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오르다 - 이성복 사진에세이
이성복 글, 고남수 사진 / 현대문학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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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이 제주의 오름을 찍은 흑백사진 한 장을 보면서 어디까지 사유의 두레박을 넣어 생각을 길어올리는지, 그렇게 길어올린 생각의 덩어리들을 어떻게 빚어서 글로 만들어내는지... 도공으로 치자면 어디서부터 고운 흙을 얻어서 어떻게 주물거리고 또 어떻게 도자기를 빚는지 그 과정을 여과없이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결국 좋은 글이란 깊은 사유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시인은 결국 시인이면서 또 철학자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깨닫게 한 책. 그 자신이 언어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언어로 대상을 파악하겠다는 것은 부엌칼로 박테리아를 해부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십년 간 그 치열한 한계와의 싸움을 통해 대가가 되었을 그가 빚어낸, 언어의 한계를 단숨에 무너뜨려버리는 글귀 앞에서 오래 오래 한 페이지에 머무르게 하는 그런 책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원추형 모기장처럼 작은 오름들을 둘러싸고 있는 큰 산의 희미한 윤곽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장모님이 사놓으셨던 피라미드 구조물을 생각나게 한다. 덮개도 없이 알미늄 기둥으로만 이루어진 그것은 좋은 기운을 빨아들이고 나쁜 기운은 몰아낸다는 특수한 장치로, 그 속에서 누워 자면 만병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몇 개월을 병원에서 지내셨으니, 장모님이 그것을 얼마나 사용하셨는지 모르겠다. 상을 치른 뒤 분해한 알미늄 파이프를 비닐끈으로 묶으면서 그 속에 미이라처럼 누워 계셨을 장모님을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신비도 그러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사라지지 않는 신비란 없었다. 어떤 신비도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신비였으며, 믿음이 끝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사라진 신비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 법은 없었다. 아무리 쫓아도 밥상 위로 돌아오는 파리떼처럼 신비는 다른 사람, 다른 물건에 다시 깃들었다 

속되게 말하자면 언어로 대상을 파악하겠다는 것은 부엌칼로 박테리아를 해부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껏해야 언어는 풀잎이 풀잎닾다거나 갈대가 갈대답다는 동어반복으로써 대상 앞에서의 무력감을 표현할 뿐이다. 그 무력감의 고백이야말로 언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며, 그 겸허한 결단에 의해 대상은 관념과 이미지로 이루어진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런 점에서 언어의 자기부정을 통해 사물의 본성을 드러내는 시 또한 '살신성인'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세상의 무덤들이 삶의 죽음이며 동시에 죽음의 삶이듯이, 하늘의 별과 사막의 우물, 공중의 방패연과 물 위의 방주도 서로 다른 것이 아니리라. 광막한 세상에서 외눈 주사위처럼 내던져진 그것들은 언제, 무슨 까닭으로 던져졌는지, 언제까지 유형의 세월이 계속될 지 알지 못하니, 검은 삼나무들의 흉흉한 장벽으로 둘러쳐진 이곳이야말로 천혜의 도형지가 아니겠는가. 날은 어두워졌는데 오름의 눈 덮인 밤은 더디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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