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죽기 하루 전 경성에서는  부친 김연창과 조모가 동시에 사망했다.

변동림은 경성에서 부산까지 열 두시간 기차를 타고, 다시 여덟 시간

관부연락선을 타고, 또다시 스물네시간 기차를 타고 동경에 닿았다. "

 

"화장을 끝낸 뒤 변동림은 유골을 수습해서 김소운의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변동림은 이상의 유골을 안고 기차를 타고, 연락선을 타고 다시 기차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온다. 이상의 유골은 이상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친가에서

몇 밤을 지내고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碑木에는 墓主 변동림의 이름이

기입되었다."

 

----장석주, <이상과 모던뽀이들>, 현암사, 2011, 349쪽, 352쪽-----

 

--------------------------------------------

 

이상이란 천재가 간 길 보다, 한 사람이 살다 간 마지막 길을  보는 것이 더 아렸다.

숭고함을 느낀 한 편의 시같은 문장!

 

이 책에서 저자는  마치 짐멜이나 벤냐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그러한 것처럼,

"대도시'라는 분석틀을 가지고 이상과 그를 둘러싼 문인들을 중심으로

1900년도 초반의 우리나라 근대기 문단 풍경을 그렸다.

 새로 생긴 대도시가 탄생시킨 모던뽀이들. 근대의 산보객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致 橡 树》

 
 
我如果爱你——
绝不像攀援的凌霄花,
借你的高枝炫耀自己:
我如果爱你——
绝不学痴情的鸟儿,
为绿荫重复单调的歌曲;
也不止像泉源,
常年送来清凉的慰籍;
也不止像险峰,增加你的高度,衬托你的威仪。
甚至日光。
甚至春雨。
不,这些都还不够!
我必须是你近旁的一株木棉,
做为树的形象和你站在一起。
根,紧握在地下,
叶,相触在云里。
每一阵风过,
我们都互相致意,
但没有人
听懂我们的言语。
你有你的铜枝铁干,
像刀,像剑,
也像戟,
我有我的红硕花朵,
像沉重的叹息,
又像英勇的火炬,
我们分担寒潮、风雷、霹雳;
我们共享雾霭流岚、虹霓,
仿佛永远分离,
却又终身相依,
这才是伟大的爱情,
坚贞就在这里:
不仅爱你伟岸的身躯,
也爱你坚持的位置,脚下的土地。
 
<떡갈나무에게>
 
* 옮겨봅니다. 참고로 이 시는 중국의 중등학교 <어문>교과서에 실린 시입니다.
 


만약 내가 너를 사랑한다면

절대 덩굴줄기를 타오르는 능소화처럼

너의 높은 가지를 빌어 자신을 빛나게 하지 않겠다

 

만약 내가 너를 사랑한다면

절대 치정에 눈 먼 새가되어

녹음처럼 푸르고 무성한 사랑만을 갈구하며

단조로운 곡조를 반복해 노래하지 않겠다

 

샘물처럼

일년 내내 청량한 위로를 보내는데 그치지않고,

험준한 산봉우리처럼

너의 고도를 높여 너의 위용에만 기대지 않으리라.

심지어 햇빛도

심지어 봄비도

아니, 그 모든 것도 내 사랑을 말하긴  충분치 않다.

 

나는 반드시 네 가까이 한 그루 목면수가 되어서

나무의 형상을 하고 너와 함께 서 있겠다

뿌리는 각자 견고히 땅 끝에 박고

잎은 하늘의 구름 속에서 서로 만나자.

바람이 불 때마다

우리들 서로에게 안부를 물어도,

우리의 언어를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리라.

 

너는 칼처럼, 검처럼, 창처럼

너만의 단단한 줄기와 가지를 갖고 있고,

나는 무거운 탄식처럼,

아름답고 용맹한 횃불처럼,

나만의 붉고 큰  꽃 봉오리를 갖고 있다.

 

우리, 추위와 폭풍우와 벼락은 함께 나누어 지고

우리, 안개와 아지랑이와, 채홍의 무지개는 함께 누리자.

영원히 떨어져 있으면서도

종신토록 서로  의지하면서.

 

그래야 능히 위대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

견고한 사랑은 그렇다

사랑-----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네 장대한 몸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네가 지키는 자리,

네 발 밑의 땅까지 사랑하는 것이다.

