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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책 <선과 악을 넘어서(Beyond Good And Evil)> 란 책을 조금씩 보고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다운받아 보는 것인데, Helen Zimmern이 1906 년에 번역한 것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후곡을 우리말로 옮겨보았습니다. 여기서' 정오'란  모든 것이 새로와 진  시간을 니체가 철학적으로 일컫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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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hilosophyonline.co.uk/philosophy-study-resources/nietzsches-beyond-good-and-evil/text/

 

 From High Mountains: Epode

 

Oh life's midday! Oh festival! Oh garden of summer! I wait in restless ecstasy, I stand and watch and wait - where are you, friends? It is you I await, in readiness day and night. Come now! It is time you were here!

Was it not for you the glacier today exchanged its grey for roses? The brook seeks you; and wind and clouds press higher in the blue, longingly they crowd aloft to look for you.

For you have I prepared my table in the highest height - who lives so near the stars as I, or who so near the depths of the abyss? My empire -has an empire ever reached so far? And my honey - who has tasted the sweetness of it?

- And there you are, friends! - But, alas, am I not he you came to visit? You hesitate, you stare - no, be angry, rather! Is it no longer - I? Are hand, step, face transformed? And what I am, to you friends - I am not?

Am I another? A stranger to myself? Sprung from myself? A wrestler who subdued himself too often? Turned his own strength against himself too often, checked and wounded by his own victory?

 

Did I seek where the wind bites keenest, learn to live where no one lives, in the desert where only the polar bear lives, unlearn to pray and curse, unlearn man and god, become a ghost flitting across the glaciers?

 

- Old friends! how pale you look, how full of love and terror! No - be gone! Be not angry! Here -you could not be at home: here in this far domain of ice and rocks - here you must be a huntsman, and like the Alpine goat.

 

A wicked huntsman is what I have become! - See how bent my bow! He who drew that bow, surely he was the mightiest of men - : but the arrow, alas - ah, no arrow is dangerous as that arrow is dangerous -away! be gone! For your own preservation! . . . 

 

You turn away? - O heart, you have borne up well, your hopes stayed strong: now keep your door open to new friends! Let the old go! Let memories go! If once you were young, now - you are younger!

  

What once united us, the bond of one hope - who still can read the signs love once inscribed therein, now faint and faded? It is like a parchment - discoloured, scorched - from which the hand shrinks back.

 

No longer friends, but - what shall I call them? - they are the ghosts of friends which at my heart and window knock at night, which gaze on me and say: 'were we once friends?' - oh faded word, once fragrant as the rose!

 

Oh longing of youth, which did not know itself! Those I longed for, those I deemed changed into kin of mine - that they have aged is what has banished them: only he who changes remains akin to me.

 

Oh life's midday! Oh second youth! Oh garden of summer! I wait in restless ecstasy, I stand and watch and wait - it is friends I await, in readiness day and night, new friends. Come now! It is time you were here!

 

This song is done - desire's sweet cry died on the lips: a sorcerer did it, the timely friend, the midday friend - no! ask not, who he is - at midday it happened, at midday one became

two...

Now, sure of victory together, we celebrate the feast of feasts: friend Zarathustra has come, the guest of guests! Now the world is laughing, the dread curtain is rent, the wedding day has come for light and darkness . . .

 

----니체의 책 <선과 악을 넘어서(Beyond Good And Evil)> 중에서---(The version of Nietzsche's text used here is based on Helen Zimmern's 1906 trans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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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에서: 후곡>

 

오 생명의 정오여, 축제여! 오 여름의 정원이여! 

불안한 환희 속에서 나는 기다린다.  서서 바라보며 기다린다. 그대 친구들이여,

어디에 있는가?  내가 준비하고 밤낮으로 기다린 것은 그대들이다. 지금 오너라! 그대들이

이곳에 올 시간이 무르익었으니!

 

잿빛의 빙하가 오늘  장미로 바뀐 것은   그대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시냇물이 그대들을 부른다. 바람과  구름은 더 높이 창공에 올라,  떼를지어  

 더 높은 곳에서 갈망의 시선으로 그대들을 찾는다.

 

그대들을 위해서 나는 산꼭대기에 식탁을  차려두었다- 누가 나만큼  별들 가까이 살까?

