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의 심리 치유 에세이


5. ‘보이지 않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라








콤플렉스는 참 변화무쌍하다. ‘나쁜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때로는 좋은 역할을 하고, 이제는 드디어 사라졌구나 싶으면 뭔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해서 우리를 괴롭힌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실은 말하기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말하기가 싫어서 글쓰기로 도피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선 처리는 물론 목소리 강약을 조절하는 것도 어려웠기에, 나는 무대공포증을 피해 조용히 글 쓰는 삶을 선택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자꾸 말할 일이 생겼다. 여기저기서 온갖 종류의 강의를 해야 했고, 글을 쓰기 전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어, 이게 아닌데!’ 싶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내 글이 사랑받을수록 내 강의도 ‘출동’을 요구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가끔은 말하기가 글쓰기보다 더 행복한 일이 아닐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말을 들어 주는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빛이 아름다웠다. 독방에서 원고를 쓸 때는 결코 확인할 수 없는 독자들의 생생한 반응을 오감으로 느끼며 ‘이것이 바로 말하기의 기쁨이구나!’ 감탄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콤플렉스와 대화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콤플렉스를 꽁꽁 숨겨 두기만 하면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나에게 이러저러한 콤플렉스가 있다고 고백하는 순간 이미 치유는 반쯤 시작된 것이다. 나는 스스로 ‘말주변이 없고 어눌하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본의 아니게 말하기 훈련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말을 잘한다.’는 뜻밖의 칭찬을 듣

기도 한다. 그때마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지만, 다행히 이제는 말하기가 예전만큼 두렵지 않다. 엄청난 말하기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내 분위기, 내 성격에 맞는 나만의 말하기’로 밀고 나가면 된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말하기의 이상형’을 세워 놓고 따라 하려면 식은땀부터 흐르지만, 그냥 부족한 대로, 울퉁불퉁한 대로, 그리고 본연의 나 자신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신기하게 마음이 편해진다. 콤플렉스와 대화하는 삶이야말로 내면의 성숙을 위해 꼭 필요한 마음의 문턱이었던 것이다. 융은 말한다. 우리가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콤플렉스가 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내가 콤플렉스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콤플렉스가 나를 조종하게 내버려 둔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바로 그 강력한 콤플렉스가 한 젊은이의 인생을 완전히 파괴시켜 버리는 비극이다. 이 이야기의 독특한 점은 ‘우월감도 콤플렉스의 일종’임을 흥미롭게 보여 준다는 것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외모가 대단하다는 것을 잘 몰랐다. 불세출의 화가 바질이 그의 초상화를 그려 주기 전까지는, 그 초상화를 쾌락주의자이자 염세주의자인 헨리 경이 극찬하기 전까지는. 자신을 그리스 신화의 아도니스급 으로 숭배하는 바질이 심혈을 기울여 그린 초상화를 통해 그레이는 자신의 외모가 국보급임을 깨닫는다. 현대판 나르키소스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도리언 그레이는 이제 자신만을 사랑할 뿐 그 누구도 진정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에 언어의 마술사인 헨리 경이 비평의 기름을 붓는다. “미(美)는 천재성의 일종이야. 실은 천재성보다 더 위대한 것이 바로 미야.” “미는 그 미를 갖춘 사람을 절대군주로 만들지.”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유혹에 굴복하는 거야.” 헨리 경은 그레이를 쾌락주의로 이끌며 ‘찰나의 젊음’과 ‘곧 사라져 버릴 아름다움’을 즐길 수만 있다면 뭐든 해도 좋다고 부추긴다.










순박한 청년 그레이에게 헨리 경은 ‘자기 예찬’이라는 밑빠진 독을 선물하고 만다. 그레이는 부모 없이 외롭게 자랐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헨리 경을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삼아 버

린다. 급기야 그레이는 지금까지 늘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거울 속 아름다움이 이제 곧 사라질 것임을 절감하면서, 끔찍한 소원을 발설해 버린다. “초상화의 저 완벽한 얼굴이 내 것이 되고, 얼마 못 가 늙고 추해질 진짜 얼굴이 초상화가 되었으면!” 그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통째로 내주겠다고 말하는 그레이를 바라보며 독자의 가슴은 오그라든다. 이렇게 현대판 파우스트가 탄생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완벽한 지성을 위해영혼을 팔았지만, 도리언 그레이는 완벽한 미모를 위해 영혼을 판 셈이다.


