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정신의 객관성을 결여한 '열등한 성이며 모든 점에서 남성에게 뒤떨어지는 제 2의성'이라면서 여성에게 종족번식을 위한 존재란 자리만을 허용한 쇼펜하우어도 유럽의 혼인법에 대해서는 귀기울릴만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물론 그 분석의 동기는 이성이 없는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해 일부 일처제를 시행하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지만서도, 그 분석의 결론인 일부일처제가 오히려 전체 여성의 권리를 신장한 것은 아니라는데 동의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의 시절과 지금의 사회까지의 그 갭 사이에 역사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여권신장과 결혼 제도의 안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쇼펜하우어가 그런 결론을 내린 데는 당시의 사회가 숨어 있다. 지참금이 있어야만 결혼하던 시대에 결혼할 수 있는 여성은 특권층의 여성이었다. 결혼은 일종의 권리와 지위였다. 여성이 경제적 수단이 없던 시대에 돈이 없어 결혼하지 못한 여성들은 누군가의 정부나 친척등에 의탁하거나 사창가로 흘러 들어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었다. 그에 의하면 이들이 런던에만 해도 당시 8만명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존재함으로써 팔자좋은 여자들은 남자들의 유혹으로부터 안전했으므로, 이들은 어찌보면 일부일처제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팔자좋은 여자의 경우에도 원치않는 결혼에 응낙을 하거나 노처녀로 평생 살아가거나의 양갈래 밖에 없으니 일부일처제가 그리 좋은 제도가 아니란 것이다. 축첩제도는 종교개혁이전가지는 불명예로 간주되지 않았다고 한다. 만연하는 간통이나 매음의 상대가 되는 것보다는 보다는 첩의 지위를 부여하는 축첩제도의 일부다처제가 여성에겐 더 인간적인 제도라는 것인데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축첩은 남자가 많은 여자를 돌보는 자유 뿐만 아니라 의무를 행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통시대적으로 해석해 쇼펜하우어의 얘기를 비난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첩이 간통이나 불륜-이 말도 일부일처제적 시각에서 나온 말로 윤리적 판단이 들어간 말이라 별로 쓰고 싶지 않지만 다른 편의상 쓴다-보다는 훨씬 인격적인 제도라는 데엔 동의한다. 축첩은 원나잇 스탠드가 아닌 지속적인 관계이고 제도며 혼인의 기회를 한 번 더 부여한 것이다. 사실 이것을 오늘날 적용하자면 쌍방향이 가능해야, 다시말해 일처다부가 가능해야 남녀평등이라 하겠지만 그게 다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아직은 이른 얘기다.

오늘날도 결혼이란 것을 해 자녀를 양육하자면 돈이 들고 젊은이들만의 노력으론 적령기에 방 한칸 구하기 힘든 실정이다. 역시 부모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든 젊은이들은 동거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무엇을 가졌든지 무언가를 가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회에서 전통적인 결혼 형태를 최우선시 하거나 윤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법적 결혼, 혹은 일부일처제가 통시대적인 선과 악의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이 아님은 역사적으로 분명하다. 편의상 생긴 제도는 그것이 편의적일 때 시한이 유효하다. 오늘날의 결혼 형태는 변해야 하고 변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이 가지는 의미나 본질은 변하지 않을 지라도 그것을 담는 그릇은 변하고 있다. 동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듯이 일부다처제, 혹은 일처다부제도 낯설지 않을 날이 올지 모른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면 한 사람과 해로하는 일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릴만큼 귀해질 수도 있다.

 

늘 하는 얘기지만 제도가 융통성없이 완고하면 오히려 제도밖이 극성을 부린다. 여성부같은 제도권 속의 여성운동자들은 일면만 보고 결과적으론 기득권에 속한 여성의 권익만 보호하려 한다. 결혼과 이혼이 힘든 사회에서 어떻게 사랑만 믿고 결혼을 할 것이며, 간통과 음지의 사랑이 피지 않을 것인가. 사창가를 단속하여 없애버리면 윤락산업이 주택가로 숨어든다. 여성의 권익은 여성만을 보호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고 상대방인 남성을 함께 존중하고 보호해야 이룩된다. 이혼의 경우 자녀의 양육을 서로 원하지 않는 세태에 양육권을 가진 남성의 권리는 권리가 아닐 수 있다. 정책은 현실을 감안해야지 당위만 강조해 수립되어질 수 없다. 청교도사회를 우리가 살만한 사회로 기억하지 않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의 여성에 대한 독설은 반면교사로 귀기울일만 하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시몬느 드 보봐르가 <제2의성>도 이성과 독자적 판단력을 갖추었음을 강조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사상은 사회를 선도하기도 하고 그 사회의 현상을 추인하기도 한다. 쇼펜하우어가 유용한 시대가 있는 반면 보봐르가 유용한 시대가 있다.

