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 키린의 편지 - 삶을 긍정하는 유연한 어른의 말 키키 키린의 말과 편지
NHK <클로즈업 현대+>·<시루신> 제작부 지음, 현선 옮김 / 항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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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편지를 받는 일은 정말 기쁘다. 손 편지의 수고로움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문자, 전화, 이메일이 전할 수 없는 온기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할까. 그런데도 정작 손 편지로 답장을 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손글씨가 엉망이라는 어이없는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말이다. 귀찮기도 하고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특정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오롯이 그를 생각하며 글을 쓴다는 일. 그건 어렵고도 즐겁다. 나에게서 시작해 당신이라는 단 한 사람에게 닿은 글이라니. 그런 점에서 배우 키키 키린이 쓴 편지는 더욱 남다르다. 유명 배우가 단순한 팬에게 형식적으로 고마움을 전하는 편지가 아닌 고민을 들어주고 그것을 함께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편지였기 때문이다.

『키키 키린의 편지』는 키키 키린이 타계 후 그녀를 추모하는 방송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키키 키린이 많은 일반인에게 많은 편지를 남겼다는 걸 알고 편지를 받은 이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하면서 그녀의 편지를 모은 글이다. 유명 배우가 일반인에게 편지를 쓰게 된 과정은 무엇일까. 편지를 받은 이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암 투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노년의 배우, 그녀의 보낸 편지의 내용은 어떨까. 만약 내가 연예인에게 편지를 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책을 읽기 전에는 막연하게 이런 점들이 궁금했다. 막상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배우 키키 키린이 아니라 인간 키키 키린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더 듣고 싶어졌다.


방송 제작진이 만난 이들은 무척 다양했다. 그만큼 키키 키린이 교류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왕따 근절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부터 영화의 모델이 된 한센병 환자인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 성년의 날을 맞은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개인적인 친분과 업무에 관련된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쓴 내용이 없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뻔한 글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담긴 진솔한 것이었다.

책에는 청년들에게 보낸 편지가 가장 많았는데 그 가운데 이런 편지가 특히 좋았다. 취재 과정에서 편지를 받은 당사자는 키키 키린의 편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있다가 편지를 찾아 읽었는데 현재 자신의 상황과 잘 맞는 내용이었다. 장래 희망이 없는 청년에게 “장래 희망이 비어 있더군요. 나는 우연히 열여덟에 배우가 되었는데 육십이 넘어서야 겨우, 앞으로 연기자를 목표로 삼기로 했어요. 난 좀처럼 입을 잘 열지 않는 아이여서 말하는 게 익숙지 않았는데, 그게 오히려 타인의 말을 듣는 귀를 키워줬어요. 단점을 장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제 특기죠.” (본문 중에서)

그리고 늦게나마 청년이 키키 키린에게 보낸 답장도 같은 맥락이다. 처음에 읽었을 때는 그녀의 의도와 진심을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 알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꿈이나 목표는 자주 바꾸면 안 되고 늘 그것을 향해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읽으며 꼭 평생을 걸 만한 꿈이나 목표가 없더도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유연한 태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표가 작거나 꿈이 좀 엉뚱해도 괜찮다는 걸 알아서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본문 중에서)

편지를 주고받는 일은 이처럼 마음이 오가는 것이다. 키키 키린의 편지를 받은 이들이 그녀와의 짧은 만남을 추억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도 키키 키린에게 보내는 답장이자 세상을 향한 내밀한 고백이었다. 영화 <앙> 촬영을 위해 키키 키린이 모델로 한 한센병 환자인 여성이 취재진에게 들려준 이 말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니 특별히 뭐가 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거야.” 은 그래서 아름다운 여운과 진한 감동으로 남는다.

키키 키린이 마직막으로 쓴 편지라 할 수 있는 짧은 글도 마찬가지다. 병원에 입원한 상황에서 일 관계자에게 보낸 편지다. “가느다란 실 하나로 겨우 이어져 있네요. 말 한마디 안 나와서 힘들고 곤란한 노파입니다. K.KIKI” 인생의 끝을 곁에 두고 자신이 직접 모든 일을 처리하려는 그녀가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진짜 어른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막연하게 내가 되고 싶었던 대범한 어른이 바로 이런 사람이 아닐까. 그러니 그녀를 아는 모두가 그녀를 사랑하고 기억할 것이다. 그저 배우로만 알고 있었던 나에게도 그녀와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친근하다.


“죽는다는 건 타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떠난 사람을 내 안에서 계속 살아가게 하는 일” (키키 키린 지인의 말,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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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3-04 1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손편지 쓰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 없는데, 문방구가면 여전히 편지지 매대가 있어서 그래도 누군가는 여전히 손글씨로 전하는구나 궁금해하거든요. 키키 키린같은 ˝연결되려는˝ 분들이신가봐요^^

자목련 2021-03-05 11:1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는 잊고 있던 물건들을 보면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사용하는 소중한 것이구나 싶어요. 연결되려는, 이 말 좋으네요. 얄라 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