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 - 인류의 기원과 여성의 탄생
J. M. 애도배시오 외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역사를 언제 처음 공부할까? 아마도 글자를 깨우치고 읽고 쓸 줄 아는 초등학생 시절 쯤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성 역할을 공부할까?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은연중에 학습하는 부분이 훨씬 많을 것이다. 책의 제목은 <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이다. 얼핏 맛좋은 돼지고기를 얇게 저민 음식 베이컨을 떠올리며 요리방법과 관련된 책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책 표지를 직접 보니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선사시대를 공부하며 자주 등장하는 풍만한 비너스 상 사진과 ‘인류의 기원과 여성의 탄생’이란 부제가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선사시대의 삶은 어땠을까? 상상화를 그려보자. 거대한 맘모스를 함정에 몰아넣고 함성을 지르고 있는 야만적인 옷차림과 피투성이 남자들이 떠오르는가? 여자들은 동굴 속에서 사냥에 성공한 그들을 환대하며 털가죽을 돌칼로 잘라 옷을 만들고, 고기를 불에 요리한다. 나 말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일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런 원시 시대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남성 중심으로 짜여졌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것과 달리, 거대한 짐승 사냥은 성공하기 매우 힘들고, 여자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삶 속에서 많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화는 가설이 아니다.(47쪽) 학자들은 자연 선택의 세세한 작동 방식에 대해서만 논란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자연 선택과 또 다른 선택으로 성 선택이 있다.(50쪽)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몸의 크기, 골반의 구성, 뇌의 작동 등 인간의 진화 과정을 추측해 보면 선사 시대의 삶 속을 좀 더 가깝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실망스럽게도 우리가 역사 공부를 하며 어렵게 외운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나 네안데르탈 인 등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닐 것이리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만 학계가 이를 교과서에 싣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인류의 직립 보행은 무엇보다도 여성의 산고를 창출했다. 아담과 이브가 사과를 따먹어서가 아니라 일어섰기 때문에 산고가 시작된 것이다.(84쪽) 걷지 못하는 아이를 안고 다니고, 잘 뛰어다니기 위해서는 인류 특유의 골반과 좁은 산도가 필수적이다. 산파가 필요한 인류의 독특한 출산은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남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1970년대 페미니즘 사이의 논쟁인 “성매매인가, 가정부양인가?”란 물음은 그동안 우리가 생각해왔던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남자가 고기를 가지고 오면 여자는 그를 가장으로 인정하고 가정을 꾸린다. 하지만 그가 고기를 가지고 오지 못하면 여자는 그를 가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101쪽) 이 오래된 이론은 남성 중심의 사고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성이 가져온 고기(혹은 돈 혹은 힘)로 여성이 이에 의지하여 삶을 꾸려나간다는 명제는 간단하게 뒤집을 수 있다. 고기가 없어도 사람은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다. 견과류나 땅벌레와 같은 곤충 채집으로 먹고 살만하다. 게다가 여성도 남성이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일을 힘을 들여 할 수 있고, 반드시 남성의 마초적인 성향을 보고 가정을 꾸리는 것은 아니다. 즉, 오랜 진화 과정 속에서 의식주와 가정을 형성하는 생활방법은 매우 다양하다.


어쩌면 남성은 소모품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193쪽) 그러나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노인들이 아이들을 돌보아 주면서 씨족이 형성되면서 성 역할이 분화된다. 이른바 끈혁명(210족)을 통해 바구니와 모자, 옷을 만들면서 노동에 여러 분야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던 원시시대의 풍만한 비너스 조각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 그녀의 머리는 끈으로 둘러져 얼굴이 드러나 있지 않은데, 이것은 모자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조각일 수 있다. 어쩌면 여성의 2차 성징을 가르쳐 주기 위한 도구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녀의 몸매만 보느라 다른 부분들을 간과하는데, 그녀의 팔이나 얼굴은 과감하게 생략되었지만, 가슴과 어깨에 둘러져 있는 끈이나 무릎까지 내려져 있는 섬세한 무늬의 치마는 매우 상세하게 조각상 위에 도드라져 있다. 선사 시대 인류의 미 의식에 의구심을 품게 하는 이 조각상을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남성중심의 시각으로 관찰해 왔는지 놀랍지 않은가.


291쪽에서는 모계 중심 사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이야기한다. 가부장 대신에 모성을 집어넣는 실수를 하면 안 된다. 다만 생활 환경의 변화와 가족을 이루면서 인류는 적절한 삶의 방법을 모색해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여성과 남성, 그리고 그 둘의 성 정체성을 갖는 모든 이들은 산업 혁명이 이루어지기 이전에 전염병과 싸우고, 가축을 기르고, 서로 언어로 소통하고, 그릇을 빚고, 멋진 의식과 멋진 치장에 공을 들이며 살았을 것이다. 책 대부분의 내용이 선사시대를 다루고 있어서 과학, 의학, 유물, 유적, 기후 등 추상적인 학문의 이론을 빌려와 근거를 들어 설명하기 때문에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선사시대 ‘여성’의 역할을 머릿 속에 그리는 일은 꽤 재미있고 신선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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