누가 나만큼 심연의 바닥 가까이 살까? 나의 제국-지금껏 어느 제국이 그렇게 멀리

이를 수 있을까? 나의 꿀-이제껏 누가 그 꿀의 달콤함을 맛보았을까?

 

그대들은 와 주었구나, 친구들이여! 그러나 애석하게도 나는 그대들이  예전에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다. 그대들은 주저하며 주의깊게 쳐다보지만, 나는 결코 그가 아니다.

그러니 화내지 마라!  더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라고?  손, 발걸음, 얼굴이 변형되었냐고? 

그리고 그대 친구들에게 지금의 나는 - 내가 아니란 말인가?

 

 내가 다른 사람인가? 나 자신에게도 낯선 존재인가? 나 자신으로부터 생겨난? 

너무나 자주 자기 자신에게 정복당해 온 격투자인가?  자신에 대해 저항하며, 자기 힘을

지나치게 자주 쏟고 자신의 승리에 의해 저지당하고 상처받았던가?

 

나는 바람이 매섭게 부는 곳을 찾았던가? 나는 아무도 살지 않는 곳에서, 북극곰만이 사는

황량한 사막에서 사는 법을 배웠다. 나는 기도하는 법과 저주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인간과

신도 잊어버렸다. 나는 빙하를 넘어가는 유령이 되고 말았던가?

 

오랜 친구들이여!  보라, 그대들이 얼마나 창백하게 바라보는지를! 사랑과 공포로 가득차

있구나! 아니다-사라지거라!! 분노하지 말라! 여기는- 그대들이 편안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아득히 먼 얼음과 바위의 영토인 여기는! 여기에서 그대들은 사냥꾼이 되거나

높은 산의 염소처럼 살아야만 한다.

 

나는 바로 그 사악한 사냥꾼이 되어버렸다!- 보라, 얼마나 내 활이 팽팽히 당겨졌는지! 

그 활을 당긴 자는 가장 강한자였다.--그러나 화살은? 아- 어떠한 화살도 그 화살보다

위험하지 않다--그러니 떠나라!

사라지거라! 네 자신의 안녕을 위해!……

 

너는 발길을 돌렸느냐? 오 마음이여, 너는 잘도 견뎌왔고, 아직도 네 희망은 강하구나.

이제 새로운 친구들을 위해 네 마음의 문을 열어두어라! 옛친구들은 가게 하고, 기억들도

가게 하라!

너는 한 때는 젊었지만 지금은 더 젊었다!

 

언젠가 우리를 묶어두었던 것은 하나의 희망의 끈-누가 아직도 그 신호를 읽을 수 있을까?

사랑이 한때 그 속에 새겨놓은,  지금은 빛바랜 그 신호들을. 사랑은 마치 손대기가 꺼려지는

퇴색하고 그을린 양피지 같구나.

 

더이상 친구가 아닌 그들을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들은 친구의 유령일 뿐!

그 유령은 밤마다 내 마음에 찾아와 창문을 두드리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한다:

"우리는 예전에 친구였지?- 오 한때는 장미처럼 향기로왔던 시들어버린 말이여!

 

오,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청춘의 그리움이여! 내가 그리워했던 사람들, 내가 혈연으로

변해간다고 잘못 여겼던 사람들,  그들은 늙어버려 추방되었다. 오직 변하는 자만이 나와

인연이 있구나.

 

오 생명의 정오여!  오 제2의 청춘이여! 오 여름의 정원이여! 불안한 환희 속에서 나는

기다린다. 서서 바라보며 기다린다.  밤낮으로 꾸준히  기다리는 나의 새친구들이여!

이제 오라! 그대들이 여기 올 때가 왔노라!

 

이노래는 끝났다-갈망의 감미로운 외침도 내 입술에서 사라졌다. 마술사가 그렇게 하자,

제 때에 새친구들이 오는구나, 이는 정오의 친구들이다. -아니다! 묻지마라, 그가 누구인지

묻지마라- 정오에 그 일이 일어났다. 정오에 하나는 둘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함께 승리를 확신하고, 축제 중의 축제를 거행한다: 친구 짜라투스트라가

당도했다. 손님 중의 손님이! 이제 세계가 웃고, 공포의 커튼이 찢기고,

빛과 어둠을 위한 결혼일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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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귄클래식코리아에서 나온 예이츠의 <켈트의 여명>을 읽다가 인상적인 글이어서 옮깁니다.

