신념을 고수할 수 있는 구원자. 주인공 바스티안은 책 저편에서 그들의 혼란과 긴 여정을 갈색 글씨로 바라보고 있다.
 
주체적이지 못한 겁쟁이였을 뿐인 소년은 책임과 두려움을 마주하는 용기를 배우고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메세지를 책 너머의 우리에게 전한다.
 
"사람들 중에는 영원히 환상계로 못 가는 사람들이 있단다." 코레안서 씨는 말했다. "또 갈 수는 있지만, 영원히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도 있어. 그리고 환상계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거야. 바스티안 너처럼. 이런 사람들이 양쪽 세계를 건강하게 만든단다."
 
천 페이지가 넘는 기나긴 이야기를 마치고도 미하엘 엔데가 숨을 고르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하라. 제목처럼 끝없는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지금이야 이런류의 전개가 흔하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상상력의 발아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포기 하지 않는 한 영원히 다른 모습으로 반복되는 동화와 환상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같이 딱 맞아떨어지는 결말은 없다.

모든 이야기가(소설과 영화와 노래와 구전이) 스스로의 생동력을 가지고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믿음은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에서 비롯되었고 아직까지 유효하다. 내가 퍽퍽한 삶에서 힘을 얻는 모든 주전부리들은 그래야 한다. 추상적일지라도, 살아있어야 한다. 절대 잊혀져선 안된다. 끝없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펄펄 살아 날뛰고 있었다.

그렇게 미하엘 엔데는 닥치는 대로 읽던 내게 절대적인 기준 하나를 심어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커서 다시 읽는 그의 책은 그때와 같은 감동을 주진 않았다. 이미 많이 녹슬고 무뎌진 나의 천칭이 현실 쪽으로 더 많이 기운 까닭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리 없다. 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미하엘 엔데가 보여주는 세상을 터무니 없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늦게나마라도 잃어버린 꿈을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속는 셈 치고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아이들보다 뻔히 눈에 보이는 것도 거짓이라 믿어 버리는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이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이미 자유를 상실해버린 어른들은 더이상 동화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미하엘 엔데의 또 다른 책 [모모]가 더 걸맞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끝없는 이야기보다 인지도가 높은 모모는 좀 더 나이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의 눈 높이에 맞춰 똑같은 주제를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이미 새로운 세상을 창조해내는 방법을 잃어버린 어른들이 다시 환상의 세상으로 들어가려면 길을 안내해 줄 모모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고 다른 기회에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다.
-Ende-     

우리는 어린 시절 창조해 냈던 그 멋진 세상을 잊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한다.
대다수 사람이 커가며 잊어버리는 사실일지라도 잊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는 영원히 크지 않는 어린이거나, 어른이 아님에 분명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이라는 숫자로 규정지어지는 것이 아님에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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