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괜찮다 말하는 당신에게』 정여울의 심리 치유 에세이

2 후회 없이 사랑하라







바람직한 인간관계란 과연 무엇일까? 좌충우돌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인간관계란, 거리 두기의 기술이 아닐까. 20대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결론이다. 아무리 식히려고 해도 매번 속수무책으로 타오르기만 하던 청춘의 열기를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절에는, 관계란 ‘풀 수 없는 신비’이거나 ‘다가갈수록 알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모든 인간관계가 맺어짐에만 집중되는 것이었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사무적 관계이든, ‘잘 맺는 것’만이 중요했기에 잘 풀어내는 것, 더 나아가 잘 잊고 잘 정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은 아무리 잘 맺어도 툭 끊어져 버리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아무리 떼어내도 끈질기게 맺어지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뼈아픈 경험들로 알게 되었다. 맺고 끊어짐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내 마음이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관계는 거리 조절의 역학이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더더욱 마음의 냉정한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나는 숱한 상처의 지뢰밭을 건너야 했다. 









『연인』의 책장을 넘기기 시작할 때 우리는 프랑스 출신의 가난한 백인 소녀와 검은 리무진을 탄 중국인 백만장자와의 로맨스가 도대체 어떻게 시작될까 궁금증을 느끼지만, 본격적인 러브스토리는 소설이 시작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불붙는다. 이제 노인이자 작가가 된 ‘나’의 입장에서 기술되는 이 이야기는 오래전 사랑의 불길로 자신의 삶을 불태웠던 한 연인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어린 소녀를 평생 ‘자기다운 삶’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불행한 가족사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반드시 글을 쓰고 싶다.”는 사춘기 소녀에게 퉁명스럽게 말한다. “수학 교사 자격증부터 따고 나서 정 원하면 쓰려무나.” “그건 가치도 없고, 직업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일종의 허세에 불과해.” 소녀는 어머니의 마음을 곧바로 간파한다. 어머니는 나를 질투하고 있구나. 재능과 열망을 모두 갖춘 자신에 비해, 가난에 삶을 저당 잡혀 버린 어머니에게는 꿈꿀 수 있는 자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어머니에게 연민을 표현하지 않는다. 소녀는 어머니야말로 “술술 풀리는 글쓰기”라고 말한다. 딸을 평생 무시하고 큰아들만을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어머니에 대해서는 모든 감정이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여신처럼 숭배했던 한 중국인 남자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기억의 필름이 끊기는 이야기, 아직 완전한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다. 그에 대해 말하려 할수록, 엉뚱하게도 어머니나 오빠들을 집요하게 묘사하게 된다. 백발이 성성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더듬더듬 간신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된 평생의 트라우마. 그것은 바로 그 중국인과 자신의 관계였던 것이다. 정말 사랑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거리를 둘 수가 없다. 하지만 상대를 위해, 또 자신을 위해 우리는 언젠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별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거리를 주고, 내가 내 마음을 보살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를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소녀는 노인이 되어서조차 이 ‘관계의 거리 조절’에 애를 먹는다. 『연인』에서 뜻밖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어머니’다. 소녀는 자식들 앞에서 평생 한 번도 행복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 어머니의 절망과 슬픔에 감염되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불행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괴롭힌 어머니와 큰오빠를 증오하고, 그들 모두와 달리 지나치게 여리고 순수한 작은오빠를 편애하는 마음을 한껏 펼쳐 보이는 동안, 정작 제대로 관계 맺고 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모든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자신과의 관계 맺기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존감은 높지만 자기애는 강하지 못한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이에 비해, 많은 사람들은 사실 자존감은 낮지만 자기애가 강하다. 그래서 항상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도 나를 소중히 여겨 주지 않는다는 피해의식에 시달리게 된다. 욕망의 주인이 되지 못했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연인』의 주인공 ‘나’는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면서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어린 백인 소녀가 돈 많은 중국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자신을 냉대하는 사람들에게 단 한 번도 주눅 들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큰오빠의 마약과 도박중독으로 고통 받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중국인 백만장자와 의례적인 만남을 가질 뿐이라고, 자조적인 태도로 스스로를 합리화하지만, 그렇게 미약한 자기애 때문에 정작 ‘자기 감정’의 소중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사실은 그 중국인 남자가 엄청난 재산의 상속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에 진심어린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자기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소외시켰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같은 사랑은 어머니도 오빠들도 그 어떤 훌륭한 교사들도 주지 못했던 뼈아픈 통과의례를 겪게 하여 그녀를 마침내 다이아몬드처럼 강인한 성격으로 만들어 놓는다. 『연인』의 주인공은 그 중국인 남자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그의 손길이 얼마나 따뜻한지,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단지 ‘묘사’할 뿐, 그에 대한 감정은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 아마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여러 번 결혼과 이혼을 거듭하며 방황한 이유 또한 다시는 그처럼 진실한 사랑을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진짜 자신의 감정은 말하지 않는다. 자신을 평생 착취하고 괴롭혔던 어머니와 큰오빠에 대해서는 그토록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면서도, 자신을 최초로 행복하게 해 주었던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 감정도 표현하지 못하는 그녀의 기이한 무능력이 가슴 시리다. 우리가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진정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도 영원한 타인인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바쳐 사랑한 그 소녀에게, 한 번도 다정한 고백을 듣지 못한 백만장자 중국인의 뼈아픈 고백은 이 소설의 가장 눈부신 장면이다. 그는 후회 없이 사랑했으므로 그녀보다 훨씬 행복한 사람이었다. 너무도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픈 그 남자의 고백은 이렇다. 그녀는 자신을 ‘백인 소녀’로 객관화하고 그를 ‘중국인 남자’로 타자화하면서 이렇게 쓴다. 그렇게 ‘머나먼 3인칭의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녀는 감정의 폭풍우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그녀는 자신이 진정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지 못했음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연인』을 읽는 밤, 나 또한 자신에게 묻는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시간들, 거침없이 치열하게 살고 싶으면서도 한 번도 내 감정의 주인이 되지 못한 아픈 시간들을 곱씹는다. 우리는 언제쯤 자기 욕망의 진짜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내게 문학과 심리학은 ‘내 마음에 가까워지는 길’을 밝혀 주는 마음의 등불이다. 때로는 소중한 사람의 감정을 존중해 주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 때로는 나 자신을 제3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 그 미묘한 거리 조절의 미학이야말로 심리학과 문학의 이중주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마음의 하모니다. 









프로이트의 모든 이론이 의심에 부쳐지더라도,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는 뼈아픈 금과옥조만은 결코 의심할 수가 없다. 우리가 감추고 밀어내고 억누르려 할수록, 억압된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귀환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아파하는 것,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들을, 숨기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억지로 망각하려 하지도 않기를. 부디 내가 나 자신의 가장 머나먼 타인이 되지 않기를.











다음 주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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