 

--------------------------

 

 

수팅은  중국의 몽롱파를 대표하는 시인입니다. 몽롱파는 베이따오 꾸청, 지안허, 멍커, 수팅 등이 <오늘>이라는 간행물을 통해서 기존 시가 가졌던 사회적 주제에 반발해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시를  소개함으로써 부쳐진 이름입니다. 감각이적이고, 은유적이며 자유분방한 개인의 자아를 존중하고 표현했지요. 문화혁명에 대한 자기 반성적 시도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회를 오염시킨다는 상대적 이유로 80년대 중반에 탄압받습니다.  순수문학과 참여문학의 경계선에서 늘 시계추처럼 물결이 오가지요. 수팅은 2004년에 한국을 다녀간 적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시집이 있고 저변에 독자를 가진 시인이라네요. 번역된 것이 시집<致 橡 树》>(한국의 번역서의 제목은 <상수리나무에게>)고 <수팅시선>은 아닌 것 같은데 정확한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참, 지난2007년  4월 푸단대학에서 <제 1회 한중작가회의>의 부대행사로 <문인의 밤>이 열렸다고 하네요. 이 회의는 앞으로 10년간 열릴 예정인데 두 나라의 원로에서 신예까지 유명작가들이 대거 참석했답니다. 수팅은 문인의 밤에서 황동규시인의 <기항지>를 읽었다고 합니다.

 

2007.06.03 13:29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6.12.30

 

한 해의 연말을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작의 현악사중주와 이병주의 책들로 보내고 있습니다.

 

최근 나온 한길사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매화나무의 인과>와 <쥘부채> <어느 황제의 초상> 등과 <동서양고전탐사>이라는 일종의 독서노트를 읽고 있어요. <동서양....>, 이 책은 이전에 읽은 <허망과 진실>을 생각의 나무에서 새로 펴낸 것이지요. 똑같은 책이 이십년이 지난 뒤에 다시 읽어도 같은 울림을 갖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동안의 제 독서와 사고의 빈함함을 감안하더라도 이병주의 혜안이 뛰어났다는 것에 충분히 감탄하고 있습니다. 루쉰과 쉬광핑이야기만 해도 재작년에 겨우 번역돼 독자들 품에 온 것인데 이병주는 그 원본인 <兩地書>를 이미 젊은 시절에 읽고 1979년 <허망과 진실>에서 소개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요즘에야 비로소 서점에서 접해 읽고 있는 쉬광핑의 저서들 또한 이병주는 1968년에 여러번 읽었지요. 루쉰의 책을 읽기위해 일부러 백화문을 배웠다는 대목에서 저는 잠시 아연해졌습니다. 책을 읽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에서 언어를 배우는 사람. 번역서가 많지 않던 시절의 딜레탕트의 모습이지요. 그의 백과전서적인 지식뒤에는 그런 노력이 숨어 있었어요. 덩달아 젊은 날 스무해도 전에 이병주를 알면서부터 그가 읽은  책들을 권위있는 추천서로 생각하고  구해 읽으려 했던 제가 떠오르네요. 애써도 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 초상의 대상이 제게 있다는 것이 행복할 따름입니다.

 

이병주를 평가할 때 박람강기한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가 역사의 기록자였다는 점이 외려 큰 주목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으로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그에게는 주변의 역사적 진실을 목격할 기회를 자연히 많이 주어졌고 그는 그것을 기록해야할 사명을 느꼈을 거예요. 그가 만난 많은 사람들의 말못한 진실을 대변할 입을 그는 문학을 통해 발견한 것이지요. 입에 절박한 말이 고여야 글이 되는 법이라 생각합니다. 좌우라는 정치적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인간의 잣대로서, 이념의 구호 속에 명멸해간 수많은 이름없는 지식인들을 조명함으로써 역사라는 커다란 봉우리의 진실을 캐내고 싶었을 겁니다. 정치나 역사는 성긴 그물이라 그 속에 숨어든 자잘한 진실들은 다 새어나가기 마련이고, 이 자잘한 것들을 붙여 조각그림을 더해야 전체가 그려지는 것인데, 이병주는 어느 역사가 이상으로 이 작업을 실증적으로 해냈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소설이 단순히 소설에 그치지 않고 사색과 증거, 정확한 실증적 기록을 곁들인 실록의 의미를 지녔다는 것을 읽은 분들은 아실거예요. 소설로 쓴 역사 말입니다. 그것은 이병주 자신이 역사의 기록자가 되겠다는 자세로 글을 썼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단편소설 <어느 황제의 초상>에 남긴 이병주의 각오를 들어 보지요.

