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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밑그림은 불안과 모호함과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란 걸 잠시 잊고 살았다. 어둡고 추운 거리를 오래 걷다보면 불 켜진 모든 창 안은 순결한 기쁨으로 가득해 보이지. 손톱으로 긁어내기 전엔 밑그림은 보이지 않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운명의 문신이 내 어깨 어딘가에 새겨져 있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견고한 지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예술가. 나는 그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이즈음의 나는 인생의 바닥을 떠나왔다고 생각했다. 차갑고 어두운 수면을 벗어나 참았던 들숨을 내뱉으며 이제는 삶이 주는 달콤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는 날들이 가까웠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다락의 바닥에 펼쳐진 내 사진들, 일용할 양식과 바꾸고는 그토록 나를 포만하게 해주었던, 그러나 이제는 함부로 박스에 처박아둔 기자재들, 베르나르 포콩이나 맨레이의 사진집들이 붉은 노끈으로 묶여져 쌓여 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것들은 지금 내가 그것들과 씨름했던 진창의 시간보다 더 어둡고 끈적이고 가망 없는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는 사실을 아프도록 생하게 깨우쳐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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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미경
사진은 기억의 저장소다. 이따끔 그것은 지난 날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고 그 안에 시선이 젖어들며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하지만 삶이란 사진 한 장이 주는 낭만에 흠뻑 젖어들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색이 바랜 사진은 주인공의 옛 사랑을 떠오르게 하지만 그를 맞이한 건 낭만이 아니라 배신이었듯이.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조건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의 삶은 그럼에도 편하지가 않다. 삶의 밑바닥이 그를 끌어내려 가라앉히려 하고 그는 그것들과 끈적이는 투쟁을 벌인다. 그리고 옛 사랑의 배신과 함께 밀려오는 아픔과 슬픔. 그 앞에 무기력한 주인공의 모습이 아프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그가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릿빛 사진을 바라보며 행복했던 지난 날의 추억을 떠올리는 주인공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정미경의 소설은 종종 연민의 감정을 일으킨다. 세상은 차갑고 주인공들은 나약하고 무기력하다. 그러나 절대 그녀의 숨결은 끈적이지가 않다. 그 진창 속에서 그녀는 아름다움을 표현할 줄 안다. 여성적이지 않은 그녀의 문체가 좋고, 아픔을 마주하게 하는 그녀의 시선이 맘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