놀랍게도 그레이의 얼토당토않은 소원은 이루어진다. 초상화 속 얼굴은 그가 나쁜 짓을 할 때마다 점점 추악하고 야비하게 바뀌어 가고, 살아 움직이는 그레이는 완벽한 방부제 미모를 과시한다. 현실과 환상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그레이는 그때부터 자신의 미를 인간관계에 이용하기 시작한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더욱 적극적으로 과시하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유혹하여 쾌락에 빠지게 하며, 마약에까지 손을 뻗친다.





오스카 와일드





쾌락이 있는 곳에 그레이가 있다. 그리고 그레이가 있는 곳에 파멸이 있다. 그레이와 함께 쾌락에 도취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중독이나 자살 같은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마흔 이후에는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속설에는 살아온 속사정이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믿음이 깃들어 있다. 그레이는 그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기에, 끝없는 쾌락과 사악한 충동을 실현하며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다.


무의식에 도사린 콤플렉스, 그리고 겉으로 보이는 성격인 페르소나와의 거리감을 어떻게 조정하느냐에 따라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건강한 사람은 결핍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 ‘모자라면 어때, 이게 바로 나야.’ 하고 웃어넘길 줄 안다. 자신의 그림자를 돌보지 않는 사람, 콤플렉스와 페르소나와의 거리를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곧 자기라고 생각해 버린다.










바질과 헨리를 만났을 때 그레이가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의 찰나성과 허무를 깨닫고 더 깊고 넓은 잠재력을 찾으려 노력했다면, 그의 삶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그레이의 삶에는 참으로 소중한 인연들이 많았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 준 여배우 시빌의 지고지순한 애정을 받아주었다면 그레이는 타락을 멈추고 참다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바질이 그의 문제점을 알고 잘못을 일깨워 주려 했을 때, 그를 잔혹하게 죽이지 않고 그의 조언을 들었다면 그레이는 그때부터라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레이에게 앙심을 품은 시빌의 동생이 그를 죽이려 했을 때 용서를 빌었다면, 다시 새 삶을 시작하려 애썼다면 그의 삶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직 쾌락과 도취, 승리와 정복의 욕망에 길들여진 그의 신체는 말초적인 향락에만 반응할 뿐이다. 내적 깨달음이 주는 느리고 오래가는 기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우월감’이라는 콤플렉스에 도취되어 고개를 숙이고 잠시 타인의 조언을 경청해야만 들리는 삶의 진실을 듣지 못했다. 점점 추악하게 변해 가는 초상화가 바로 내면의 그림자였음을 감지했다면, 그는 자신의 그림자를 돌보는 것이야말로 멋진 인생의 시작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내 무의식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까지 네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니? 얼마만큼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니? 무의식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던 나의 콤플렉스는 내게 속삭인다. ‘남들에게 보이는 시간’보다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고. 강의하고 글 쓰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나를 표현하는 시간도 좋지만, 조용히 나를 돌아보고 한없이 공상에 빠져 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아직은 나보다 내 무의식이 더 똑똑한 것 같다. 다행히 나는 내 무의식의 조언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나’를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내게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마음챙김의 시간이다.












다음 주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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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의 심리 치유 에세이


4. 글을 쓴다는 것의 의미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못 말리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보상심리다. 결핍이나 고통을 겪고 나면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본성은 수많은 폐해를 낳는다. 스트레스로 인한 쇼핑 중독에서부터 자신의 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으로 공격적인 행동을 일삼는 나폴레옹콤플렉스(Napoleon complex)에 이르기까지, 보상심리는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내게는 어떤 보상도 없지’라는 내면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모든 행동으로 확장된다. 작은 키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받기 위해 수없이 전쟁을 치르고 결국 황제 자리에까지 오른 나폴레옹처럼, 보상심리는 역사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종말은 참혹하지 않았는가. 왜곡된 보상심리의 끝은 언제나 ‘보상받기 전보다 더 못한’ 상태로 추락하는 결말일 때가 많다. 개인을 넘어 집단 차원에서 일어나는 보상심리는 과거에 대한 일그러진 향수를 낳기도 한다. ‘그때가 제일 좋았지, 그 시절로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식의 ‘고달픈 현재’에 대한 집단적 보상심리가 과거의 독재정치를 미화하는 방향으로까지 치닫기도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도 끝나지 않는 보상심리의 수레바퀴가 되기 쉽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에게 투사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가. ‘내가 좀 더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면 내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자녀에게 공부뿐 아니라 온갖 취미나 교양 등의 각종 사교육을 습득하게 하고, 아이들이 힘들다고 짜증을 내면 ‘이게 다 널 위한 거야.’라고 주장하는 부모들. ‘내 인생은 이렇게 되었지만 너는 그렇게 살면 안 돼.’라는 생각 때문에 자녀에게 공부뿐 아니라 온갖 인생의 행로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 부모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일그러진 보상심리를 보여 준다.