믿음의 자세를 말하는 글인데, 제 생각과도 일치하는 글이라서 옮깁니다

또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도'란 시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요. 여명(트와이라잇)은

요정들의 시간인 잿빛 새벽을 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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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따라 그들의 행동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일 없이, 한 사람이 보고 들은 일들이

인생이라는 옷감의 실이라고 한다면, 그리하여 뒤엉킨 기억의 실타래에서 그 실을 조심스럽게 풀어낸다면, 어느 누구나 그에 가장 어울리는 믿음의 옷을 짤 수 있다. 나 역시 여느 사람들처럼 내 믿음의 옷을 짰다. 그러나 나는 그 옷을 입고 계속 따뜻하도록 노력할 것이며, 그 옷이 내게 어울리지 않더라도

만족할 것이다."(<켈트의 여명> 서문)

 

"부정을 위한 부정으로서 진실과 불합리를 똑같이 거부하기보다는 엄청나게 불합리한 사실과 약간의 진실이나마 믿는 것이 더 확실하다. 우리가 진실도 불합리도 모두 거부한다면 우리에게 발길을 안내하는 골풀 양초하나, 우리 앞의 늪지 위에서 춤추는 희미한 반딧불 하나조차도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못생긴 요정들이 사는 커다란 텅 빈 공간 속에서 필히 더듬거리며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의 난로와 영혼 속에 작은 불을 피우고 , 인간이든 환영이든 어떤 대단한 존재가 불을 쬐는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한다면, 그리고 못생긴 요정들이 찾아왔을지라도 지독한 말투로 꺼져버리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큰 재앙이 다가와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일이 일어난 후에우리의 불합리가 다른 사람의 진실보다 나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난로와 영혼에서 불을 쬐어 따뜻해졌고, 그리하여 그 속에서 진리의 야생벌들이 벌통을 만들어 달콤한 꿀을 만들기 때문이다.(17, 18쪽, 서혜숙역)"

 

 

추기: 11월 18일 종로2가에 있는 알라딘 헌책방에 가서 이 책을 샀다. 가방안에는 빌린 책이 들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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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걷는 게  제일 좋아 " E. 피셔의 시다.
"혼자 거닐면 쓸쓸해.
발은 자꾸만 비틀대고 가슴은 두려워.
둘이 걷는 게 제일 좋아.
네가 넘어지면 누가 네 손을 잡아 줄까,
네가 피곤하면 누가 널 부축해 줄까?
둘이 걷는 게 제일 좋아.
그대 세계와 시간의 방랑자여,
예수 그리스도를 길동무로 삼아라,
둘이 걷는 게 제일 좋아.
그분은 큰 길도 알고 오솔길도 아니,
말과 행동으로 네 앞길을 도와주리라,
둘이 걷는 게 제일 좋아."

  

-알프레트 되블린,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No. 1, 민음사, 2011, 김재혁 옮김,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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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E.피셔란 시인이 있었는지 견문이 없어 검색해 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책의 내용상 가공인물인가 싶어 그대로 책을 인용하였다.

 삼일을 내게 휴가를 주기로 하고,
민음사에서 나온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읽고 있다.
프란츠 비버코프의 인생여정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수업시대"와
"파우스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등이 지니는 인생여정과 다를 것 없는 성장소설-인간성장이란 의미에서-이다. 빛을 향해가는 여로.

 그럼에도 프란츠 비버코프는 뜻하지 않는 변수에 속수무책인. 
또 잘하려면 더 일이 꼬이는 카프카의 <소송>이나 <성>에 나오는 나오는 요제프 K와
닮았다. 온갖 고난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순조로이 전진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외견상 갈수록 몰락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몰락은 거듭될수록 그들을 삼키지 못한다.요제프 K는 자기 생존권이 달린 법정 소환 문제를 해결하러 변호사의 집에 도움을 청하러 간 절박한 순간에도 하녀와 희희덕거리다 일을 어렵게 만든다. 비버코프도 잘나가는 순간에 꼭 옆길로 새 일을 망친다. 리사와 잘되어가는 순간에도 엉뚱하게 미망인과 시간을 가지는 등. 그들은 왜 그러한 행동을 했을까? 그들은 자기 방식의 실패를 택함으로써 세상의 메카니즘에 반발한다. 요제프 K를 보라! 그는 죽음을 통해서도 항거한다. 요제프 K는 자살을 거부하고 처형관들에게 인간을 살해하는 일을 하도록 만듦으로써 법정의 의지에 항거하고 그 법정의 부조리함을 증명한다. 성에 있어서도 성공이나 타인의 의식보다 자기자신의 욕망과 연민에 충실한다. 이것이 그들이 익명에 함몰당하지 않고 개인을 지키는 방식이다.   

