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의 심리 치유 에세이


1 슬픔의 세계로 입문하라







문학적으로는 지극히 훌륭한 작품이지만, 심리학적으로는 ‘이 사람을 꼭 치료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경우가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느 지하 생활자의 수기』라든지 카프카의 『변신』이 그런 경우다. 문학 작품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그런 주인공이 혹시 내 가족이라면, 혹은 ‘내가 그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보는 순간 당장 치료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어느 지하 생활자의 수기』에 나오는 은둔형 외톨이 주인공이나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에게는 각자 자신의 무의식이 지닌 다채로운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내면의 분열을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도록, 카를 구스타프 융을 소개해 주고 싶다. 


융은 다짜고짜 치료를 목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환자가 자신의 진짜 문제와 대면할 수 있도록 꿈이나 그림 같은 간접적인 소재를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치유자라고 해서 모든 환자에게 다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문학에서 가장 깜찍한 문제아 주인공인 『슬픔이여 안녕』의 세실에게는 융 박사가 매우 범접하기 힘든, 두렵고 부담스러운 존재처럼 느껴질 것이다. 내가 세실의 이모라면 나는 그녀를 최면 요법의 대가 밀튼 에릭슨에게 데려갈 것 같다. 이런 말썽꾸러기 소녀에게는 융처럼 진지하고 심각한 사람보다는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의사, 때로는 철부지 아이처럼 ‘환자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재미있는 치료사가 어울릴 것 같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 소녀 세실은 부자이자 바람둥이인 아빠와 함께 지중해의 한 휴양지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세실이 아무리 공부를 등한시해도, 이른 나이에 남자친구와 격렬한 사랑에 빠져도, 아버지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인생에서 모든 것을 너무 쉽게 얻었기 때문에 세실 또한 그 매력적인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애인을 바꾸고도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지만, 세실은 그런 허랑방탕한 아버지가 좋다. 아버지는 자유의 표상이자 능력 있는 남자의 표본이니까. 세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바로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들, 열심히 사는 사람들, 육체적인 매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세실의 유일한 소원은 이런 방탕한 삶을 지속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헛된 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산 증인인 셈이다. 









아버지의 젊은 애인 엘자와 함께 아무런 규율도 제약도 없는 일상을 즐기던 세실은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죽은 어머니의 옛 친구인 안느가 온다는 소식이다. 


아버지도 긴장한다. 안느는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정반대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충동에 휘둘리지 않고, 지적이며,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결코 방종에 빠지지 않는 사람. 한마디로 완벽하고 진지하며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안느는 재능도 뛰어나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패션업계에서 성공한 사업가이기도 했다. 눈치 빠른 세실은 이리저리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왜 갑자기 우리들의 평화로운 일상에 안느가 끼어드는 거지? 혹시 안느가 우리 아버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만약 안느가 우리 삶에 끼어든다면, 지금 누리는 이 달콤한 평화는 한순간에 깨져 버리지 않을까? 심리학자 밀튼 에릭슨이라면 이런 상황을 ‘저항(resistance)’이라 불렀을 것 같다. 노력의 가치를 혐오하는 건방지고 이기적인 세실에게 처음으로 치유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녀는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세실의 예감은 적중했고, 지적이고 우아하며 세련된 안느가 도착하자마자 그와 정반대 스타일을 지닌 엘자는 ‘젊고 예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매력도 찾을 수 없는 속 빈 강정 신세가 되어 버린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만나 온 여자들에게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이지적이고 안정적이며 엄격한 카리스마를 지닌 안느에게 빠져 버린 것이다. 


세실은 항상 자신의 소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던 아빠가 안느와 사랑에 빠진 지 며칠 만에 결혼을 선언하자 공황상태에 빠진다. “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혼이나 구속을 그토록 혐오하던 아버지가 하룻밤 만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그 결정은 우리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것이었다.” 세실은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겨 버린 느낌에 사로잡힌다. “아버지는 이제 나를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는다. 나를 배신한 거야.”








게다가 아름다운 청년 시릴과 목하 열애중인 자신의 임신을 걱정하는 안느의 ‘엄마 같은’ 모습에 경악한다. 세실과 시릴의 키스를 목격한 안느는 경멸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런 식으로 실수를 한다면, 그 종말은 병원에서 맞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낀 세실은 안느를 향한 복수를 기획한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이트라면 엘렉트라콤플렉스를 지적할 것이다. 아들에게 어머니를 향한 독점욕에서 우러나오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있다면, 딸에게는 아버지를 향한 소유욕에서 기인하는 엘렉트라콤플렉스가 있다. 프로이트 박사가 안느를 상담했다면, 그녀는 유아기의 성적 트라우마에 대해 추궁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실의 독점욕은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세실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부’라고 망설임 없이 주장하는 안느의 훈육 방식에 기가 질려 버린다. 융통성 없는 안느는 세실과 유연하게 협상하지 못하고 결국 공부에 집중하라며 세실을 방 안에 감금하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다. 세실은 남자친구 시릴과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엘자와 공모하여 안느를 ‘우리만의 세상’에서 완전히 몰아낼 음모를 꾸민다. 시릴과 엘자가 사귀는 척 상황을 꾸며 아버지의 질투심을 자극한 것이다. 


이 앙큼한 소녀의 상황 연출은 기막히게 적중한다. 아버지는 딸의 풋내기 남자친구에게 옛 애인을 빼앗긴 굴욕을 참지 못하고 엘자와 키스를 해버린 것이다. 때마침 이 격정적인 키스 장면을 목격한 안느는 극심한 충격을 받고 제정신이 아닌 채로 눈물범벅이 되어 미친 듯이 차를 몰아 도망치다가 끔찍한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세실은 단순한 철부지 소녀가 아니었다. 열일곱 살 소녀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게다가 세실은 자신을 너무도 잘 알았다. “내가 이 연극의 주인공이자 연출자였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이 연극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안느는 겉으로는 사사건건 주인공 세실의 욕망과 충돌함으로써 적대자(anatagonist)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실의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 구원자이자 조력자였다. “나는 고삐도 재갈도 없이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아버지의 얼굴에서도 똑같은 감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충동과 쾌락의 낙원에서 그 어떤 욕망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세실은 최고의 조력자이자 멘토를 적으로 돌려 버리고 그녀를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 버리고 만다. 어떤 형상으로도 빚어지기를 거부하는 무정형의 반죽, 세실은 그런 존재였다. 『슬픔이여, 안녕』은 겉으로는 세실의 승리이자 안느의 패배로 끝나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은 세실이 자기 인생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끝내 자발적으로 놓쳐 버리는 비극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제목 『슬픔이여 안녕』에서 안녕은 이별의 인사 ‘아듀’가 아니라 만남의 인사 ‘봉주르’다. ‘슬픔은 이제 그만’이란 뜻이 아니라, 슬픔을 향한 입문의 뉘앙스로 읽으면 이 작품의 의미가 더욱 깊고 풍부하게 다가온다. 슬픔의 세계로 입문하는 순간 우리들의 진짜 인생은 시작되는 것이기에. 슬픔은 ‘행복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예고하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당신이 그 슬픔의 내밀한 속삭임에 충분히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가 슬픔에 굴복하지 않고 슬픔 속에서 더 깊은 생의 진실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다음 주,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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