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 지식인과 실천 問 라이브러리 6
윤평중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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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지식인과 실천)

책속에 들어가며....

서문-지식은 누구인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정신없는 시대에 저자는 지식인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특히나 지난 10년간 새로운 가치관이 형성되고 이제 다시 과거로 회귀하여 정신없는 이 혼돈의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말을 한다.

 

“2008년 6월의 촛불”은 ‘한국사외에서 지식인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상념을 더 절실하게 만든다. 인수위 시절부터 반복된 이명박 정부의 실정(失政)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와, 시민들의 주권의식과 삶의 정치에 대한 개안(開眼)이 촛불집회로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중략) 촛불은 한국현대사가 극단의 시대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웅변한다.

 

저자는 이 작은 책이 이렇게 혼돈이 난무하는 시대에 좌도 우도 아닌 어느 중도 어느 한곳에서 서서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그 중심이 어떤 것인지 그 속내를 보자.

 

Ⅰ. 한국 지식인과 실천 (리영희 • 송두율 • 김훈)

지식은 실체가 아니라, 권력비판과 지식생산의 과정을 육화시킨 ‘항상적 지식인되기’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지식인 되기를 규정하는 조건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것은 지식담론의 보편적 정당화 가능성과 비판적 실천 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1. 현대한국 지식인 론

1) 지식인은 죽었는가

“요즘 한국의 지식인들이 죽었다“라는 말이 많다.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국 사회가 이렇게 고삐 풀린 듯이 뒤 흔들리고 있을 때 과연 그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식인의 종언테제

첫째 한때 지식인이 활발한 사회적 목소리로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지식을 창조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둘째 전무후무한 대내외적 도전 앞에 지식인이 흔들리는 작금의 상황이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지식인들이 다시 몸을 추슬러 위그를 극복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지식인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새로운 사건이 아니므로 시작인 위기담론이나 종언테제는 정당한 논변으로 성립할 수 없다. 지식인은 본성적으로 위기를 먹고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대 한국 지식인은 지식생산에 관점에서 전보다 나은 상황에 있다. 지식인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측면에서는 전진과 퇴행이 뒤섞이는 변화과정 한가운데 있으며, 다만 실천의 양태가 급변하고 있을 뿐이다. 지식인 종언테제는 그 변화의 양상과 동학(動學)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과도한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지식인의 위기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지식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말을 한다. 하지만 과연 현재 지식인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반쪽만을 바라보는 아니 혹 저자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기 때문은 아닐까 곰곰이 고민을 해볼 만한 문제다.

2) 지식의 존재구소성과 역동적 통합

과연 지식은 항상 옳은 것일까? 그들의 모든 행동은 지식인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의구심에서 다음 글을 발견 할 수 있다.

 

지식은 부분성 및 잠정성이라는 근본적 존재조건을 전제한다. 지식은 ‘끝나지 않을 탐구’의 도정에서 ‘진리에 점차 접근해 감’이라는 지향성과 역동적으로 맞물리는 토론과 검증외의 다른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식인이란 진리 파지자(把持者)나 설교자가 아니다. 지식인은 잠정적 담론을 생산•토의 하고 반증하면서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함께 가는 해석학적 행위자이다.

 

지식인의 주요과업은 권력비판적업과 고유의 지식생산작업으로 압출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권력비판과 지식생산 가운데 지식생산이 더 중요하다고 보지만, 때와 상황에 따라 권력비판이 더 부각될 수도 있으며 이는 군사독재 시절처럼 역사적 혼란기나 전환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결국 저자는 “지식인의 한계를 그저 진리라는 것에 끝없이 접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모습이다.”라는 환상의 모습만을 그려 놓고 있다. 물론 지식을 탐구하고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 지식을 활용한 현재 사회가 만들어 진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은 자신의 지식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그것을 감시하고 또 일정부분의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은 글에서 그 모습에 과거 서책만 읽던 양반님의 냄새가 살짝 난다.

권력비판가로 대표적인 사람은 리영희와 강준만을 꼽았다. 그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을 한다.