장남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충족하지 못한 부모들이 둘째, 셋째에게 ‘형이 해내지 못한 것들’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보상의 수레바퀴는 본디 ‘끝’이 없어서, A에게서 이루지 못한 욕망을 B로 채우려는 심리는 B에서 C로, C에서 D로 끊임없이 전이된다. 이 끊임없이 결핍을 느끼는 자신의 내면에 문제가 있는데도, 정작 당사자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박완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등장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도 바로 이런 보상심리가 충족되지 않아 끊임없이 갈등하는 두 모녀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갔다면 살려낼 수 있었던 남편이 시골의 열악한 의료 환경 때문에 일찍 죽었다고 생각하는 엄마. 엄마는 딸만은 서울에서 남 보란 듯이 ‘신여성’으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에 홀로 된 며느리의 급작스러운 서울행을 뜯어말리는 시부모를 뒤로한 채 서울로 향한다. 문제는 엄마의 이런 독단적인 행동이 딸인 ‘나’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다.


자신의 외모 중에서 가장 자신 있었던 삼단 같은 머리카락을 엄마는 딸의 의사도 묻지 않고 그야말로 ‘싹둑’ 잘라 버린다. “서울 아이들은 다 그렇게 한다.”는 게 이유다. 본인의 의견도 묻지 않고 딸의 머리 모양을 느닷없이 상고머리로 만들어 버린 엄마의 행동은 ‘나는 내 딸을 서울로 데려갈 테니 시부모님은 말리지 말라.’는 강력한 의사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딸과 아들을 데리고 천신만고 끝에 정착한 서울은 결코 엄마의 보상심리를 제대로 채워 주지 못한다.











‘나’는 고향 박적골에서는 부족한 것 없이 그야말로 풍요롭게 자랄 수 있었지만, 서울 현저동에서는 가족이 빈곤층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골에서는 조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연이라는 풍요로운 보물창고로 인해 부족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딸을 ‘좋은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해 주소까지 속인 엄마의 모습을 보며 혹시나 자신의 진짜 주소를 아이들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하는 소녀가 되어 버린다. 서울로 올라간 것도 엄마의 뜻,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로 주소까지 속여서 보낸 것도 엄마의 뜻이었기에 딸의 가슴에는 원망이 쌓이기 시작한다. 엄마의 가슴속에 콕 박힌 그 ‘서울 지향성’과 ‘신여성 콤플렉스’가 딸에게는 고향의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상실감을 초래한 것이다.


‘나’의 오빠 또한 어머니의 보상심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일찍부터 가장이 되어야 했던 오빠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린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한국전쟁이 터진 뒤 오빠가 포탄에 다리를 다치고 서울에서 유일한 의지처였던 숙부마저 돌아가시자 온 집안은 쑥대밭이 된다.





1951년 1월 피란민 행렬





그토록 북적이던 서울이 이제는 완서네 가족만 남고 텅 비어 버린다. 모두가 피난을 가 버린 것이다. 다리를 다쳐 꼼짝 못 하는 오빠와 이제 해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올케까지 있으니 피난조차 여의치 않다. 착하고 모범적이었던 오빠는 갑작스러운 전쟁과 자신의 부상으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고, 그렇게 강인하고 씩씩했던 어머니마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서울’과 ‘신여성’을 향한 엄마의 꿈은 이렇게 끝이 나는 걸까. 아들이 다리 부상 때문에 가장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자 어머니의 보상심리는 이제 온통 딸에게 쏠리게 된다. 


이렇듯 보상심리가 폭발하는 순간은 바로 치명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다. 지금까지 집안에서 귀염받는 막내이자 늘 결국에는 어른들의 보호를 받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렀던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억눌린 세월을 한꺼번에 보상받기라도 하듯 새로운 가장의 지위에 올라선다. 모두가 피난 가 버리고 텅 빈 저 빈집들을 다 털어서라도 이 늘어난 대가족을 어떻게든 먹여 살려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샘솟기 시작한다. 그녀는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던 서울이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그 순간의 충격 속에서 바로 일생을 뒤흔드는 중요한 결심을 한다.









‘바로 이 순간을 기록하는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열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커다란 도시에 오직 우리 가족만 남았다는 것, 이 거대한 폐허를 보는 것이 나 혼자뿐임을 깨달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 그 예감으로 인해 공포를 이겨낼 수 있었다는 ‘나’의 고백은 언제 읽어도 뭉클하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고.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시골’과 ‘구시대의 여성’이라는 울타리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엄마의 보상심리는 기대만큼 충족되지 않았지만, 전쟁으로 인해 촉발

된 그 모든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의 방법을 ‘작가의 길’에서 찾은 딸의 지혜로 이 이야기는 뜻밖에 해피엔딩을 맞는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 모든 슬픔과 고통마저도 아름다운 이야기의 소재로 만드는, 모든 끔찍한 불행에 대한 정당한 복수의 길이었다.


