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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즐거움 - 문화적 교양인이 되기 위한 20가지 키워드
박홍규 외 지음 / 북하우스 / 2005년 11월
평점 :
1. 저자 조사
안타깝지만(?) 이 책의 저자는 무려 20명. 각 꼭지마다의 글쓴이가 다른 덕분에 저자 조사는 즐거이 생략하고 넘어간다. 혹 관심 있는 저자가 있다면 더 들어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 꼭지 끝자락에 3줄 가량의 작은 글씨로 소개되는 각 저자의 약력과 저서(또는 역서)가 소개되는 것을 참고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2. 내용 들어가보기
시작부터 익숙한 책이 있다. 책에서 데자뷰를 느끼기도 한다. 마치 주문해놓고 미처 뜯지 않았던 책 상자에 들어있을 것만 같은 책이었다. 어쩌면 책 제목이 직접적으로 공감되는 표현이어서 그러하였을까? - ‘교양의 즐거움’ – 그렇다. 내게 교양은 즐거움이다. 이 책은 정말 즐거울까?
여는 글에서부터 잡아 끄는 매력
단문의 시대다. 비문도 넘쳐난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시대, 흡수도 연산도 소통도 반응도 빠르니 사는 게 속 편하긴 하다. 빠른 것은 아름답고, 짧은 것은 쿨cool하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의 삶은 단조롭고 가볍다. (5)
쿨cool이 과하면 지루하다. 때로는 쿨cool한 것 또는 사진 한 장과 같은 단발성보다는 진지하고 길게 생각해보고 소통하는 것들을 필요로 한다. 단조로운 삶에 자극을 줄 수 있는 ‘다리’의 역할로 교양의 즐거움이 다가온다.
입문서는 아니다
책을 읽기도 전에 섣부른 추측을 해보진 않았지만 다양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책들에 대한 선입견은 약간 발동하였었다. 조금은 얕게 그러나 위트 넘치는 글 솜씨가 발휘된 그러한 종류는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비교적 심도 있는 첫 쳅터를 읽으며 누워 있던 자세에서 책상에 앉게 되었다. 쉽지 않다. 잡지의 별책부록에서 시작된 책이기에 가볍게 봤다면 그 생각은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예전에 접하였던 ‘철학 콘서트’나 ‘나의 고전 읽기’와 같은 어르고 달래며 그 분야로 이끌어주는 선생님 같은 책이기보다는 강의 요약본과 같은 정제된 느낌이 강하였다. 그러나 나와 같은 기초 교양자들이 굳이 겁낼 필요가 없는 것은, 둘째 쳅터부터는 테마 자체도 대중적이어서, 즉 익숙하고 각자의 관심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꼭 다 읽어야만 하나?
나는 리뷰를 쓰기 위해 끝까지 읽었다. 그러나 교양의 즐거움을 위해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섭렵해야 할 책은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기분으로 선별 독서를 하여도 무난하다. 왜냐하면 이 책의 20가지 키워드는 연관되어 있지 않다. - 저자가 각기 있는데 그들이 모여서 토론하여 만든 책이 아니라면 당연한 결과 아니겠는가. – 그리고 잡다하게 혹은 광범위하게 알고 있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몇 가지 테마에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마치 오늘의 신문을 1면부터 마지막 광고까지 다 읽었다 하여도 대개 기억에 남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정보나 관심사에서 덧대어진 기사가 주를 이룸과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중간 정도까지는 인내를 갖고 순서대로 읽다가 후반부에서는 좋아하는 것들부터 골라 읽었다. 한 때 일본 소설에 심취해있었기에 일본 문학 파트가 반가웠고 중미에서 살았던 탓에 중남미 문학의 위상을 한껏 발언해준 중남미 파트가 술술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국민 관심사가 되어 버린 뮤지컬 이야기는 오히려 부족한 양이 아쉬웠다.