소설 속에서 이선생은 어떤 각오로 작가가 되었느냐고 묻는 노정필의 물음에 이병주는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목격자 입니다. 목격자로서 증언만을 해야죠. 말하자면 나는 그 증언을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자처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니면 기록할 수 없는 일, 그 일을 위해서 어던 섭리의 작용이 나를 감옥에 보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기록을 문학으로 가능케 하자면 詩心 혹은 시정이 기록의 밑바닥에 지하수처럼 숨어 있어야 설득력과 감정이입이  함께 생길 수 있다고 이병주는 생각합니다.

문학을 통한 기록의 추구. 지금 소개하는 <쥘부채>도 그런 이병주의 의도가 배인 소설이지 싶습니다. 집념어린 사랑을 소개하려는 것만은 아니지요.

 

자, 이제 <쥘부채>의 세계로 들어가 볼게요.

 

2006.12.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투.코 범우문고 171
고골리 지음, 김영국 옮김 / 범우사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한때  박진영이 쓴 <희망고문>이란 글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지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만날 마음도 없으면서 분명한 거절을 하지 않고 여지를 두는 것이나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무료함을 때우려  대타로 만나는 것, 혹은 헤어지는 이유를 완곡히 돌려 말하는 것은 상대에게 헛된 희망을 줌으로써 그들이 포기하고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희망고문이라 한답니다. 때론 명확한 거절이 막연한 희망보다 더 훌륭한 배려라는 거지요.

희망이 오히려 잔인하다는 것은 누군가를 짝사랑해 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런 희망이 갖는 잔인한 일면을 소설 속에서 찾아보기로 할게요.

 

고골리의 <외투>를 읽어보신 적이 있으세요?

말단 구등관 공무원 아까끼 아까에비치는 문서를 정서하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는 그일을 의미있게 받아들였으며 그 일을 최선을 다해 하는데에 만족하며 삽니다. 바깥의 일이나 사람들과의 흥청거리는 교유도 없이 자기 일에만 몰두하며 다 떨어진 그의 낡은 외투처럼 익숙하나 낡은 풍경처럼 삽니다. 사람들 역시 그를 풍경처럼 바라보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그를 아낀 상관이 그에게 더 나은 일, 예를 들어 문서를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작성하는 일을 맡진 적도 있지만 그는 그일을 감당하지 못해 거절합니다. 자기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아까끼에게 일이 하나 생겼어요. 입던 외투가 다 헤져 더이상 수선이 불가능해 새외투를 장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는 그 외투를 살 돈을 절반밖에 가지지 못했어요. 해서 외투를 장만하기 위해 그는 밥을 한끼 굶고 옷세탁도 줄이고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 듯 내핍을 견딥니다. 새외투가 생기리라는 희망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현실에 고통을 견디는 거지요. 상여금이라는 우연한 행운 덕분에 그는 계획보다 일찍 그 외투를 장만하게 됩니다. 새외투를 입은 아까끼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한 과장이 부유한 거리에 있는 자기집 파티에 그를 초대하게 됩니다. 아까끼는 새외투 덕분에 평소의 자기와 다른 세상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지요. 춤과 노래와 사교가 있는 세상요. 그는 그 세상이 있는 과장의 집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들어서게 되나, 그가 그렇게도 자부심을 가지고 입고 갔던 외투는 그곳에선 하찮게 취급받는 물건에 다름없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 저기 놀이에 끼여들기도 해보았지만 이내 식상한 그는 외투를 걸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도중에 불량배들을 만나 새외투를 빼앗기게 되지요. 다시 낡은 외투를 걸치게 된 아까끼는 더 비참해졌어요. 새외투를 찾으려는 생각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하고 거리에서조차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이지요. 헌 외투를 입어도 이전의 안온하고 자족한 생활로 돌아오지 못하는 거지요. 환락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외투를 찾으러 사방팔방 진정을 해 보아도 헛되자 병을 얻어 그만 죽고 맙니다. 그의 주검은 낡은 외투로 감싸졌지요.

 

제것이 되지 못하는 열망은 고골리의 새외투처럼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이미 경험한 것을 되돌릴 수는 없지요. 새외투를 입고 좋았던 경험은 그를 현재에 만족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더 비참하게 느끼게 하지요. 일회성 당근이 좋지 않은 것처럼요. 오래되고 안정적이나 무미건조한 삶을 흔들며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새외투의 환영과 설렘 뒤에는 어쩌면 삶의 비수가 들어있는지도요. 물론 잃어버려서 제것이 못되는 외투가 될 때만요. 한 발 한 발 내디디는 새로운 삶에는 뒤에 항상 비수가 꽂힐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요. 새외투를 살려면 그 비수까지 감당해야 함을요.