보상심리의 한계는 자기 내부의 치유 능력을 상실하고, 상처의 진통제를 자기 바깥에서만 찾으려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노력과 인내로 얻어낸 명예조차 때로는 위태롭게 무너져 내리는데, 하물며 잘난 자식을 통해 얻어낸 의존적 자긍심이라면 얼마나 허약한 모래성일까. ‘이게 다 널 위한 거야.’라며 자녀의 인생을 ‘사랑’이라는 이름의 가혹한 쇠사슬로 옭아매지 말자. 모성애 또는 부성애의 탈을 쓴, 답답한 자기 인생에 대한 일그러진 보상심리가 ‘부메랑키드와 헬리콥터맘’의 영원한 애증관계를 만든다. 부디 엄마들이여,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 것을 아들딸에게서 받아내려 하지 말자. 우리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인생 내부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때로 ‘사랑’이란 이름의 올가미는 지독한 보상심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













다음 주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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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 2018-02-03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매력적인 기획이라고 생각해요 ...읽고 싶어져요
 

『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의 심리 치유 에세이


3. 내 영혼의 숨은 그림자를 사랑하라




심리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




당신이 가장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라. 주저 없이, 생각나는 대로, 사람과 사물과 감정과 상태를 가리지 말고 마음껏 나열해 보라. 그런 다음 왜 싫은지, 왜 미운지, 왜 혐오스러운지를 낱낱이 적어 보라. 그것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조용히 낭독해 보자. 그러면 알게 될 것이다. 당신 안에 도사린 그림자의 실체를. 인생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둠 속을 헤맬 때 조용한 길벗이 되어 준 심리학자 융은 내게 그렇게 다가와 속삭이는 듯했다. 


융의 『인간과 상징』을 읽은 후에 나는 실제로 그런 글을 써 보았다.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을 헤아리며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는 나만의 리스트를 적어 보았다. 시작할 때는 ‘외부의 살생부’였는데 끝내고 보니 ‘내면의 트라우마’ 목록이었다. 나는 타인을 향해 분노를 쟁여 두면서, 실은 나 자신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속절없이 곱씹고 있었다. 그 ‘혐오 대상 목록’을 소리 내어 읽어 보니 낯 뜨거웠지만 은밀한 쾌감이 솟아나기도 했다. 내 안의 어떤 부분, 오랫동안 짓눌려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던 부분이 풀려 깨어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융이 말하는 ‘그림자(shadow)’다. 나는 그렇게 그림자의 세계에 입문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동경하는 것들, 사랑하는 것들로만 내 의식을 지배하고 싶었던 그 시절. 나는 내가 증오하는 것들, 슬쩍 눈감고 싶었던 것들, 미처 돌보지 못한 것들이 나의 무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머지않아 의식의 핸들을 붙잡고 간신히 ‘나’라는 자동차를 운전하려던 내 욕망은 ‘무의식’이라는 도로 사정을 염두에 두지 않은 철없는 폭주족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의식과 무의식의 불화는 살아 있는 한 끝없이 지속된다. 의식과 무의식의 거침없는 대화가 가능하려면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에 대해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나는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소설 중에서 『오만과 편견』보다는 『이성과 감성』을 더 좋아하는 내 취향 자체에 ‘그림자’ 문제가 얽혀 있음을 깨달았다. 말괄량이 둘째 딸 이야기인 『오만과 편견』보다, 평생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첫째 딸의 이야기인 『이성과 감성』이 내 감각의 촉수를 더 아프게 건드렸던 것이다.










맏이인 엘리너는 매사에 감정을 억제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려워진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매리앤이 첫눈에 사랑에 빠진 월러비에 대해 모두가 우호적이지만, 엘리너만은 그 불같은 사랑에 의구심을 표한다. “사랑한다는 증거는 있죠. 하지만 약혼했다는 증거가 없어요.” 반면 둘째 딸 매리앤은 매사에 감정을 숨김없이 토로한다. 엘리너가 자신이 사랑하는 에드워드가 “꽤 미남이지 않냐”는 질문에, 매리앤은 언니의 감정 따위는 무시하고 솔직하게 자기 느낌을 말해 버린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곧 미남이라고 생각할게.”