 

리영희: 한 시대를 이끈 ‘사상의 은사’로 활동하면서 반공냉전주의의 성채에 큰 균열을내 한국민주중의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강준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시대의 권력비판가의 범형(範形)으로 사회 곳곳에 자리 잡은 각종 성역에 날카로운 실명비판의 메스를 적용해 토론과 검증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공공영역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우리가 지식인이라는 어떤 거대한 그들과의 만남은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무언가 찜찜함과 친근함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지식이라는 것이 주는 스스로의 무게감이라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많은 시대의 지식인들 그리고 선각자들은 그저 한명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 사람의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 가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그들을 지식이라는 것으로 색칠 하고 치장을 한다. 그렇게 색을 칠하고 치장을 하기 시작한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만들어낸 거대한 상징의 모습이 된다.

 

2. 지식의 패러다임 전환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은 많은 부분이 변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물결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그저 담론과 반대 그리고 분열 등으로 빛을 바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념에서 실용으로”라는 새로운 구호에 밀려 다시 10년 전의 암울한 사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실용지향적 이라는 신보수 집단이 2008년 우리의 심장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몸과 얼굴 더 나아가 마음을 멍들게 하고 있다. 저자는 이 모든 현상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한국 지식인 사회의 객관성 상실

-진보영역-

① 황우석 사태: 전문적인 자연과학 연구조차 과잉 정치화의 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

② 고속철도 중단: 도룡뇽을 보호하다며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감행해 경부고속철 공사를 중단시킴으로서 천문학적 예산 손실을 가져온 한 스님의 양심.->개인의 구좐적 진정성의 발로라는 미명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③ 민주노동당과 북한문제: 진보진영에서 관행이 되어온 당파성과 담론에 대한 집착이 사실에 입각한 지적 융합의 가능성을 훼손하는 대표적 실례->민노당의 정치적 자살 선택

-보수영역-

① 경부대운하: 초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내야하는 신보수 정치세력의 실용주의적 토건 프로젝트다. 경우운하를 강행할 경우 직접적 이해관계가 걸린 건설자본, 대운하 근처에 토지를 소유한 지방토호와 투기세력, 약간의 혜택을 받게 될 지역주민들을 제외하고는 미래의 우리 사회 전체에 재앙에 가까운 엄청난 부담으로 남게 될 공산이 크다.

 

3. 한국현대사외 리영희

리영희는 우상을 타격하는 그의 이성이 그 과정에서 스스로 세운 또다른 우상에 의해 광휘(光輝)가 바래 이성의 존재이유를 훼손한다. 그는 오른 쪽으로 과도히 기울어진 남한의 반공규율사회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반대방향으로 너무 지나치게 밀고 말았다.

반공규율사회로 왜곡된 자유민주주의와, 천민자본조의로 얼룩진 시장기제에 대한 리영희의 극렬한 반감은 그 정반대에 자리에 있다고 그가 상상한 ‘인본적 사회주의에 대한 선망’으로 연결된다. 그는 자신의 사상적 고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사상은 이른바‘후기 마르크스’로 불리는 경제이론의 결함 및 오류와 ‘전기 마르크스’이론철학으로서의 ‘인간학’이 분리되어야”하며, “인간성의 회복을 지탱해주는 이론적 근거로서 ‘전기 마르크스’의 존재론적 인간학은 이후에도 철학․윤리적 지침으로 남을 것이다.”

리영희는 남과 북을 다루는데 있어서 그의 맹목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해방후 신생독립국가 건설사업의 길에서 강렬한 정의감, 헌신적․자기희생적 인간은 주로 ‘좌’의 자리에 섰고, 친일파․민족반역자로 지목됐거나 그런 오명을 찍힌 인간형이 ‘우’의 자리에 마주섰”으며, 그리하여 “전자의 인물들은 분단된 북쪽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했고, 후자의 인물들은 남쪽에서 자본주의를 건설했다”라고 한다. 그로 인해 결국 그는 “북쪽은 남쪽과 반대의 철학으로 나라 만들기를 서두른 결과, 높은 민족적 자존과 사회구성원 상호간의 도덕적 생존, 그리고 동포애가 감도는 순박한 인간 평등의 사회를 실현한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북한에 대해 맹목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살짝 감춰둔 북한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분석 결과 이다.

