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조각달
로즈메리 웰스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버지니아에 뜬 붉은 조각달


미국의 남북전쟁은 나에게 친숙한 소재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붉은 조각달>도 바로 남북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하지만 둘의 느낌은 상당히 다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노예 문제나 여성 인권 문제 등을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땅의 힘을 느끼고, 사치와 꿈을 사랑하고, 우정과 용기 따위의 단어로 남북전쟁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오는 우리는 비록 직접 겪지는 않지만,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는지 잘 알고 있다. 수 십년 전의 한국 전쟁은 아직까지도 이념 논쟁의 불씨로 남아 있고, 베트남 전쟁에 파병된 군인들, 지금은 이라크 전쟁에 파병된 군인들 등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일들이 아직도 세상 곳곳에서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붉은 조각달>은 주인공 인디아가 태어나기 일주일 전의 일부터 시작한다. 흑인 노예의 도덕적인 행위와 그에 대한 파격적인 보상, 그리고 그것을 증언해주는 사람들. 19세기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마치 조선 후기 노비를 모두 풀어주고, 그들에게 땅을 나누어준 어느 선비의 일화가 생각났다. 인디아는 집안이 매우 부유하지는 않지만, 친구 줄리아도 있고, 매우 똑똑한 아이이다. 십대에 원소의 이름이나 박테리아의 역할에 관심 갖는 아이는 매우 드물 것이다. 게다가 인디아는 자상한 아버지와 엄격하지만 바느질 솜씨가 좋은 어머니, 90살이 넘은 할아버지, 그리고 매우 어린 남동생과 함께 버지니아에서 살고 있었다.


인디아가 12살 되던 해 남북전쟁에 참전하러 소년들과 청년들이 마을을 떠난다. 신문에서는 링컨을 비웃고, 전쟁에서 남부가 꼭 승리한다는 기사를 연신 보도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인디아는 계속 물음을 던진다. 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인가? 49쪽에서 인디아 어머니는 대답한다. “남자라서 그래. 핏속에 뭔가가 있으니까. 그게 삶이란다. 여자는 예리한 혀로 갈등을 잠재우지만 남자는 주먹과 총으로 상황을 해결한단다. 결코 만족을 몰라.” 이 소설 속의 남자들은 인디아의 공부를 도와주는 에모리 외에는 모두다 전쟁에 휩쓸린다. 정말로 남성성 때문에 전쟁은 시작되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남성성으로 귀결짓는다.


그리고 인디아가 제일 하고 싶어하는 것은 공부이다. 인디아 어머니는 인디아가 가정을 잘 꾸려나갈 수 있도록 가계(우리나라의 가사 과목), 성경 따위의 과목을 공부시키려 한다. 하지만 인디아는 남자아이들처럼 복장을 하고 전쟁놀이도 서슴치 않고, 말을 타고 사냥을 배우는 것도 꺼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영리한 줄리아는 과학, 라틴어, 독일어 등을 공부하고 싶다. 여성에게는 자유롭게 공부하거나 돈을 벌거나 투표권도 없었던 세상에서 인디아를 인정해주는 아버지와 에모리의 도움으로 인디아는 집 안 일을 도우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공부를 해 나간다. 58쪽의 재미있는 대화가 있다. “여자 아이들은 과학이나 식물학 책을 읽으면 안돼. 평생을 걸려도 거기 있는 내용을 다 활용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남자들도 많아. 그리고 남자처럼 생각하면 여자의 심성이 망가져.” 이를 듣고 인디아는 당차게 대답한다. “과학 때문에 제 심성이 망가지면 비명을 지를 게요. 그 때 가서 그만두고 다시 신성한 강으로 되돌아가면 되잖아요.”


전쟁은 남부에 불리하게 진행되고, 장티푸스에 걸려 완치하지 못한 상태로 인디아의 아버지는 다시 샤프스버그 전투를 도우러 떠나게 된다. 에모리가 보내준 독일의 선진적인 알약을 일주일간 복용하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지만, 인디아는 아버지가 어디에 계신지 모른다. 무작정 전쟁터로 찾아간 인디아가 본 것은 널따란 옥수수 밭을 병사 수천 명의 시신이 덮고 있던 것이다. 그 무서운 밤에 만난 어느 병사는 인디아에게 물을 먹이며 말한다. “저 위를 봐라. 낫처럼 생긴 저 조각달을 봐! 피처럼 붉지. 이 땅 위에 이토록 끔직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어.”(154쪽)


결국 아버지는 돌아가신다. 인디아 무디는 슬프지만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을 생각하며 꿋꿋하게 현실과 맞선다. 남부냐 북부냐를 떠나서 결국 인간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택하는 인디아는 전쟁이 끝을 향해 치달아가며 굶주림과 가난함에 인간성을 상실하는 골짜기 사람들과는 다르다. 과학과 의학의 합리성을 인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를 극복하려던 에모리와 인디아는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된다. 에모리는 감옥에서 아픈 사람들을 도우며, 인디아는 여성도 입학을 허락하는 대학에 다니며, 새로운 시대를 향해 발돋움하는 마지막 장면이 매우 훈훈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철저한 역사 고증을 하며 쓰여진 소설이라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징그럽거나 잔혹한 장면도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버지니아에 떴던 붉은 조각달은 오늘날 지구 몇 몇 곳에 여전히 떠 있다. 미국은 인디언 학살을 통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나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 인디아라서 뜻밖이었다. 아마도 이렇게 평화를 지키기 위한 노력들이 모이면 언젠가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끔찍한 참상이 사라지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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