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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50
문태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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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셨네
내가 그대에게 하는 말은 다 건네지 못한 후략의 말
그제는 하얀 앵두꽃이 와 내 곁에서 지고
오늘은 왕버들이 한 이랑 한 이랑의 새잎을 들고 푸르게 공중을 흔들어 보였네
단골 술집에 와 오늘 우연히 시렁에 쌓인 베개들을 올려보았네
연지처럼 붉은 실로 꼼꼼하게 바느질해놓은 百年이라는 글씨
저 百年을 함께 베고 살다 간 사랑은 누구였을까
병이 오고, 끙끙 앓고, 붉은 알몸으로도 뜨겁게 껴안자던 百年
등을 대고 나란히 눕던,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그 百年이라는 말
강물처럼 누워 서로서로 흘러가자던 百年이라는 말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하루를 울었네
............................................문태준, '百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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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울대가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기어이 마지막 문장처럼 눈물이 났다. 문태준이란 시인을 참 뒤늦게 알게 됐는데, 이 사람 참 대단하다. 자기 맘대로 사람을 웃고 울린다.
유행처럼 번진 산문형 시가 아닌 것도 마음에 들고 - 시는 운문일 때 좀 시답지 않나 싶은 나만의 생각이다 - , 우리말과 고유의 정서를 잘 담아낸 것도 참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시인이라고, 작가라고, 소위 지적허영에 빠져 뜻도 알 수 없을 만큼 온갖 잘난 척을 시 속에 담아둔 치기들과 달리, 간결함 속에 강렬함을 담아낼 줄 아는 지혜가 빛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보니 깨달은 건 단순함 속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요, 쓰다보니 깨달은 건 소박한 음식이 몸에 좋은 것처럼 꾸미지 않은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
진달래꽃이라는 명시가 탄생하기까지 김소월은 3년 동안 퇴고를 반복했다는데, 문태준도 이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 하나를 두고 얼마나 고심했을 지가 선하다. 상이 무슨 그리 대수랴만은 2006년에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문태준, 그가 현대판 김소월로 오래 오래 남아주길 바란다.
위의 시가 나를 울렸다면, 마치 억새로 코끝을 간질이는 것 같아 배시시 웃음이 새어나온 시도 한 편 소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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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키지 않도록 살금살금
아무도 없는 부뚜막에서
장독대 낮은 항아리 곁에서
쪼그리고 앉아
토란잎에 춤추는 이슬처럼
생글생글 웃는 아이
비밀을 갖고 가
저 곳서
혼자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언제였던가,
간질간질하던 때가
고백을 하고 막 돌아서던 때가
소녀처럼,
샛말간 얼굴로 저 곳서 나를 바라보던 생의 순간은
...................................문태준,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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