결국 리영희는 북한의 참혹한 현실에 대해 우리의 미혹(迷惑)하는 발언을 확신에 차 계속할 때 ‘우상파괴자 리영희’의 아름다운 얼굴이 ‘새로운 우상숭배자’의 형상과 겹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 된다.

 

4. 송두율은 누구인가

2003년 후반의 한국사회에 엄청난 논쟁과 갈등을 불러온 ‘송두율 교수 사건’은,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측정할 수 있는 흥미로운 바로미터이다.

철학자 송두율의 사상세계는‘내재적 접근법’에서세련되고 우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북한 거들기’이다.

내재적 접근법 : 사회주의의 이념과 현실을 안으로부터 분석하고, 사회주의가 이룩한 성과를 그 사회가 설정한 이념에 비추어 검토하는 방법

이런 방법의 연구는 동독 연구가인 루츠와 사회주의 비교연구가인 바이메의 작업에 의해 창도되었고, 송두율이 이 분석틀을 사상최초로 북한에 적용시킨다.

주체사상에 대한 송두율식 내재적 판독법은 다섯가지로 요규된다.

첫째, 철학적으로 주체사상의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인간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테제는 결코 주의주의나 유아론으로의 퇴행이아니며, 역사유물론이나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일탈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위대한 사회주의적 전통을 북한의 현실에 맞게 습합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북한사회주의 정치사상의 핵인 수령의 영도는 단지 북한에 국한된 현상만은 아니고, 구소련이나 동구권에서도 당의영도적 역할에 의해 선취된 바있다. 동구권에서도 당의 영도적 역할에 의해 선취된 바 있다. 나아가 당의 영도의 본질을 수령의 영도에서 찾는 주체의 정치 사상도 북의 현실에 실천적으로 대응하는 북한형 ‘카리스마적 지배양식’으로 독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사회주의 경제는 소유문제, 경제관리문제, 그리고 상품과 화폐관계가 그 핵심으로 북한의 ‘자립적 민족경제’는 이 문제들이 대한 북한의 독자적 대응을 보여주며 한동안 상당히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이다.

넷째, 주체사상의 국제정치적 시각은 우리식 사회주의의 견결함에 대한 변함없는 충실성으로 대변된다.

다섯째, 남북통일문제를 바라보는 주체사상의 시각에서 핵심은 ‘자주성의 실현’여부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남한을 자주화하는 것이 자주적 통일을 위한 전제이며 담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송두율이 말하는 북한이 과연 그들의 가지고 있는 주체사상처럼 견고하고 당당한 민족적 주체의식이 서있는 것일까? 아니면 김부자둘의 주체의식인가 그 판가름을 송두율 스스로도 해내지 못하고 있다.

 

3. 김훈의 정치성(역사허무주의와 삶의 정치)

김훈의 정치성은 인간실존의 사실로부터 발원해 무의미의 의미를 획득하는 허무주의의 도정 속에서 탄생하고 사멸하는 운동 그 자체이다. 김훈이 보기에는 극단화된 진리의 정치야말로 건전한 삶을 위협하는 최악의 추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진리의 정치가 흘러넘치는 한국현대사의 시평(時平)에서 ‘반시대적 고찰’에 가까운 김훈 문학의 정치성은 진리정치의 과잉에 대항하는 또 다른 과잉의 수사학이다.

 

라파엘의 집 [출처] 거리의 칼럼 - 라파엘의 집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 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 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 이라는 불우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다. 시각 · 지체 · 정신의 장애를 한 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아들이다. 술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아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 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Ⅱ. 시대의 개입

극단의 시대는 극단의 담론을 산출하며, 역으로 극단의 담론들은 극단의 시대라는 만화경을 연출한다. 한국사회는 지금 극단의 시대를 뜨거운 열병을 앓으면서 통과하는 중이다. 이 모든 것이 흔들릴 때 지식인의 임무는 성찰적 균형 속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다.

