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의 비밀
요슈타인 가아더 지음, 백설자 옮김 / 현암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지요, 친애하는 주인님. 나는 내 존엄성을 찾기 위해 주인님을 죽일수밖에 없겠지요.'

 

한때는 이 밉상맞고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커이고 싶었다. 삐딱한 생각으로 사람이든 신이든 가리지 않고 파괴해대는 조커이기도 했다. [카드의 비밀]은 꽉막히고 편협한 사고에 사로잡힌 꼬마였던 내 유년시절에 큰 획을 그은 작품이다. 그 작은 머리통에 무수히 많은 질문의 시작을 끊어준 책이였다.

 

나의 스승 가아더는 철학이 철학의 계보나 철학자들의 사상을 줄줄 외워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말이지 먹고사는 것과 하등 상관 없는 사치스러운 질문들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왜 중요한지 말한다. 그렇기에 한번도 만난 적 없는 할아버지 요슈타인 가아더는 휘몰아치던 십대때부터 나의 철학 선생님이다. 또 나를 매료시킨 나만의 영웅이기도 하다. 현명하고 빛나는 문장들은 멋모르던 꼬마를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아아.. 요슈타인 가아더! 나는 아직도 이 이름을 들으면 심장이 뛴다. (내 안에 황금관을 쓰고 앉아있는 작가들은 가아더 외에도 몇있다. 기회가 된다면 이들에게도 다시금 시간을 할애할 작정이다.)

 

사실 [카드의 비밀]은 가아더와의 첫만남이 아니다.
당시 중학교 도서관에는 가아더의 다른 작품들이 많았고 역시 가장 유명했던 것은 [소피의 세계]였다.
길고 긴 그 책의 절반은 도덕책의 확장이나 다를바 없었다. 그야말로 수업을 듣는 것 같은 설명조의 문장들의 행렬이였다. 주인공 소피의 일상과 그 아이를 둘러싼 수수께끼가 마음을 사로잡아 지루한 수업을 참아넘기게 했지만 썩 즐겁게 읽은 책은 아니였다. 맞다. [소피의 세계]에서 가아더는 심술을 부렸다. 심술을 부릴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길 바랐지만 그보다 먼저 이 땅에 살았던 훌륭한 조커들의 사상들도 기억하길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가아더는 [소피의 세계]의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부분을 꾹꾹 참았다가 마지막에서야 풀어놓았다. 끝까지 읽고서야 진가를 알 수 있는 책이라니, 그러기엔 심술궂게 많은 분량이였다. 그리고 이제와서야 느끼지만 너무 멋지게 철학사를 소설로 풀어 놓았었다.

 

좌우간 지금 말하고자 하는 책은 [소피의 세계]가 아니다. 사설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가아더가 [카드의 비밀]주인공 한스가 여행에서 돌아와 읽을만한 책이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소피의 세계]를 썼기 때문이다. 가아더는 자신이 창조한 아이들과 직접 소통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린아이는 존재에 경의로움을 느끼는 능력을 타고나기 때문에 스무살에 철학책을 읽는 것은 너무 늦다고 말한다. 이 능력은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잃지 않도록 유지시켜주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정말이지 나는 이 작가가 너무 좋다. 아이들에 대한 이 작가의 애정이, 그 작은 눈에서 배우고자 하는 겸허한 태도가 좋아 미칠것 같다.

 

결국 순서는 뒤집어 졌지만 그래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카드의 비밀]을 먼저 읽었다면 치기어린 마음에 [소피의 세계]는 눈에 차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저울에 두 작품을 달고자 한다면 우열을 가릴 수가 없지만 재미라는 면에서 [카드의 비밀]은 가아더의 다른 모든 작품들에 비할바가 아니다. 근원적인 질문과 사색, 무수한 상징성으로 가득 찬 [카드의 비밀]은 '내가 조커임을 잊어선 안된다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있지 않은가. 조금씩 물들어 결국은 세속적인 다른 카드들과 같아지길 바라지 않는다. 내 안에 날을 벼려라. 가아더가 이 책을 통해 나에게 전해준 가르침이다. 아이들이 본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책이지만 어쩌면 이미 익숙한 것을 당연히 여기는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책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스스로가 여기는 것만큼의 손톱만큼도 똑똑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가아더는 조커를 자칭하며 매일 아침 펑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한스의 아버지가 아닌 (아직 발아하지 않았지만)선천적으로 삶에 대한 경의로움을 발견할 재주를 타고난 한스를 주인공으로 정했을 것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었지만 잃어버린 재주..무관심하지 않는 법. 한스는 놀라운 사건을 경험함으로 잠시 잊었던 이 재주를 발전시킨다. 그 사건에 대해선 비밀, 당연히 줄거리에 대해서도 비밀, 요즘 너도나도 달고 나오는 반전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단 사실이 마음이 미어지지만 [카드의 비밀]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있다! 아.. 이 선전문구 같은 문장이라니, 하지만 역시 줄거리는 하나라도 누설되어선 안된다. 결국 뜬구름 잡는 소리밖에 늘어 놓지 못해 이런 서평을 이 책에 달아야 하나, 이 정도밖에 못쓰나 하는 자괴감이 들지만 그래도 역시 추천하고픈 책이기에 비루한 글을 써내린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에 만나는 모든 사람의 손을 잡고 '읽고 감상을 들려주라' 청하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나는  남들과 다른 사고를 하고 존재의 본질을 의심하는 조커가 되고 싶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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