‘한국인’ – 을 위한, 이 쓴, 의 교양서
우리나라 교수님들이 많이 저자로 참여하였다. (20명 중 14명이 기본 소개가 ‘교수’로 되어 있다.) 그러기에 중간 중간 폭소가 터져 나오는 위트는 찾기 힘들다. 교양 과목 첫 수업 시간 강의로 생각하면 이 책의 스타일을 감 잡을 수 있다. 주로 역사적인 배경을 필두로 하여 사실적인 접근을 하며, 한국인의 시각에서, 그리고 현대에서 차지하는 역할이나 비중을 주견을 곁들여 풀어 나간다. 외국에서는 매우 유명하지만 한국에서 약한 지지도를 가지고 있는 문화인들에 대한 길고 긴 설명이 지속되어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는 번역서의 단점이 없다. 한국 사람인 나를 잘 아는 나와 같은 한국인이 저자들이기에 가져다 주는 익숙함이 책에 빠지게 할 것이고 몇 가지 나의 테마를 찾았다면 이 책에서 소개해주는 대로 움직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3. 초서
여는 글 ∥ 교양은 소통의 즐거움이다
단문의 시대다. 비문도 넘쳐난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시대, 흡수도 연산도 소통도 반응도 빠르니 사는 게 속 편하긴 하다. 빠른 것은 아름답고, 짧은 것은 쿨cool하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의 삶은 단조롭고 가볍다. (5)
르네상스 문화의 핵심 ∥ 생명∙휴머니즘∙유토피아 – 박홍규
르네상스에서는 신대륙의 발견(이는 유럽인의 시각에서 하는 말이다)과 탐험, 천동설을 대체한 지동설, 가톨릭과 봉건제의 몰락, 도시국가 및 국민국가의 탄생, 민족언어의 발전, 상업의 성장, 종이∙인쇄술∙항해술∙화약 등 신기술 발명 및 응용이 일어났다. 문예와 학문뿐만 아니라 이 모든 변화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문화’란 단어를 쓸 수밖에 없다. (17)
르네상스는 자유∙자치∙자연이 특징인 문화개혁이라 할 수 있다. (19)
<모나리자>는 어쩌면 생명력의 근원인 물을 배경 삼아 임신한 여성 노동자를 그린 최초의 그림이 아니었을까. (24)
사서(四書)의 핵심 ∥ 우주의 원리, 인간의 도리 – 최재목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이 담긴 어록이다. 공자와 그 제자들이 유교의 이상인 『대학』의 도를 어떻게 실천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이른바 유교이론의 구체적 실천이 생생하게 담긴 자료집이다. (71)
배움을 통한 자기완성은 바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바로 서는 기쁨’이다. (72)
우리가 사서를 읽는 것은 우선 한문이라는 과거 중국의 글 속을 헤매는 이른바 고고학적인 발굴 작업과 같은 점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고전 ‘읽기’라는 작업 속에는 단순히 그 무언가를 많이 아는 지식의 축적과 집적만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읽는 ‘지금’의 ‘내’가 나의 앞날(미래)에 대해 어떤 선지자적 예언자적인 빛과 소리를 발견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찾아 읽어 내려가며 흘리는 땀방울의 크기만큼, 사서는 분명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는 지혜의 길을 터주며 미래를 향한 적지 않은 시사를 가져다 줄 것이다. (79)
세계 문학의 새 중심, 중남미 ∥ 마술과 환상, 인간을 꿰뚫다
세계 문학계에서 중남미 작가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백년의 고독』의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1998년에 타계한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 민중시인으로 잘 알려진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 등 (82)
그러나 이렇듯 황금기를 구가하던 ‘붐’소설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그 기세가 꺽이고 만다. (86)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모두는 작가 마르케스가 특별히 고안해내거나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런 기법이나 사유는 중남미 자연이나 문학적 풍토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래서 중남미 문학이나 예술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전통이다.
간단히 말해 마술적 사실주의는, 어떤 대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현실 그대로 재현하며 문학적 왜곡을 피해 허위적인 것을 거부하는, 문학사전에서 정의하는 그런 리얼리즘이 아니라 마술적 또는 마법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중남미 세계에서만 가능한 특별한 리얼리즘이다. (91)
마르케스, “나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한 것이 아니며 내가 일체(一體)된 그 결과로 알고 있는 현실을 찾아내기로 했습니다.” 이 말은 자연과의 동일화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는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그에게는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실’로 바뀜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리얼리즘에 대한 마르케스의 언명인 동시에 메타포의 본질에 대한 훌륭한 설명이다. (92)
이종교배 시대의 일본문학 ∥ “나는 국적이 없다” – 윤상인
약간 고급스런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것을 독자와 맺는 이상적인 관계 설정으로 본다. (98)
평론가 가와무라 사부로는 이 소설(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을 “생활의 리듬을 멀리하고 단지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말만을 적어놓은, 말의 콜라주와 같은 소설”이라 평했다. (99)
대개 미국산 대중문화와 자본주의적 사고로 구축된 문학세계는 당연히 ‘일본적’ 감성과는 동떨어진 무국적의 색깔을 띨 수밖에 없지만, 바로 이 점이야말로 하루키 등의 소설이 여러 국경을 넘어 통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제공해준다. (103)
오늘의 프랑스 소설 ∥ 서점 한구석과 고독한 문제작을 찾아 – 이재룡
프랑스 내에서만 대충 천 개가 넘은 문학상이 있지만 대부분 선별의 의미보다 위기에 빠진 문학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격려와 자축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는 형편이다.