엘리너와 매리앤은 아직 서로의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사랑이 저마다 탄탄대로를 걷고 있다고 믿을 때까지는. 금방이라도 청혼할 것 같았던 월러비가 매리앤을 버리고 돈 많은 여인을 선택하자, 매리앤은 숨겨 왔던 우울의 그림자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여름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해바라기처럼 지나치게 밝았던 매리앤은 매일 음울한 곡조의 피아노를 연주하며 주변 전체를 검푸른 멜랑콜리로 물들인다.








한편 결혼까지 생각했던 에드워드에게 약혼자가 있었음을 알게 된 엘리너는 급기야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냉철한 이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융 심리학의 눈으로 보면 이들의 심경 변화는 자신의 그림자와의 진정한 대면이며, 겉으로는 ‘후퇴’일지 몰라도 내면의 여정에서는 분명 ‘진전’에 속한다. 자매들은 각자의 그림자와 접촉하기 시작하면서, 아직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무의식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


융에게 그림자란 자기 안의 ‘열등한 인격 부분’이다. 우리 자신의 결핍, 콤플렉스, 트라우마, 집착, 질투, 분노, 이기심과 관련된 모든 부정적인 사실들이 그림자의 세포를 구성하고 있다. 엘리너와 매리앤은 생애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고, 그 사랑에 잔인하게 배신당한 후 비로소 자기 그림자와 만난다. 하지만 그림자와의 만남은 의식과 무의식의 하모니로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상처로 얼룩진 무의식의 그림자를 자신의 적이 아닌 친구로 길들이는 방법은 그림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그림자의 속삭임을 처음에는 거부한다.









나도 처음에는 내 그림자의 본모습을 한사코 부정했다. 나 또한 앨리노어처럼 모범적으로 살기를 강요받았지만 실은 매리앤의 자유분방한 영혼을 지닌 사람이라는 걸, 나는 의식적으로 내가 앨리노어처럼 미련하게 자신의 감정을 꽁꽁 숨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의식에서는 아무리 퍼내고 퍼내도 감정이 흘러넘치는 매리앤의 화수분형 영혼을 닮았다는 것을. 나는 내 억눌린 그림자의 뿌리가 매리앤이라는 사실을 거부했다. 내가 매리앤을 미워할수록 매리앤은 내 그림자-인격이라 는 사실이 확고해져 버렸다. 영화 속 어떤 인물을 보며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혐오감을 느껴 본 적 있는가? 바로 그 인물이야말로 당신의 그림자를 형상화하고 있는 최고의 스승일 것이다.


엘리너는 자신의 버림받은 처지보다는, 에드워드가 교활하고 이기적인 루시와 평생을 함께해야 한다는 상황에 절망한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사려 깊지만 정작 자신을 배려하는 방법을 모르는 엘리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드워드를 위해 눈물 흘린다. 한 번도 ‘나는 이것을 원한다.’고 말해 본 적 없는 사람은, 항상 동생들을 생각해서 ‘나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며 살아온 맏이들은 엘리너의 슬픔에 처절하게 공감할 것이다.








나는 천성적으로 매리앤에 가깝지만 환경적으로 엘리너로 키워져서 언젠가부터 내 안에는 매리앤의 희미한 뿌리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월러비로부터 버림받은 후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매리앤을 보면서 내가 왜 그토록 눈물을 쏟았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작품을 다시 읽어 보니, 매리앤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때 그토록 가슴 아팠던 이유는 내 안의 또 다른 매리앤의 죽음을 두려워해서였다. 남들 눈치 따위는 보지 않고 어디서나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매리앤, 언니가 집안 형편 때문에 마음고생 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꿈만 좇는 매리앤. 그토록 이기적이고 충동적이고 열정적인, 그러나 턱없는 순수 그 자체인, 내 안의 억눌린 매리앤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울게 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심리학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니, 내가 그토록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던 매리앤이 실제 내 동생을 닮아서가 아니라 바로 내가 가장 사랑하지만 차마 세상에 꺼내 보일 수 없었던 내 안의 또 다른 자아, ‘알터에고(alter ego)’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내 안의 매리앤을 꾸밈없이 사랑한다. 매리앤이 나의 숨은 그림자라면, 엘리너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연기해 온 사회적 자아, 나의 페르소나다. 글을 쓸 때, 나는 엘리너인 척 침착하게 처신하면서 매리앤의 부서질 듯 덜컹거리는 영혼을 꺼내 쓴다. 그러나 엘리너는 단순한 가면이 아니다. 엘리너의 애교 없는 무뚝뚝함과 못 말리는 답답함은 나의 소중한 인격이며, 내가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는 영혼의 피부다. 엘리너가 든든하게 나의 수문장으로 버티고 있기에 매리앤이 아련한 그림자로서 존재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나는 내 안에서 오래전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매리앤을 남몰래 조금씩 꺼내 맘껏 뛰어놀게 한다. 눈치 보지 말고 네 감정을 말해. 자신을 검열하지 말고 스스로에게라도 제발 솔직해 봐. 가끔은 소리 내어 흐느껴도 좋아. 한때 나의 철천지원수였던 내 영혼의 그림자는 이제 나의 가장 소중한 말벗이자 멘토가 되었다. 가장 어둡고 쓰라린 그림자를 내 친구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그림자의 어둠조차 우리 삶의 에너지로 바꾸는 것. 그것이 ‘나를 지키는 또 하나의 나’를 만드는 비결이다.