 

*윗글 고골리의 <외투>는 제가 외투를 사면서 연상되어 쓴 글입니다.

원래 고골리가 이 글을 쓴 것은 프롤레탈리아에게 일종의 경종-프로레탈리아가 구조적 변혁없이 부르조아 세계를 무조건 동경하고 일시적으로 맛봄으로써 전락해가는 과정을 그림으로써-을 울리고자 함이지요.

 

추신: 윗글과는 관계없는 여담 한가지:

 

저는 그저께 겨울 외투를 새로 한 벌 샀답니다. 이곳은 겨울이 없는지라 선택의 여지가 없어 겨울옷이라는 이유로 까다로움을 접고 입을만은 해서 장만했는데, 집에 와 찬찬히 살펴보니 맘에 안드는 부분이 꽤 되었어요. 다른 것으로 바꾸려니, 값을 손해볼 듯 하고, 그대로 입자니 썩 맘에 안들고 그랬어요. 물론 물리는 것은 중국사회에서 절대 되지 않는 일입니다. 방법이 없어 그대로 들고왔는데 이놈이 글쎄 제 것이 되고 나니까  볼수록 멋이나는 거예요. 혹 다른 마음이 들까봐 아예 세탁까지 해버려 바꿀수 없게 만들어 버렸어요. 그러고 나니 치룬 비싼 값이 전혀 아깝지 않더라고요. 어떤 것은 제 울타리에 집어 넣어야만 빛이 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2006.12.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휘페리온 을유세계문학전집 11
프리드리히 휠덜린 지음, 장영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내 마음이 쉴 수 있도록 그것에게 하나의 무덤을 만들어 주려 한다.

사방이 겨울이므로 나는 은둔하며 지내는 중이다.

폭풍을 만나 나는 환희에 찬 회상의 울타리로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

 

<휘페리온>에서

--------------------------------------------------------

 1.

도서관에서 빌려온 휠더린의 시로된 소설 <휘페리온>을 읽었다

온전한 '관념의 사람'인 휠더린에 매료되었다. 곳곳에 접어둔 페이지가 많아, 책을 주문했다.

 

범신론자로서 그는 사물에 깃든 신성을 넘어서 인간에 깃든 신성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인간이 인간다워질 때 그때의 인간은 신에 가까워지고, 아름다운 존재가 된다고 노래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이란 자신이외의 인간이나 존재를 인정할 때 다다르는 경지를 말하며,

인간이 이러한 신성을 지니도록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자, 즉 인간의 영혼을 일깨워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예술은 '정신'과 삶의 중간자'로서 아름다움의 표현을  넘어서서 '인간의 양심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므로.

 

휠더린은 자기를 넘어선 타인의 존재를 사랑할 수 있었던 사람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참으로 신에 다가간 '인간'이다. <휘페리온>은 그가 '디오타마'로 이름지었던 한 여인을 온전히 아름답게 사랑한 기록이기도 하다.그는 서로에게 속하는 것이 사랑임을 알았다. 영혼의 방랑자로서 의도했건 안했건 간에 사랑을 '예술이나 문학을 형성하는 수단'으로 놓았던 괴테나 릴케와는 달리,  그는 사랑속에서 예술을 완성시켰다. 육신의 그는 병들고 불쌍한 사람이었지만 영혼의 시인이었던 그는 참으로 숭고하고 깊은 사람이었다.언젠가 말했듯이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는 한 사람을 아는 척도이기에!

 

"지나치게 굴종적이지도 않으며, 또한 너무 지나치게 허물없이 대하지도 않는 것"

 

---------------------------

 2.

부천시림교향악단이 11월 말경에 브람스가 휠더린의 <휘페리온의 운명의 노래>란 시에 곡을 붙인

<운명의 노래> (J.Brahms, Schicksalslied Op.54 )를 연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곡은 교향곡1번에 속하지만,
브람스의 여타 교향곡에는 괴테, 쉴러 등 여러 시인이 쓴 시에 곡을 붙인 '운명의 노래''운명의 여신의 노래' 등이 있다.
 
Schicksalslied (Song of Destiny) - Part 1 by Brahms
 
Schicksalslied (Song of Destiny) - Part 2 by Brahm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