1. ‘창조적 실용주의’비판

이명박 정부는 ‘이념에서 실용으로’라는 구호로 시작을 한다. 그들이 들고 온 이 실용 담론은 이전 시대 의 구호 다시 말해 민주화, 통일, 사회정의, 역사청산 등의 표어를 낡게 만들고 그 빈터에 취업과 실업, 먹을거리와 건강관, 집과 땅값, 교육문제, 여러 주체들의 자기표현과 소통에의 요구 같은 미시담론을 들고 왔다. 그러나 이런 실용주의 정부의 국정철학을 보면 “선진화를 통한 세계일류국가를 국가비전”으로 삼고, “경제의 선진화, 삶의 질의 선진화, 국제규범의 능동적 수용과 창출 등을 통해”그 비전을 달성하고자 한다. 결국 이명박 정부도 실용을 표방하는 척 하지만 그들 자신도 강한 이념을 바탕으로 출발한다. 그러므로 ‘이념을 위한 이념에서 실질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이념으로 ’가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으로 보인다.

MB 실용주의가 세 달 남짓한 짧은 통치기간 동안에 충분히 노정하고 있듯이 ‘독단적 일방향성과 자의적 무방향성의 혼란스러운 병존이라는 모순적 상황’을, 이념이자 동시에 행동규범으로서의 실용주의가 이미 상징적으로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단적 목표와 임기응변의 수단이 성급하고 서툰 방식으로 연결될 때 연속적 위기상황과 극적인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진다.

전적인 예로 광우병 사태가 있다. 정부는 광우병 사태의 진원지를 특정언론과 정치세력, 연예인들이 사주하고 미숙한 청소년과 시민들이 그것에 맹종하는 일방향적 선동과 조작의 산물이라고 진단한다. 오호 통재라 그것처럼 멍청한 시각이 어디 있을까? 정부의 진단과는 달리 광우병 사태는 민초들의 시각에서 볼 때 ‘나’의 구체적 삶의 현장을 위협하는 데 대한 자연스러운 대응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상에서 먹거나 접하게 되는 물질이 부적절한 정부조치 때문에 직접 나의건강권과 생명권을 침해할 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절절한 분노와 불안감의 표현이다.

이명박 정부는 ‘위에서 누라는 독단적 목표와 임기응변으로 전락한 수단’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면서 실질적 성과도 창출하지 못하고 소통에도 실패하는 양면적 위기의 양상을 노정하고 있다. 창조적 실용주의가 말과 일의 지평 모두에서 비틀거림으로써 온전한 실용의 이념과는 아주 먼 거리에 머물러 국민을 힘들게 하고 있다.

2. 공공성(公共性)과 리더십의 위기

이명박 정부 실용의 핵심내용은 박정희식 발전국가 모델을 잣대 삼아 성장 드라이브의 강공을 펴나가겠다는 것이다. 필요할 때는 법과 질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정권의 편의 위주로 운용하는 점에서 신권위주의의 혐의가 짙고, 시장논리로 공기업 민영화를 밀어붙이면서도 정치논리를 뒤섞으며, 대기업과 기득권 계층에 친화적인 이명박식 실용주의 정책은 한국형 신자유주의의 특징을 여실히 드러낸다. 창조적 실용중의의 본 모습은 최고 공직자인 대통령을 ‘한국호의 CEO'로 명명하는 데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러나 이런 어법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이런 비유가 나라의 근본적 존재이유인 공공성의 이념을 축소하거나 은폐한다는 점이다.

이명박식 실용주의의 최대 문제점은 공공성의 결여로 집약된다. 집권 초기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해 진정될 기미가 없는 이명박 정부의 난맥상은 사실 공공 마인드의 부족 또는 부재로부터 유래되는 것처럼 보인다. 리더십의 요체 가운데 하나는 인사정책인데, 인수위 시절부터 오늘까지 이명박 정부의 인사를 특징짓는 것은 대통령과의 사적 친소관계가 공적 영역을 식민화시킨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을 중요하고 특정지역과 특정 집단 출신만을 신임하는 대통령의 리더십 아래서는 천하의 인재를 널리 구해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국정의 근본이 망각된다. 이런 권력 시스템 아래에서는 눈치 보기와 줄서기의 달인들이 능력과 도더성을 갖추 이들을 제치고 출세가도를 질주하게 된다. 그것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속성이다.