카프카식 유머고 되블린식 유머다. K도 비버코프도 익명의 거대 법정과 익명의 거대 도시의 비정에 당하기만한 혹은 유혹에 넘어가기만 한 몽매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보기엔 그는 크고 작은 우행으로 기계적인 대도시의 메카니즘에 틈을 냄으로써 오히려 대도시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는 돈키호테적 인간이다. 인생이라는 출구없는 여행에 우연과 자의를 가미함으로써 삶에 숨구멍을 틔운 사람들이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몰락까지 과감히 택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르쳐 준대로 살지 않는다. 생각이란 되새김질을 하면서 실패 속에서도 "출구없는 인생" "고난의 둥지"인 인생에서 자신의 몫을 확장시켜 간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반목 하지만 결국은 자기방식대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넘어선다. 남이 강요하는 화해가 아니라 부조리한 삶과 인간적 연약함으로인해 거듭된 실패를 겪어나가면서 스스로 화해하고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간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구호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존적 체득을 통해 깨달아 가는 구도자들이다. 그래서 앞으로 수위로서 다시 살게 되는 비버코프의 인생은 더 단단해 질 것이다. 즉, 비버코프는  감옥에서 나온 처음에는 마치 완장처럼-구호처럼-인생이란 아름다운 것, 짝짝짝, 랄랄라  박수를 쳤지만, 종국에는 내면합일로 그렇게 할 것이다. 현실적 인간은 현실 하나 밖에 볼 수 없지만 철학적 인간은 하나의 현실에서 여러 개의 가능한 현실을 볼 줄 알기 때문에 고난에 대처할 때 훨씬 강해질 수 있다.  결국 일개 날품팔이 비버코프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이차원적 인간으로 가는 여정을 겪은 것이다. 두 눈을 뜬 생각할 줄 아는 인간이 되었기에  비버코프는 자신을 구원했다. 사람은 인식-눈을 뜸-함으로써 바뀐다. 어쩌면 구원이라는 것은 자신을 위로할 자기만의 철학적 사유를 스스로 "발견"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병주의 <행복어사전>을 읽을 때도 서재필이란 사람의 우유부단함에 반한 적이 있다. 
외견상 마이너스 쪽으로 가는 듯 해보이나 실제론 인간 승리자인 철학적 인간인 그들이야말로 범할 수 없는 품격을 지닌 인간이다. 자기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들. 스스로를 구원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버코프도 충분히 매력있는 인물이지만, 소설 속에서 비버코프가 대도시 베를린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보는 재미 또한 복잡하고 미로에 빠진 소설을 끝까지
손에서 못 놓게 하는 묘미다. 도시 속에서 사는 우리들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그들과
우리는  보편적인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해답을 세월이 흘러도 우리는 아직
얻지 못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바뀔 수 있을까?

 인생에서 빵이상의 것을 찾는 프란츠 비버코프의 여정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들 중의
하나를 만나 보기를 바라며,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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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들레르와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형상화된 당시의 산보객은 대도시의 우수를 표현하는 심미적 아름다움의 표지일뿐 아니라 속도화 되고 획일화 되어가는 도시문명에 대한 느린 저항이기도 하였다. 한 개인을 거대한 도시라는 기계 속의 한 원자로 만드는 익명은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외로움과 불안, 우울, 상실과 공포, 무력감 등을 부상으로 제공했다.  훗날 이러한 대도시에 반기를 드는 "산책자들"은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하비, 잭 케루악, 장 보드리아드, 게오르그 짐멜등 비평가와 사회학자들의  화두가 되었다.

 19세기말 20세기초 작가들 역시  이 문제의식을 소설 속에 담았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쓴 알프레트 되블린이나  <특성없는 남자>를 쓴 로베르트 무질도 이런 대도시, 즉 베를린과 빈이라는 거대도시에 내던져진 개인의 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함, 빈곤 우울, 불신 등을 배경으로 그것을 극복해가는 실존의 문제, 인간성의 회복 등을 소설의 주제로 다루었다. 두 소설 모두 연상법, 일상의 대화, 의식의 흐름 등을 소설에 사용함으로써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비견되는 소설로 평가된다. 