다음 주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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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의 심리 치유 에세이

2 후회 없이 사랑하라







바람직한 인간관계란 과연 무엇일까? 좌충우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인간관계란, 거리 두기의 기술이 아닐까. 20대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결론이다. 아무리 식히려고 해도 매번 속수무책으로 타오르기만 하던 청춘의 열기를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절에는, 관계란 ‘풀 수 없는 신비’이거나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모든 인간관계가 맺어짐에만 집중되는 것이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무적 관계이든, ‘잘 맺는 것’만이 중요했기에 잘 풀어내는 것, 더 나아가 잘 잊고 잘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아무리 잘 맺어도 툭 끊어져 버리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무리 떼어내도 끈질기게 맺어지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뼈아픈 경험들로 알게 되었다. 맺고 끊어짐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 마음이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관계는 거리 조절의 역학이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마음의 냉정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나는 숱한 상처의 지뢰밭을 건너야 했다. 









『연인』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할 때 우리는 프랑스 출신의 가난한 백인 소녀와 검은 리무진을 탄 중국인 백만장자와의 로맨스가 도대체 어떻게 시작될까 궁금증을 느끼지만, 본격적인 러브스토리는 소설이 시작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불붙는다. 이제 노인이자 작가가 된 ‘나’의 입장에서 기술되는 이 이야기는 오래전 사랑의 불길로 자신의 삶을 불태웠던 한 연인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어린 소녀를 평생 ‘자기다운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불행한 가족사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반드시 글을 쓰고 싶다.”는 사춘기 소녀에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수학 교사 자격증부터 따고 나서 정 원하면 쓰려무나.” “그건 가치도 없고, 직업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일종의 허세에 불과해.” 소녀는 어머니의 마음을 곧바로 간파한다. 어머니는 나를 질투하고 있구나. 재능과 열망을 모두 갖춘 자신에 비해, 가난에 삶을 저당 잡혀 버린 어머니에게는 꿈꿀 수 있는 자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어머니에게 연민을 표현하지 않는다. 소녀는 어머니야말로 “술술 풀리는 글쓰기”라고 말한다. 딸을 평생 무시하고 큰아들만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든 감정이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여신처럼 숭배했던 한 중국인 남자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기억의 필름이 끊기는 이야기, 아직 완전한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다. 그에 대해 말하려 할수록, 엉뚱하게도 어머니나 오빠들을 집요하게 묘사하게 된다. 백발이 성성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더듬더듬 간신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된 평생의 트라우마. 그것은 바로 그 중국인과 자신의 관계였던 것이다. 정말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거리를 둘 수가 없다. 하지만 상대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우리는 언젠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거리를 주고, 내가 내 마음을 보살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소녀는 노인이 되어서조차 이 ‘관계의 거리 조절’에 애를 먹는다. 『연인』에서 뜻밖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어머니’다. 소녀는 자식들 앞에서 평생 한 번도 행복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어머니의 절망과 슬픔에 감염되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불행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괴롭힌 어머니와 큰오빠를 증오하고, 그들 모두와 달리 지나치게 여리고 순수한 작은오빠를 편애하는 마음을 한껏 펼쳐 보이는 동안, 정작 제대로 관계 맺고 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모든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과의 관계 맺기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존감은 높지만 자기애는 강하지 못한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에 비해, 많은 사람들은 사실 자존감은 낮지만 자기애가 강하다. 그래서 항상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도 나를 소중히 여겨 주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욕망의 주인이 되지 못했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연인』의 주인공 ‘나’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면서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어린 백인 소녀가 돈 많은 중국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냉대하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주눅 들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큰오빠의 마약과 도박중독으로 고통 받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중국인 백만장자와 의례적인 만남을 가질 뿐이라고, 자조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그렇게 미약한 자기애 때문에 정작 ‘자기 감정’의 소중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사실은 그 중국인 남자가 엄청난 재산의 상속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진심어린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자기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소외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같은 사랑은 어머니도 오빠들도 그 어떤 훌륭한 교사들도 주지 못했던 뼈아픈 통과의례를 겪게 하여 그녀를 마침내 다이아몬드처럼 강인한 성격으로 만들어 놓는다. 『연인』의 주인공은 그 중국인 남자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의 손길이 얼마나 따뜻한지,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단지 ‘묘사’할 뿐, 그에 대한 감정은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 아마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며 방황한 이유 또한 다시는 그처럼 진실한 사랑을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짜 자신의 감정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평생 착취하고 괴롭혔던 어머니와 큰오빠에 대해서는 그토록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자신을 최초로 행복하게 해 주었던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도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의 기이한 무능력이 가슴 시리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영원한 타인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사랑한 그 소녀에게, 한 번도 다정한 고백을 듣지 못한 백만장자 중국인의 뼈아픈 고백은 이 소설의 가장 눈부신 장면이다. 그는 후회 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녀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었다. 너무도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픈 그 남자의 고백은 이렇다. 그녀는 자신을 ‘백인 소녀’로 객관화하고 그를 ‘중국인 남자’로 타자화하면서 이렇게 쓴다. 그렇게 ‘머나먼 3인칭의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녀는 감정의 폭풍우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그녀는 자신이 진정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지 못했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연인』을 읽는 밤, 나 또한 자신에게 묻는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시간들, 거침없이 치열하게 살고 싶으면서도 한 번도 내 감정의 주인이 되지 못한 아픈 시간들을 곱씹는다. 우리는 언제쯤 자기 욕망의 진짜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게 문학과 심리학은 ‘내 마음에 가까워지는 길’을 밝혀 주는 마음의 등불이다. 때로는 소중한 사람의 감정을 존중해 주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 때로는 나 자신을 제3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 그 미묘한 거리 조절의 미학이야말로 심리학과 문학의 이중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마음의 하모니다. 