공공성이 축소와 망실(亡失)은 정치적 리더십의 쇄소화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권 초기임을 감안할 때 실용정부와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도가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낮은 데는 최고 공직자이 대통령의 공공마인드 부족이라는 근본 이유가 있는 것이다.

3. 극단의 시대에 중심잡기

21세기 한국사의 발목을 잡으면서 공론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이념논쟁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자유민주주의 국가정체성을 지키자는 이른바 뉴라이트(New Right)운동의 대두와 학산도 이 연장 선상에 서있다.

뉴라이트는 이론과 실천의 빈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한다. 즉 존재하지도 않은 적을 설정해서 공격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권이 때로 진보적인 것처럼 드리는 이야기나 제스처도 부사하지만 실제정책의 맥락에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노선을 계승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그들은 우파이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이들을 좌파라 부르며 서로 도토리 키제기 하듯이 싸움을 걸고 있다. 변종우파세력인 그들이 실체가 희박한 이념논쟁을 증폭시켜 노무현 정권에 대한 국민일반의 반감을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세우고자 ‘동원’한다. 그들은 이지지점에서 그 퇴행성이 증명된다.

4. ‘악의 평범성’으로 역사 청산론을 돌아본다.

우리 사회의 역사 청산은 크게 해방 전 친일잔재청산과 해방이후 한국전쟁시 국가범죄와 군사독재의 유산청산으로 나뉠 수 있다. 이러한 역사 청산에서 제일 경계해야 할 사항은 정치공동체 내의 한 파당에 의해 과거사성찰이 악용되는 데 있다. 역사청산의 목적은 전체 정치공동체의 통합을 인륜성의 원칙에 맞추어 실현하는 데로 모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청산작업의 요체는 역사가 본질적으로 인위적 청산에 저항하는 생동하는 흐름이라는 역설적 교운을 되새기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청산의 과녀은 악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논리적 필연이다. 역사가 선만구현했더라면 청산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스럽고 부끄럽게도 인간의 역사는 반드시 악을 포함한다. 따라서 역사청산을 운위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단히 성찰해야 한다.

악은결코 궁극적으로 해소되거나 척결될 수 없으며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역사에서 가장 나쁜 경우 악은 확대생산된다. 가장 좋은 경우에도 악이 축소 재생산되는 경우는 드물다. 역사에 주체적으로 대응하는 하나의 방식은 그것을 부단히 논의하고 반성해 기억의 정치를 활성화시키는 것ㅇ다. 이는 역사적 책임규명을 무화시키는 역사허무주의의 발언이 아니며, ‘모두가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는 역사도덕주의로 후퇴도 아니다. 악의 평범성 테제는 선악을 너무 쉽게 전유(專有)하려는 정치적 인간의 오만을 꾸짖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삶과 집합적 역사 앞에 좀 더 겸허해야 한다고 고언(苦言)한다.

5. ‘진보논쟁’은 과연 진보적인가

진보는 잘못된 현실을 고치는 것이며‘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해온 부끄러운 역사’를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양심세력인 데 비해, 보수는 불의와 부패 위에 쌓아온 기득권에 안주해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열린사회의 도래를 반대하는 반동적 집단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여정부 자체는 진보라고 스스로를 말하는 보수주의였다. 그러니 그들은 진정한 진보를 말하기 보다는 편가르기와 자신의 세력 확대를 위해 노력을 했을 뿐 진정한 사회 진보를 위해 노력하지 않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뜨겁게 진행되는 진보논쟁으 이념의 존재이유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대저 이념이 인간을 위해 있는가, 아니면 인간의 삶을 위해 애념이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반성이 결여된 논쟁은 현학적 이론투쟁으로 이어지면서 싸움을 위한 싸움으로 변질되기 쉽다.

