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여행.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아름다운 경치도 보고 싶고, 술 마시고 그 자리에 큰 대자로 뻗어 쿨쿨 자고 싶다. 그것은 당연한 욕구다. 하지만 그뿐일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비일상'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비일상'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의 일상, 평소에는 볼 일 없는 타인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을 보든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법. 평소에는 환기되지 않는 기억을 찾아 우리는 여행을 한다. '자기 자신을 다시 생각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모두 내가 싫어하는 말이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과거를 되찾기 위해 여행한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에게 마침 적절한 조건이 주어졌다. 십수 년 전의 시간과 자기 자신을 환기시켜 주는 멤버, 좀더 깊이 사색하기에 안성맞춤인, 속세와 단절된 목적지. 그러므로 나는 우리 본연의 모습인 '아름다운 수수께끼'를 탐욕스럽게 구하고 그 내면에 몰두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바다.

각자의 이야기.를 지닌 네 명의 대학동창들 리에코, 아키히코, 마키오, 쎄스코. 는 졸업한지 십수년이 지나 Y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상권에서는 리에코.와 아키히코.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야기는 ( 다행히!) 시간순.이지만, 전작에서 환상과 현실을 오가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렸다면, 이번에는 과거와 현실이 경계없이 오가며 읽는 이를 헷갈리게 만든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과거'를 찾는 '아름다운 수수께끼'( 과연?) 를 푸는 여행인 것이다. 그들이 여행하는 Y섬. 책에 묘사되는 그 곳을 상상할때 내 머리 속에는 딱 '반지의 제왕'의 엘프계. 가 떠올랐다. 그와 같이 비현실적인 곳에서 '여행'을 만끽하며( 온다 리쿠.는 이와 같은 말그대로 몽환적인, 회상적인 글을 쓰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대적인 대사들을 담고 있다. 반칙이야!) 그들은 일상에서 벗어나 과거.를 돌아본다. 묻어 놓았던 진실들을 깨운다.

아기자기 소소한 수수께끼들로 시작된 이야기.는 리에코.를 지나 아키히코.로 가면서 점점 커다란 하나의 비밀.의 결말을 향해 숨가쁘게 치닫는다.

이 소설의 기가막힌 점은 바로 그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리에코 부분 150여페이지가 넘도록 ( 이 책 고장 350페이지 정도다) 등장인물의 남녀구분도, 각각의 등장인물들도 헷갈리며, 소소하고 자질구레한 수수께끼들을 등장인물들과 함께 풀어나가다가,  드디어 네 명의 등장인물들의 성격에 대해 파악하게 되면서, 클라이막스.로.

아직 하권이 남았다. 마키오와 쎄스코편.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을듯한 마키오. 가 3부고, 온다리쿠 스러운 반전을 보여줄법한 쎄스코.가 4부다.

기대된다. 잠시 졸다가 깬 새벽 두시 좀 넘은 시간, 언제 띄염띄염 읽었냐는듯이 단숨에 읽어내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지금부터 (하) 권으로 들어가면... 좀 늦은( 혹은 이른) 시간이긴 한데 말이다.

온다 리쿠 이 작가. 정말 재미있게 글을 쓰는 작가이다. 처음에 '밤의 피크닉' 이 나왔을때, 왠지 시시해 보이는 줄거리에 사 놓기만 하고 아직 못 읽고 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 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며, 뭐, 그 정도는 아닌데. 생각했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 이후에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 가 나오고, 이 책 '흑과 다의 환상' 이 나오고, 또 그 책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근간'으로 포진하고 있다.

'빛의 제국' 도 재미있었지만, '삼월은 붉은 구렁을' 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 이야기. 는 정말 재미있다. 마냥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 시리즈.를 읽다 보면 끊임없이 기시감을 느끼게 되고, 분명 어디서 읽었는데, 어디였더라, 형편없는 기억력에 머리를 쥐어 뜯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반복되는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항상 새로운 이야기.로 독자에게 다가서야 할 작가.가 이렇게나 같은 인물들을 우려먹다니, 태만한거 아닌가. 하는 딴지도 슬쩍 걸어보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뿌리에서 나온 이야기.로 이렇게나 같으면서도 다른 이야기로 가지.를 치다니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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