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2 일 때 아마도 대략 15년전인가 보다...(우와 벌써 15년 전이야기이구나! ㅜㅜ) 친구들과 야학에 대해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세상에 야학이라는 공간을 처음 접한 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참 세상 불공평한것 같다. 왜 누구는 편히 앉아서 공부를 하고 누구는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를 해야 하는 걸까? 똑같은 사람이라면 최소한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동등해야 하지 않는 걸까? 나는 대학에 들어가면 꼭 야학 교사가 될꺼다.(이렇게 말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대학에 들어가 야학이라는 공간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내 생각이 많이 틀렸구나를 느꼈다. 야학이라는 공간에 대해 상상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곳은 마치 내가 고딩때 다니던 사설학원과 같은 공간이라는 착각을 했다. 교무실이라는 것도 있고 또 학생도 있고 등등등....그런데 내가 첫발을 디딘 야학이라는 공간은 그런 공간이 아니였다. 특히 야학이라는 공간에는 "교사"와 "학생"이라는 단어는 없고 "강학"과 "학강"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강학"은 강의하는 학생 다시말해 지식은 다른이 보다 조금 더 많이 있을지 모르지만 세상살이와 같은 인생 경험은 없는 사람을 지칭하고, "학강"은 그와 반대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곳에서는 지식의 권력보다는 삶의 고민이 더 중요한 사실을 야학에 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서투루게 야학을 시작하며 조금씩 조금씩 그곳에 가까이 갈 수록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작은 소량의 지식이라는 것을 점점더 실감을 했다. 특히 노동자라 불리우는 학강 여러분들의 여러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자리에 내가 서있는 이유가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을 찾자면 이00이라는 분이다. 어느날 야학에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심심하기도 해서 기타를 들고 노래를 했다. 그 때 한창 선배에게 배운 민중가요에 맛들인 나는 걸쭉하게 "노동의 새벽"이라는 노래를 불러 대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후 학강이 한분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이00이었다. 그분은 조용히 내 옆에 와서 노래를 유심히 듣더니 이렇게 말을 했다. "그 노래 저좀 알려 주세요. 노래가 너무 제 마음에 와 닿네요." 그 순간 나는 신비한 것을 보았다. 단지 노래 몇줄이라고 생각한 그 노래를 듣던 그분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나는 순간 말을 멈추고 긴 숨을 쉴 수 밖에 없었다. 대학생이였던 나는 단지 허울 좋게 민가를 부르며 흥을 돗구고 있을 때 그 노래를 듣던 진짜 노동자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너무도 생각이 짧았다는 생각에 그 노래를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했던 생각이 떠오른다. 하종강씨는 노동자와 함께 생활하는 노동자를 위한 강사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왠지 가슴 한곳이 뻑뻑해짐을 느낀다. 그러나 그 뻑뻑함은 분명 아픔인데 왜 그 아픔이 다른 소설책을 읽을 때와는 다른 아픔으로 다가오는지 곰곰히 생각해 봤다. 아마도 그것은 진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 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늘도 수많은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 하루의 시간을 다른 이들을 위해서 보내고 있다. 누군가가 보면 너무 시간을 허비 하는 것 처럼 보이는 그 분들의 한 순간 순간은 어쩜 그 어느 누구 보다도 소중하게 쓰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