독자의 호기심은 문학 교수나 평론가의 진지한 추천보다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댄 화제작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128)
2000년대의 프랑스 문학 풍경을 한눈에 훑어볼 수는 없는 일이다. 수백 종의 포도주를 각자 입맛에 맞춰 골라 음미하듯, 프랑스 문학은 독자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고 독창적인 길을 모색하는 듯하다. 소설 한 권을 100만 명이 읽는 곳보다 100권을 1만 명이 읽는 곳이 문학이 자라는 데 유리한 풍토일 것이다. (138)
‘제9의 예술’ 만화 ∥ 칸과 칸 사이, 피가 흐른다 – 성완경
한국에서 1년에 발행되는 만화 타이틀은 약 1만 종이며, 이는 전체 출판물의 4분의 1을 넘는다 (26.5%). 부수로 따지면 그 수치는 더욱 증가해, 4200만 부로 전체 출판물의 35.9%를 점하고 있다(일반 단행본 만화와 학습만화를 합친 숫자임). (163)
현대미술, 어떻게 볼 것인가 ∥ 일상을 들쑤시는 ‘불편함’의 미학, 그 미학을 즐겨라 – 박신의
개념을 사는 컬렉터(소장가)는 얼마나 위대한가. 그는 투자가치로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예술가의 정신적 후원자로 작품을 구입한다. 그러니 멋진 작품이 계속 만들어지기 위해 멋진 컬렉터가 나와줘야 한다. (186)
어쩌면 우리 대학의 미술 교육 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기술과의 결합을 꿈꾸는 예술로 말이다. 그래서 잘 된다면, 우리는 미술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매일 접하는 영상문화 속에서도 충분히 예술적 감성과 개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변화가 예술가들이 거의 한 세기 이상 꿈꾸어온 진정한 ‘미술의 확장’이 아닌가. (194)
한국 건축, 음화와 양화 ∥ ‘사는 집’에서 ‘느끼는 집’으로 – 강혁
‘건축architecture’은 조형적 기념비적이며 예술적 질과 가치가 있는 특별한 건물을 칭하고, ‘건물building’은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지은 평범한 집을 가리킨다. (218)
일본인은 자의식 있는 건축가를 양성하되 조선인은 단순한 건설 기술자로 키우려 했다. (221)
세계 대전은 모던 건축에 커다란 시련을 주었다. 특히 나치는 모더니즘을 탄압하여 많은 모더니스트들이 미국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224)
한국 건축계가 1980년대에 서구의 탈근대 담론을 답습한 것은 우리 건축문화의 식민성을 여지없이 드러낸 사태였다. 서구인들이 비판하는 근대가 낳은 역기능을 삶 속에서 절실하게 느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까지 최소한의 근대적 합리성조차 성취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보아야 합당할 것이다. (233)
재즈, 변용의 역사 ∥ 한번 간 길은 다시 가지 않는다 – 김현준
그러나 필자는 지금껏 삶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재즈를 듣는 이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오랫동안 재즈에 빠져 허우적대는 마니아일수록 경제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음악에 몰두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재즈는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지만 한편으로는 강한 중독성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역설적 미학이 있다.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스스로 찾는 이에게만 자신의 매력을 마치 옷자락을 살짝 들어올리듯 보여주는, 그런 음악이 바로 재즈다. (288)
뮤지컬, 알고 보면 더 재미있다 ∥ 삶의 당의정 혹은 카타르시스 – 김학민
대개의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은 이러한 관객의 ‘회피주의 심리’에 충실하다. (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