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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설계자, 시부사와 에이이치 - 망국의 신하에서 일본 경제의 전설이 되기까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지음, 박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한국인이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일본으로부터의 식민지 역사는 일본을 분노와 증오의 감정으로 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또한 이러한 역사를 반성하고 사죄하며 뉘우치지 않는 현재 일본의 형태는 도저히 한국인들이 일본에게 호의를 가지지 못 하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미워하는 일본은 세계 2,3위 경제 대국이며, 아시아 속의 유럽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중국, 일본은 동아시아에 속하는데, 근대·산업화 시기 일본은 세계 열강으로 발돋움하고 조선과 중국은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착취와 억압을 받게 된 원인이 무엇일지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미움과 분노의 감정이 이러한 이성적인 사고까지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일본의 설계자-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왜 일본이 부국강병을 성공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학술적인 주장은 아니고, 메이지 시대에서 패전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일본에서 가장 저명한 경제인·기업인이 된다. ‘일본의 설계자-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본인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자전적 형태로 쓴 책이며, 당대의 시대 상황과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보여 준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일본의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먼저 일본 근대사의 주요 사건으로는 미국 페리제독에 의한 1854년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들 수 있다. 이는 조선의 1876년 강화도조약과 같이 일본이 서양 열강과 맺은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면서 강제적인 개항을 당했던 역사이다. 일본은 이러한 불평등한 조약을 맺고, 서양의 앞선 과학과 기술 및 사회 문화를 배우기 위해 수 많은 유학생을 보내며 그러한 지식을 받아들인다.
조선에도 미국의 페리제독처럼 개항을 요구하는 서양의 접근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은 이를 거부하여 병인양요(1886. 프랑스)와 신미양요(1871. 미국)가 발생하게 된다.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하는 고종 시대였다. 조선은 두 변란에도 불구하고 서양과 통상을 거부하며 쇄국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여기에서 일본과 조선은 역사의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본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지만, 조선이 일본과 뒤바뀐 역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만약, 페리제독이 일본이 아니라, 조선에 먼저 와서 개항을 요구하여, 조약을 맺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이다. 그렇다면 조선이 쇄국이 아니라 서양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더 일찍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전까지는 막부의 쇼균이 통치하는 봉건제 국가였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천황이라는 추상적 구심점은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각 영주들에 의해 지방이 통치되는 봉건제 사회였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일본인들에게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게 하였다. 막부로 중앙집권화를 하느냐, 천황을 중심으로 하느냐, 개항과 양이(쇄국)의 대립이 있었다. 그런데, 페리제독에 의한 불평등한 조약과 개항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막부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고, 막부를 타도하고 존왕양이의 생각이 퍼지게 된다. 결국 이런 사상이 성공을 하여 막부는 정권을 천황에게 양도하는 대정봉환을 거쳐 이듬해 메이지 유신(1868년)이 시행된다.
존왕양이파들은 막부를 타도하고 양이와 쇄국을 하려고 하였지만, 그들이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막부 체제보다 더더욱 서양을 배우고 닮아가는 사회체제를 가지게 된다. 막부타도를 주도했던 2곳의 봉건영주는 양이를 주장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이 겪었던 신미양요처럼 서양 열강의 강력한 군사적 보복을 당한 후 쇄국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서양 문물을 배우는 데에는 새롭게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이 타도한 막부 시대에 개항 이후로 서양을 배우기 위해 수 많은 젊은이들을 서양으로 유학을 시켰기 때문에 그 인적 자원을 메이지 유신은 활용하였다. 그 중 한 명이 ‘시부사와 에이이치’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서양의 사회문화, 정치, 제도, 기술, 과학을 놀랍도록 빠르게 받아들이고 그들 사회에 이식을 한다. 이것은 조선과 중국이 서양의 기술과 과학만을 받아들이려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막부 말기에 일본을 근대화시키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계급에 관계없이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고 유학을 시킨 막부 체제의 공헌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막부는 초기에 일본을 통일하고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한 역사가 있다. 이때, 네덜란드로부터 총기 만드는 기술을 받아들이고, 농민 출신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막부의 쇼군이 될 수 있었던 역사가 있었기에 서양 문물을 배우고, 모든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러한 역사는 영국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고 마그나 카르타를 작성 후 계급보다는 실력이 우선시하는 풍토를 만든 영국의 역사와 비슷한 맥락을 가진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러한 일본의 근대사의 역동적인 변화 속에 페리의 개항에서 메이지 유신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이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역사의 고증자료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주는 책이다.
한국인들은 식민역사 때문에 일본을 싫어한다. 그런데,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일본의 강병노선보다는 부국노선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부국이 된 나라는 강병으로 갔던 근대사를 본다면 좀 더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근대 산업화를 제일 먼저 일으킨 영국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군사력을 키워 세계를 식민지화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자국민을 위해서는 우파인 자국민들에게 이러한 노선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일본의 진정한 우국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