프로이트의 모든 이론이 의심에 부쳐지더라도,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는 뼈아픈 금과옥조만은 결코 의심할 수가 없다. 우리가 감추고 밀어내고 억누르려 할수록, 억압된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귀환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아파하는 것,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들을, 숨기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억지로 망각하려 하지도 않기를. 부디 내가 나 자신의 가장 머나먼 타인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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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의 심리 치유 에세이


1 슬픔의 세계로 입문하라







문학적으로는 지극히 훌륭한 작품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이 사람을 꼭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느 지하 생활자의 수기』라든지 카프카의 『변신』이 그런 경우다. 문학 작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그런 주인공이 혹시 내 가족이라면, 혹은 ‘내가 그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는 순간 당장 치료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어느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은둔형 외톨이 주인공이나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에게는 각자 자신의 무의식이 지닌 다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내면의 분열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카를 구스타프 융을 소개해 주고 싶다. 


융은 다짜고짜 치료를 목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환자가 자신의 진짜 문제와 대면할 수 있도록 꿈이나 그림 같은 간접적인 소재를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치유자라고 해서 모든 환자에게 다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깜찍한 문제아 주인공인 『슬픔이여 안녕』의 세실에게는 융 박사가 매우 범접하기 힘든, 두렵고 부담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가 세실의 이모라면 나는 그녀를 최면 요법의 대가 밀튼 에릭슨에게 데려갈 것 같다. 이런 말썽꾸러기 소녀에게는 융처럼 진지하고 심각한 사람보다는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의사, 때로는 철부지 아이처럼 ‘환자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재미있는 치료사가 어울릴 것 같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 소녀 세실은 부자이자 바람둥이인 아빠와 함께 지중해의 한 휴양지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세실이 아무리 공부를 등한시해도, 이른 나이에 남자친구와 격렬한 사랑에 빠져도, 아버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인생에서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얻었기 때문에 세실 또한 그 매력적인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애인을 바꾸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지만, 세실은 그런 허랑방탕한 아버지가 좋다. 아버지는 자유의 표상이자 능력 있는 남자의 표본이니까. 세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바로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들, 열심히 사는 사람들, 육체적인 매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세실의 유일한 소원은 이런 방탕한 삶을 지속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헛된 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산 증인인 셈이다. 









아버지의 젊은 애인 엘자와 함께 아무런 규율도 제약도 없는 일상을 즐기던 세실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죽은 어머니의 옛 친구인 안느가 온다는 소식이다. 


