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너와 헤어진 뒤로 나는 단 하루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다. 2005년을 기점으로 너는 나보다 더 나이가 많아졌지. 그럼에도 네가 영원히 내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내 안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네가 나왔다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험인지 네게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있는 입술이 내게는 없네. 네 눈을 빤히 쳐다보고 싶지만, 너를 바라볼 눈동자가 내게는 없네. 너를 안고 싶으나, 두 팔이 없네. 두 팔이 없으니 포옹도 없고, 입술이 없으니 키스도 없고, 눈동자가 없으니 빛도 없네. 포옹도, 키스도, 빛도 없으니, 슬퍼라, 여긴 사랑이 없는 곳이네. (228, 229쪽)

 

0. 계간 《자음과모음》에 다섯 계절 동안 연재되었고 EBS 라디오 연재소설에서 한 달 동안 낭독되었던, 그 소설이 책으로 나왔다. 제목도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으로 바뀌었다. 연재 당시의 제목은 ‘희재’였는데 바로 주인공인 카밀라 포트만의 한국 이름이기도 하다. 위의 인용한 부분은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이다. 엄마 정지은이 딸 정희재(카밀라 포트만)를 향해 하는 말, 아름답다.

 

1.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카밀라 포트만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카밀라’라는 자신의 이름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태생지인 한국 진남으로 향한 그녀는 그곳에서 ‘희재’라는 이름을 찾게 된다. 하지만 진남의 사람들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녀는 혼란스러워진다. 희재의 출생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24년 전 정지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탐색하는, 정희재와 정지은 두 여자의 이야기를 골격으로 하고 있다.

 

2. 1부 카밀라, 2부 지은에 이어 3부에는 ‘우리’가 등장한다. 정지은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윤경, 미옥, 유진, 그리고 이희재. 앞서 등장했던 신혜숙, 최성식이 읽는 이를 혼란스럽게 했다면 3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는 하나씩 단추를 끼워볼 수 있다. 소설의 말미까지 “과연 정희재의 친부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지만, 진남의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숨기려 들지만, 그럼에도 진실은 하나로 존재하고 희망의 날개는 꺾이지 않는다. 소설을 읽는 동안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에서 ‘말하면 할수록 모르는’의 상태가 되었다가, 희미하나마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의 마음으로 끝낼 수 있었다.

 

3.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중심에 이해와 오해, 소통 등이 놓여 있었다면 그 이후의 김연수 소설의 화두는 ‘고통’으로 조준점을 바꾼 것 같다. 이전의 소설들에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 부쩍 그쪽으로(?) 하는 말들이 많아졌달까. 최근의 단편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서 타인의 고통과 그 보편성의 짐작을 엿보았다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는 타인에게로 건너가 그 고통을 어루만져 주는 일이 가능할까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을 터. 그러고 보면 이번 ‘작가의 말’에서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이라는 것은 ‘푸른색으로 쓴 것’을 읽어 달라는 당부 아닐까.

 

0. 더 많은 말은, 책을 다시 한 번 읽은 다음에 겨우 몇 마디 덧붙일 수 있을 듯하다. ① 군데군데 다른 곳이 있겠지만 라디오 연재소설의 낭독으로 들어보는 것도 추천. ② 그리고 작가의 책 가운데 초판에서 가장 많은 오자를 발견했는데, 재쇄 들어가면서 수정되었다고 하니 다행이다. 막바지에는 한 장 걸러 하나씩 오자가 눈에 띄어 마음에 걸렸는데, 2쇄를 한번 읽어봐야겠다. ③ 번역서는 대개 양장으로 나왔지만, 작가의 책 가운데 양장본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함께 꽂아두면 살짝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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