우리 시대는 새로운 여성론이 씌여야 한다. 그 대명사로 우리는 누굴 꼽을 것인가? 주목하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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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지림의 시선이 번역된 것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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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는 제 번역이고 글입니다.

 

卞之琳

 

< 断章 >

你站在桥上看风景,
看风景人在楼上看你。

明月装饰了你的窗子,
你装饰了别人的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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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깁니다.

 

 

<단장>

당신은 다리 위에서 풍경을 보고,

풍경을 바라보는 또 한 사람은 망루에서 당신을 봅니다.

밝은 달은 당신의 창을 장식하고,

당신은 다른 한 사람의 꿈을 장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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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참 마음에 와닿는 절묘한 시죠.

그의 시는 생각의 여과를 거쳐 정수만 뽑은듯 절제미가 돋보이지만 난해하다고 소문이 낫지요.

<단장>은 그의 대표시이고 가장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열렬한 말 하나 없이 담담하고 초연하게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요.

 

다리위에서 당신이 풍경을 바라보면

그 풍경을 바라보는 당신 또한 그대로 풍경이 되어

내 마음 속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마찬가지로 밝은 달빛이 당신 창가로 스며들면

그 달빛을 받은 당신은

달빛처럼 가득하고 환히 제 꿈속으로 스며듭니다.

그래서 낮엔 내마음을 장식하던 당신이

밤엔 내 꿈 속을 온통 장식합니다.

 

 

애정시같지만 세상 모든 만물이 그대로 다 연관되어 있다는

시인의 철학이 들어있는 시지요.

달리 읽으면 슬픈 시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를 의식않고 의연하지만

나는 당신을 의식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다리에서 망루에서 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안타까움.

혼자 사람을 담아두는 일,

설레지만 쓸슬한 여정이 시작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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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시 <鱼化石>처럼 물고기 화석이 된 반생의 짝사랑을 소개합니다.

세월을 묵힌 것들은 다 아름답습니다. 비록 한없이 어리석었을지라도.

 

위시는 실제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번역가 였던 볜쯔린(변지림)의 저명한 여류 서예가인 장충허(張充和)에 대한 60년에 걸친 쓰디 쓴 짝사랑을 나타내는 서곡입니다. 볜쯔린은 1933년 북경대 영문과 3학년 때 같은 대학 중문과에 다니는 장충허를 만납니다. 그는 장충허에게 손으로 쓴 시집을 바치고 그녀에게 헌시를 씁니다. 두 사람은 비록 드문 드문이지만 1943년까지 왕래를 지속합니다. 그러나 그의 그의 시를 닮은 깊지만 과묵한 사랑은 장충허에게 와 닿지 못하고 그녀는 열정적으로 구애하는 미국적의 독일계 중문학자 Hans H.Frankel 과 결혼해 미국으로 가 버립니다. 그후 그는 그녀는 잊지 못하고 절망과 슬픔 속에서 지내다가 45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도 두 사람 간에 편지는 오갑니다. 주로 볜쯔린이 일방적으로 부친 것이긴 하지만요.더욱 슬픈 일은 그의 사랑을 장충허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만년에 장충허는 볜쯔린이 자기에게 보낸 시를 두고 '충분히 침묵하지 않고 사랑을 희롱했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그의 감정 또한 자기에게 그처럼 진지하지 않았다고요. 그녀는 볜쯔린이 좀 더 열정적이기를 기대했는지 모르지요. 속에 넣고 담담히 절제한 듯 쓴 그의 편지의 이면에 타오르는 깊은 열정을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는가 봅니다. 그의 시가 난해하다고 소문난 것을 보면 그의 편지 또한 장충허가 읽기엔 난해했을 수도 있지요. 문학적 소양이나 감수성이 다르다면요.

아무튼 볜쯔린은 죽기 얼마전 북경에 지인이 연출한 오페라를 보러 온 장충허를 관람석에서 먼 발치로 봅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고 그의 사랑은 딸이 펴낸 문집을 통해서 알려졌죠. 2000년 2월 2일 그는 세상을 떠나고 중국현대문학기념관에는 볜쯔린이 1937년 젊은 시절 장충허에게 직접 손으로 베껴써 준 시집《装饰集>이 그의 딸에 의해 기증됩니다.