아버지도 긴장한다. 안느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정반대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충동에 휘둘리지 않고, 지적이며,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결코 방종에 빠지지 않는 사람. 한마디로 완벽하고 진지하며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안느는 재능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패션업계에서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눈치 빠른 세실은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왜 갑자기 우리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안느가 끼어드는 거지? 혹시 안느가 우리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안느가 우리 삶에 끼어든다면, 지금 누리는 이 달콤한 평화는 한순간에 깨져 버리지 않을까? 심리학자 밀튼 에릭슨이라면 이런 상황을 ‘저항(resistance)’이라 불렀을 것 같다. 노력의 가치를 혐오하는 건방지고 이기적인 세실에게 처음으로 치유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녀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세실의 예감은 적중했고, 지적이고 우아하며 세련된 안느가 도착하자마자 그와 정반대 스타일을 지닌 엘자는 ‘젊고 예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매력도 찾을 수 없는 속 빈 강정 신세가 되어 버린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만나 온 여자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이지적이고 안정적이며 엄격한 카리스마를 지닌 안느에게 빠져 버린 것이다. 


세실은 항상 자신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던 아빠가 안느와 사랑에 빠진 지 며칠 만에 결혼을 선언하자 공황상태에 빠진다.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혼이나 구속을 그토록 혐오하던 아버지가 하룻밤 만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그 결정은 우리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것이었다.” 세실은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겨 버린 느낌에 사로잡힌다. “아버지는 이제 나를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배신한 거야.”








게다가 아름다운 청년 시릴과 목하 열애중인 자신의 임신을 걱정하는 안느의 ‘엄마 같은’ 모습에 경악한다. 세실과 시릴의 키스를 목격한 안느는 경멸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실수를 한다면, 그 종말은 병원에서 맞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낀 세실은 안느를 향한 복수를 기획한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라면 엘렉트라콤플렉스를 지적할 것이다. 아들에게 어머니를 향한 독점욕에서 우러나오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있다면, 딸에게는 아버지를 향한 소유욕에서 기인하는 엘렉트라콤플렉스가 있다. 프로이트 박사가 안느를 상담했다면, 그녀는 유아기의 성적 트라우마에 대해 추궁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실의 독점욕은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세실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부’라고 망설임 없이 주장하는 안느의 훈육 방식에 기가 질려 버린다. 융통성 없는 안느는 세실과 유연하게 협상하지 못하고 결국 공부에 집중하라며 세실을 방 안에 감금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세실은 남자친구 시릴과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엘자와 공모하여 안느를 ‘우리만의 세상’에서 완전히 몰아낼 음모를 꾸민다. 시릴과 엘자가 사귀는 척 상황을 꾸며 아버지의 질투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 앙큼한 소녀의 상황 연출은 기막히게 적중한다. 아버지는 딸의 풋내기 남자친구에게 옛 애인을 빼앗긴 굴욕을 참지 못하고 엘자와 키스를 해버린 것이다. 때마침 이 격정적인 키스 장면을 목격한 안느는 극심한 충격을 받고 제정신이 아닌 채로 눈물범벅이 되어 미친 듯이 차를 몰아 도망치다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세실은 단순한 철부지 소녀가 아니었다. 열일곱 살 소녀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게다가 세실은 자신을 너무도 잘 알았다. “내가 이 연극의 주인공이자 연출자였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 연극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안느는 겉으로는 사사건건 주인공 세실의 욕망과 충돌함으로써 적대자(anatagonist)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실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구원자이자 조력자였다. “나는 고삐도 재갈도 없이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버지의 얼굴에서도 똑같은 감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충동과 쾌락의 낙원에서 그 어떤 욕망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세실은 최고의 조력자이자 멘토를 적으로 돌려 버리고 그녀를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버리고 만다. 어떤 형상으로도 빚어지기를 거부하는 무정형의 반죽, 세실은 그런 존재였다. 『슬픔이여, 안녕』은 겉으로는 세실의 승리이자 안느의 패배로 끝나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은 세실이 자기 인생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끝내 자발적으로 놓쳐 버리는 비극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제목 『슬픔이여 안녕』에서 안녕은 이별의 인사 ‘아듀’가 아니라 만남의 인사 ‘봉주르’다. ‘슬픔은 이제 그만’이란 뜻이 아니라, 슬픔을 향한 입문의 뉘앙스로 읽으면 이 작품의 의미가 더욱 깊고 풍부하게 다가온다. 슬픔의 세계로 입문하는 순간 우리들의 진짜 인생은 시작되는 것이기에. 슬픔은 ‘행복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 슬픔의 내밀한 속삭임에 충분히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가 슬픔에 굴복하지 않고 슬픔 속에서 더 깊은 생의 진실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다음 주,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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