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 창비시선 343
문태준 지음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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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선생님은 어느 수업에서나 문태준의 다음 시를 말씀하셨다. “오래/ 오래도록/ 걸어/ 걸어서 온/ 첫 눈/ 하나/ 하나가/ 벼랑집”(「첫눈」 전문, 『수런거리는 뒤란』 수록).

 

지금은 멀어진 누군가가 나에게 선물한 시집은 문태준의 『가재미』였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가재미」 부분).

 

2009년 봄 동네의 서점에 들러 뒤늦게 『그늘의 발달』을 샀다. “우리는 그늘을 앓고 먹는/ 한 몸의 그늘/ 그늘의 발달/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그늘의 발달」 부분).


여름에는 첫 산문집 『느림보 마음』을 샀다.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한 책에는 그의 시만큼이나 정갈한 필체로 서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소설가 김연수 김중혁과 함께 ‘김천 트로이카’로 불리는 시인이다. 나는 세 사람의 인연이 신기하다.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 나왔다. 4년 만이다. 제목은 『먼 곳』. 이를 문태준답다 해야 할지 답지 않다 해야 할지 잠시 갸우뚱했다. 표제작 「먼 곳」을 읽고 역시 그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은 「먼 곳」의 전문.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시인 허수경의 추천사 역시 눈에 띈다. 추천사 전문.

 

그의 시들은 느슨한 시인, 나를 단련시킨다. 그의 ‘시로 씌어진 제사(祭祀)’를 읽으며 나는 달리기를 준비한다. 신발끈을 조이며 겨울모자를 쓴다. 한 시인이 도착한 어느 순간에 동반하기 위하여 정결하게 옷깃을 여민다. 나의 폐활량이 충분하여 이 달리기가 그곳으로 이르길 바란다. 짧고 간결한 제사, 투명하게 슬픈 제사, 풀벌레와 새소리, 낙과와 울퉁불퉁한 과일과 쓸쓸한 어머니를 위한 제사. 이 아득한 아름다움은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전에 아름다움은 우리를 떠나갔나. 태준의 시들은 그 ‘본래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라도 심란하지 않게 저녁을 잘 보내라는 안부인사다. 이런 짧은 안부인사가 시의 어떤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인들이여, 왜 세계는 가장 가난하고 아름다운 연인으로 우리를 기억하겠는가. 허수경(시인)

 

 

오늘 책을 받아 이제 겨우 앞부분 조금을 읽었다. 천천히 읽고 싶다. 시인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이 떠올라 그것만을 받아 적는다. 책을 받은 오늘도 몇 년이 지나면 두세 줄로밖에 적을 수 없는 일이 될지 모르겠다. ‘먼 곳’처럼. 장석남의 신작과 번갈아 읽고 있는데 이를 한 줄로 적자면, “먼 곳을 바라보는 고요”쯤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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