 

 

저 시집에 든 장충허에게 바쳐진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무제>

 

三日前山中的一道小水,
掠过你一丝笑影而去的,
今朝你重见了,揉揉眼睛看
屋前屋后好一片春潮。

百转千回都不跟你讲,
水有愁,水自哀,水愿意载你
你的船呢?船呢?下楼去!
南村外一夜里开齐了杏花。

 

 

*옮겨 봅니다.
사흘전에 산 속의 작은 물줄기 하나가
네 웃음의 잔영을 빼앗아 떠나 버렸다.
그러나, 오늘 아침,
너는 다시 보리라, 부드러운 눈으로
집 앞뒤를 흐르는 한 조각 상서로운 봄의 물결을.
백번을 돌고 천번을 맴돌아도 너와 함께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네.
물의 슬픔과 물의 상처.
물은 원래 너를 싣고
너의 배가 되길 원했지. 너의 배가! 밖으로 나와보라!
남촌밖에는 하룻밤 사이에 살구꽃이 일제히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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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하는 사랑의 아픔이 물에 반사되어 흐르죠.
하룻밤에 살구꽃도 피건만
백번, 천번을 네 곁을 맴돌아도 말 한마디 건네받지 못하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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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0 1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rosenkranz 2012-12-12 15:30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소개가 되었군요.
 

 

 

 

 

 

 

 

 

 

 

 

 

 

 

 

컴퓨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얼마전 서점에서 사둔 안톤 체홉의 단편집을 읽었다. 사실 까마득한 학창시절에 <벚꽃동산>과 <귀여운 여인>을 읽은 게 전부여서 궁금하기도 한 작가였다. 그에겐 자신의 소설 곳곳에 자조적으로 '제법 잘 쓰지만 톨스토이나 뚜르게네프보다는 못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장편의 호흡을 가지지 못해서 그렇지 삶과 세상을 보는 눈은 그들 못지 않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시가 짧은 언어 속에 하나의 의견을 집어넣듯 단편 소설 작가는 그런 촌철살인의 기지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는 과연 단편소설의 대가다웠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이야기 하려다 그 앞 편에 있는 <다락방이 있는 집(The house with the Mezzanine)>에 인상적인 작가의 견해가 있어서 그 쪽으로 선회했다. 얼마전 본 신영복 선생이 쓴 '진정한 연민은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란 글귀에서 느꼈던 심사와 평상시 교회나 이웃, 그리고 나 자신이 '자선'이란 명목으로 행하는 행위에서 가졌던 회의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 있어서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시골의 친구 장원에 머물던 풍경화가인 주인공이 이웃 장원, 볼차니코프가의 두 자매를 방문하던 시절의 얘기다. 큰 딸 리사는 이웃에 봉사하기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서 농민교육, 보건소 건설, 계몽 등을 활발히 하는 활동적인 처녀였는데, 신념이 강한 만큼 독선적인 면이 있었다. 자기의 눈 밖에 것들은 수용하지 못하고 주위사람에게도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강요하고 간섭하였다. 반면에 둘째 미슈시는 책을 읽고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따뜻하고 매력적인 처녀였다. 풍경화가는 이 미슈시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리다가 그와 토론한 끝에 그를 위험인물로 낙인찍고 동생을 피신시켜 버려 그들의 풋사랑은 불발되어 가슴 속에 봉인된다.

리다는 그 신념에 자신의 삶을 가둠으로써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은 되어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 인간은 지기와 닮은 나약한 존재를 좋아하는 법이다.

