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의 추억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하나의 기억, 두 개의 도시, 세 명의 희생자, 네 개의 퍼즐...
그리고 진실!
심리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추리소설을 추천한다.
안개는 위험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이 위험할 뿐이다.(11쪽) 공지영의 도가니처럼 이 소설에서도 안개가 소통의 단절을 일으키는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다. 악의 추억에서는 인공도시 뉴아일랜드 건설로 인해 원래 있던 침니랜드에 안개가 밀어닥친다. 환경의 변화이다. 뉴아일랜드는 신도시이자 부촌으로 재계의 황태자, 사법계의 유력인사, 언론의 횡포자 등이 모여 살고 있다. 반면에 침니랜드는 뿌연 안개 속에서 부랑자로 떠도는 이들이나 떠나는 시간을 제대로 잡지 못했던 이들이 남아 살고 있다.
제1부 웃는 여인 : 완전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심사숙고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주로 언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이 원치 않는 행동을 저지르도록 유도해나가는 사람들이다. - 토마스 뮐러
제2부 욕망의 섬 : 악의 본질은 죄나 불완전을 의식ㅎ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악을 의식하는 동시에 그것을 피하기 위해 결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자신의 양심을 직시하는 고통, 자신의 죄와 불완전을 인정하는 고통이다. - 스캇 펙
제3부 나의 고양이를 부탁해 : 기억은 괴물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잊는다 해도 그것은 잊지 않는다. 그것은 기록을 다른 곳에 남겨둘 뿐이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기록을 유지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한다. 또 자신의 의지에 따라 기록을 우리 회상 속으로 불러낸다. 우리는 우리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이 우리를 가지고 있다. - 존 어빙
제4부 안개 속의 살인자 : 사람들은 때때로 자아가 두 개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하나는 깨끗한 폐와 장수를 바라지만 다른 하나는 담배를 숭상한다. 하나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을 읽으며 자기계발에 열심이지만 다른 하나는 텔레비전의 옛날 영화를 보려고 한다. 이둘은 서로 통제권을 쥐려고 끊임없이 다툰다. - 토마스 쉘링
제5부 안개를 읽는 100가지 방법 : 우리 뇌는 자신을 믿도록 설계되어 있다. 선입관이 사실처럼 느껴지고 의견을 실제 감각, 지각과 구별할 수 없다. 어떤 포도주가 싸구려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싸구려 맛이 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랑 크뤼를 맛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랑 크뤼를 맛보게 되어 있다. - 조나 레러
제6부 내가 너를 잊으면 내게 말해줘 : 기억의 부정직성을 학문적으로 규명한 것은 프로이트이다.... 성적 학대를 당한 여성들이 회상을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진정에서 우러나는 기억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들은 기술적으로는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고스란히 믿고 있으니까. - 조나 레러
제7부 당신의 따뜻한 총 : 쇼스타코비치의 비밀은 그의 왼쪽 뇌실에 금속파편인 탄환 부스러기가 있다는 것이다. 뢴트겐 검사 결과 머리가 움직이면 파편이 움직여 관자엽의 음악영역을 압박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그것을 제거하는 것을 몹시 꺼렸다. 파편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면 음악이 들려왔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마다 새로운 선율이 머릿속에 가득 차 그것을 작곡에 이용한 듯하다. -올리버 섹스
제8부 나에 대한 너의 거짓말 : 사람들은 자기 마음보다 오히려 자기가 가진 자동차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 에드워드 윌슨
저자인 이정명 씨는 <뿌리깊은 나무><바람의 화원> 작가이기도 하다. 주로 우리나라 시대물을 써온 작가가 어떻게 이런 외국 분위기가 나는 소설을 완벽하게 써낼 수 있었을까 매우 존경스럽다. 실제로 소설을 읽으면서 몇번이나 앞으로 돌아가 작가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했다. 추리 소설에 빠질 수 없는 근거나 상황이 모두다 서구적이어서 내가 혹시 지금 다른 사람이랑 착각 하는 것은 아닐까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정도로 완벽하다.
이 책은 악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기억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끔 한다.
나는 누구인가?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움을 당했지만, 죽을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나를 대신 죽여준다면? 그리고 나를 괴롭힌 이를 극단으로 몰아가 복수까지 해준다면? 당신의 선택은 어떠할 것인가? 잠시 이 책 속에 파묻혀서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기억이 그렇게나 불명확한 것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도덕적인 이념도 단지 허상일 뿐 아닐까?
그러나 마지막에 나온 스펜서의 보고서는 다시금 우리에게 악은 악일 뿐이라고 마음을 추스리게 한다. 그리고 고양이 아들레이드를 찾아서, 연약한 영혼이 악으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혹은 새로운 희망을 낳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치밀한 심리 묘사와 사전지식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누구나 영자 타임스의 낱말 퍼즐을 풀고 싶은 충동이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