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인가 나는 문득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는 괴로운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는 늘 누군가 내가 알던 사람이 죽을 것이고 내가 알던 거리가 바뀔 것이고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자꾸만 내 안에 간직한 불빛들을 하나둘 꺼내보는 일이 잦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사탕을 넣어둔 유리항아리 뚜껑을 자꾸만 열어대는 아이처럼 나는 빤히 보이는 그 불빛들이 그리워 자꾸만 과거 속으로 내달았다. 추억 속에서 조금씩 밝혀지는 그 불빛들의 중심에는 뉴욕제과점이 늘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서 자라고 어른이 되는 동안, 뉴욕제과점이 있었다는 사실이 내게는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제는 뉴욕제과점이 내게 만들어준 추억으로 나는 살아가는 셈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가 나를 살아가게 한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다음에 나는 깨달았다. 이제 내가 살아갈 세상에 괴로운 일만 남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도 누군가에게 내가 없어진 뒤에도 오랫동안 위안이 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삶에서 시간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그저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것들이 실은 내 안에 고스란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닫게 됐다.
 
   

 
김연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 뉴욕제과점 90페이지

 
  기억이란 선택된 과거라는 말처럼, 무의식중에 선택되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 마음 속에 작은 풍경을 드리운다. 특별한 추억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그래서 먼훗날을 위해 추억을 만들고자 애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추억이란 게 꼭 튀는 뭔가가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문득 떠올리며 눈앞의 현실을 잠깐 등지고 사색에 잠기게 만드는 일들이, 혹은 사람들이, 사물들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자신만의 풍경화를 그려나가고 있고,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때때로 나는 유년 시절에 뛰놀던 거리를 떠올려보곤 한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떠나왔던 그 거리가 짝사랑하던 남자애의 소식만큼이나 궁금해지는 것이다. 첫 서리의 경험을 맛보았던 석류나무가 있던 집, 불장난을 하던 집앞 공터, 우리의 장난에 언제나 무표정했던 짱깨 아저씨를 잔뜩 약올리고 숨었던 담벼락, 소꿉장난을 하던 친구네 집 옥상, 내 여드름을 짜주시던 늘 웃는 얼굴의 아저씨가 있던 약국, 집인지 가게인지 미로인지 알 수 없었던 친구 아버지네 철물점, 방과후면 단짝 친구와 달려가 책을 읽던 책대여점, 어린 가슴이 설렐 정도로 예쁘장한 오빠가 카운터를 보던 수퍼마켓 등등. 그곳을 떠나온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문득 궁금해진다. 10년 전 그 거리가 얼마나 달라졌을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어느새 기억 한 켠의 풍경화를 장식하게된 그곳들이 그대로 있을지. 아마도 이미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 그 거리 풍경이 많이 바뀌었을 것이고 당연히 개발과 경쟁논리에 따라 거의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단지 이것들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내가 알던 뭔가가 점점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추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김연수의 뉴욕제과점을 읽기 전엔 미처 몰랐던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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