체홉은 그의 단편 <결투>에서도 그런 주제를 언뜻 비춘 적이 있다. 신념가들이 바르고 옳고 강하고 도덕적인 것들을 내세우며 인간 세상에 해로운 것들을 일소하겠다고 나서는 것에 대해, 술, 여자, 나약함, 부도덕, 우유부단, 게으름, 패배자, 잉여적인 것들이 인간이 서로를 연민하며 살게 하는 밑걸음이 된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인간은 슬픔과 고통으로 연대하는 것이며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다음은 화가와 큰 딸 리다의 봉사활동에 관한 토론이다. 리다는 어려운 처지의 이웃과 농민들을 위해 문맹퇴치를 위한 학교설립, 보건소 건설, 근면등 생활태도 교육 등을 골자로 하는 교양인의 의무라 여기고 풍경화가에게 동참을 강요한다. 그는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 무엇 하나를 주지 않으면서 그저 그들의 생활을 간섭하고 더욱 더 욕구를 증대시켜 더 많이 일할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할 뿐이라 하였다. 함께 비를 맞지 않으면서 비를 내리게 하고 그 손에 우산을 주어주는 방식은 부당하다는 날카로운 지적이 숨어있다. 사실 자선이나 봉사활동이 결국은 체제의 안정에 기여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장치조차 없는 체제는 무너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영리하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자본주의체제를 지탱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그런 장치는 구비해야 스스로의 발밑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 중요한 것은 안나가 산욕열로 죽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러한 안나나 마블라나 페라게야들이 모두 아침 일찍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구부려 일하고 힘겨운 노동때문에 병들고, 평생 �주리고 병들어 지낼 자식들 생각에 두려워 덜고, 평생 죽음과 병을 염려하고, 평생 의사 신세를 지고,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도 체력을 소모하여 늙어 버려서, 그 결과 냄새나는 더러운 곳에서 진흙에 파묻혀 죽어간다는 사실이지요.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성장하면 또 그들의 어머니와 똑같은 길을 걷게 되고, 이렇게 해서 몇 백년이 지나도 몇십억이라는 인간이 동물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그것도 겨우 빵 한조각 때문에 말입니다. 그들이 느끼는 공포는 결코 없어지지 않앗어요. 이런 상황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그들이 영혼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와 동물적인 공포와 끝없는 노동이 마치 눈사태처럼 줄줄이 엄습해 와서 정신적인 활동에의 길을 완전히 막아 버린 것입니다. 더우기 정신적인 활동이야말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것, 인간에게 있어서 살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겟습니까? 당신들은 병원과 학교를 통해 그들을 구해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사슬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더 노예상태로 몰아넣을 뿐이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의 생활 속에 새로운 편견을 가지고 가서는 그들의 욕구를 증대시키고 있으니가요. 자치회에 피부질환치료고약과 팜플렛 대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전보다 더 많이 허리굽혀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것들은 굳이 말하지 않는다 하여도 말입니다."

 

'농민교육, 쓸데없는 교훈이나 재담이 적혀있는 팜플렛, 보건소, 그런 것으로 문맹이나 사망률을 줄일 순 없는 일입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을 괴로운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들의 멍에를 풀어주어 잠시라도 쉬게 해주는 일입니다....중략>

 

언뜻 루소의 자연주의 교육관도  보인다. 이 단편에서 이런 토론이 백미이긴 하지만 미완으로 끝난 사랑을 세월이 흐른 후 더듬는 주인공의 마지막 몇 마디를 덧 붙이지 않을 수 없다.작가 박완서가 그리고 시인 김용택이 떠올리던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네 집처럼 한 사람이 담긴 아련한 장소를 떠올리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시간을 안타까이 매만지듯 이 글을 읽었다.

 

"다락방이 있는 그 집에 대한 기억도 요즈음엔 거의 흐려져 버렸다. 그러나 가끔 글을 쓸 때나 독서를 할 때면 그날 밤 창문에 비추던 녹색 불빛과 한밤중에 추위에 곱은 손을 비비면서 사랑에 취해 들길을 돌던 나 자신의 발소리가 웬일인지 문득 생각나곤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주 드문 일이지만, 슬픈 고독에 매달려서 어쩔 수 없이 추억에 잠기거나 할 때면 어쩐지 저쪽에서도 나를 생각하고 있겠지, 기다리고 있어 주겠지, 그리하여 두 사람은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이런 생각이 조금씩 가슴 속에 피어오르는 것이다.

미슈시, 그대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는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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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식인의 소리가 모기소리만큼밖에 안 들리는 사회란 여론의 지도자가 없는 사회이며,

따라서 진정한 여론이 성립될 수 없는 사회다. 즉 여론이 없는 사회다. 혹은 왜곡된 여론만이

있는 사회다. 우리나라의 소위 4대신문의 사설이란 것이 이런 왜곡된 가짜여론을 매일 조석으로

제조해내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씌어지고 있다.

- '모기와 개미'(1963.3) 중에서/ 김수영의 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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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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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쁨과 슬픔
곽명규 지음 / 금사과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작가의 첫 작품을 읽을 땐 경건해진다. 그가 오래 품은 이야기를 가장 공들여 쓴 것이라, 작가의 정체성이 가장 많이 드러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곽명규 소설가님의 <사랑과 기쁨>이라는 소설집을 읽을 때의 기분이 꼭 그러했다. 어려운 책도 아닌데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는 그런 책을 만났다. 갈피 갈피마다 가공된 게 아닌 진짜 세월과 시간과 추억이 무겁게 들어있는 단편들로 가득찼다. 자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객관적으로 보편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가 소설가로서의 성공여부를 재는 것이라면 이 책은 아직은 분명 '성공한 이야기꾼'의 책이 아니다. 서투르고 수줍지만 마음에 오랜 여운이 남는 첫사랑같은 책, 그러나 노작가의 삶의 연륜과 깊이가 녹아있어 상처에 대한 치유력이 있는 책이다. 여기 실린 단편들을 하나씩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와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괜찮아'라고 말하는 엄마의 약손이 어루만지고 간듯 읽고나면 따뜻한 미소가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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