삶의 곤핍함을 보통사람들에게서 완화시켜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진보다. 미래의 헛된 희망으로 현재의 곤고(困苦)함을 메우려는 논자들은 사이비진보에 불과하다. 평균적 시민의 생활세계에서 호소력과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은 논설들은 공론(空論)일 뿐이다. 긴박한 서민의 구체적 삶과 겉도는 논쟁은 무익한 자기위안의 정열에 지나지 않는다.

6. 민족중의로 북핵문제를 조명한다.

북핵개발의 정치적 논리는 독립과 자주성의 확보라는 북한판 민족주의 담론에 의해 견인된다. “작지만 당당한 주권국가인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을 무력으로 압살하려는 미제국주의의 책동에 대항해 공화국의 국체(國體)를 보위하기 위한 정당한 자위조치로서 핵을 가졌다”는 것이 북한의 논리이다.

이러한 논리는 초강대국 미국의 전횡에 일전불사의 기세로 대항하는 북한의 결기는 악명 높은 것이지만 적지 않은 한국시민들, 특히 한국전쟁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젊은 세대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북한의 국가통치이념이자 헌법적 원리인 주체사상은 북한판 초민족주의이며 민족의 자주성이 핵심화두다.

“기존 핵보유국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전제와 함께 핵보유국이 미보유국을 핵무기로 위협하거나 공격할 수 없다.”는 최소한의 원칙을 가지고 핵확산을 막으려 수립된 대표적 불평등 국제조약이 핵확산금지조약(NPT)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미완의 조약마저도 세계를 전쟁의 위협으로 몰아넣으며 국제조약에 균열을 가했다. 북한 핵실험은 바로 그 빈틈을 날카롭게 파고든 것이다. 핵실험 후 한국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미국책임론의 배경에는, 패권국가 미국의 정체에 대한 한국시민들의 대중적인식이라는 씨줄과 북한민족주의의 감성적 호소력이라는 날줄이 서로 교차하는 것이다.

민족주의 선진성과 전향성을 측정하는 두 잣대인 자주성과 민주성 가운데서 먼저 민주성의 기준을 북한에 적용해보기로 하자. 이름과는 달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민주주의체제도 아니며 인민이 주권인 국가도 아니고 제대로 된 공화국이라고 할 수도 없다. 수령절대주의라는 봉건적 신정정치에 대한 시대착오적 합리화에 불과하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자주성 명제는 궁극적으로 국가나 민족을 이루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인민)의 자유롭고 성숙한 삶에 의해 판정되고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 그 체제의 원리적 반민주성은 자주성의 실질적 내용조차 공허한 것으로 만들고 만다. 민주성과 자주성의 준거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북한민족주의에서 어떠한 진보성도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는 북핵실험이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시민사회의 시각에서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숙한 한국민족주의의 이름으로도 엄중히 규탄되어야 하는 반동적 작태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책을 나오며...

윤평중의 책 속에서 중심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전반적으로는 진보와 보수 양쪽을 모두 다 비판하는 척 하지만 윤평중의 언변속에서 진보는 진보스스로 거대한 공룡이 되어 무너져 내려 버려 퇴화된 가치관과 같은 뉘앙스를 풍기며 가끔 조소까지 보인다. 하지만 새로운 보수라고 하는 이들을 대할 때는 이 새로운 보수가 어떤 방법을 행 할 때 가장 좋은가를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윤평중이 의도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나침반은 보수를 향해 있으며 그 보수의 가치가 조금 더 새련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의중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어쩜 스스로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그리고 지식인이라고 지칭하기에 오는 오류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어 놓은 수많은 진리 속에 누구의 것이 지식이고 누구의 것은 지혜인지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일년 일년을 살아가면서 지혜를 쌓아가고 그 지혜가 쌓여 새로운 지식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을 간과하고 자신을 지식인이라 함부로 지칭을 한다면 그건 심각한 자만의 오류로 시작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굴곡 된 안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윤평중: 1956년에 태어났다. 고려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남일리노이 주립대학교에서 사회철학으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버클리 대학교와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있었으며 뉴저지주 럿거스대학교에서 연구교수를 지냈다. 2008년 현재 한신대 대학원장 및 철학과 교수, 《비평》과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으로 있다. 저서로는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담론이론의 사회철학』『주체 개념의 비판』『논쟁과 담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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