이번에 인간 내면의 문제를 포착한 독일 표현주의의 문학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이 민음사에서 독문학자 김재혁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왔다. 귄터그라스와 벤야민("언어의 정신이 이런 식으로 독자를 뼛속까지 흠뻑 적신 적이 없었다")이 극찬한 이 소설은 소설로서는 말할것도 없고, 당시의 사회정치면 기사 기사나, 일기예보, 도로망, 상점의 간판, 전차노선, 회사의 광고문, , 주식시장에 대한 정보, 전화번호부, 유행가 가사등을 삽입해 1927-9년까지의  당대 베를린의 대도시 풍경을 실증적으로 묘사한 신뢰할 만한 베를린실록이란 점에서소설외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 베를린 동부의 번화가 로젠탈광장의 거리 풍경과 알렉산더 광장 주면에 사는 인물들의 군상......그래서 소설의 제목도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이고, "프란츠 비버코프이야기"는 부제일 뿐이다.

주제면에서나  소설기법에서나 녹록치 않아 번역하기 힘든 이 소설을 멋진 우리 말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독자의 행운이다.  

알프레트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1999년에 99명의 저명한 독일어권 저자, 문학 비평가, 학자들이 집계한 베스트 10선 4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1위는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 2위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송>, 3위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다. 

* 1999년 Literaturhaus München and Bertelsmann 선정 독일어권 소설 베스트 10선 

(The Best German Novels of the Twentieth Century )

1. Robert Musil: The Man Without Qualities 
2. Franz Kafka: The Trial
3. Thomas Mann: The Magic Mountain
4. Alfred Döblin: Berlin Alexanderplatz
5. Günter Grass: The Tin Drum
6. Uwe Johnson: Anniversaries. From the Life of Gesine Cresspahl
7. Thomas Mann: Buddenbrooks
8. Joseph Roth: Radetzky March    10.  Franz Kafka: The Castle
11 homas Mann: Doctor Faustus

(출처: Wikipedia)
 * 노벨연구소 및 노르웨이 북 클럽 공동 선정 세계 100대 소설 중 독일어권 소설 

괴테, <파우스트>
토마스 만, <붓덴부르크 일가> <마의 산>
카프카, '단편', <심판> <성>
되블린,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로베르트 무질, <특성 없는 남자>
파울 첼란의 '시집'
귄터 그라스, <양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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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을 믿음으로써 끊임없이 저주받았던 비버코프는 어떻게 자신을 구원해 갔을까?
그게 궁금하다. 오래전 문학전집 속에 있어서 읽다가 둔 소설인데, 수년 전 Fassbinder 감독의 영화 <Berlin Alexanderplatz> 가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  관심을 가지고는 늘 다시 보아야지 하면서도 책을 잃어 볼 수 없었던 책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에서 그리고 <소송>에서 수없이 거부당하고 실패하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서  나아갔던  K처럼 비버코프도 그 숱한 실패를 통해서 자신을 확장시켜 간 것은 아닐까. 착하게 살고자 했지만 언제나 상황에 휘둘리고 마는 나약해 보이고 무기력해  보이는 비버코프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도 소환법정에 휘둘리고 늘 엉뚱한 선택을 하고 마는 답답한 K. 대도시에 /거대한 사법체계에 항거할수록 더욱 비참해지는 그들. 그럼에도 그들은 끊임없는 시도를 한다. 비버코프는 거듭된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질못을 깨달아 간다.  그 실패의 방향성. 모리스블랑쇼는 그게 K,  어찌보면 무기력해진 개인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의 마르코도, 크누트 함순의 <굶기>의 주인공도 다 자기 몰락을 극한(죽음)의 경계까지, 심지어는 죽음너머로 시도함으로써 구원으로 가는 희망을 발견했다. 죽음의  경계선에서 죽음과 씨름하던 “그 저녁시간에 이전의 프란츠 비버코프는 죽었"고, 그 죽음은 그를 새롭게 출발하는 “프란츠 칼 비버코프 Franz Karl Biberkopf” 로 탄생했다.

결국 구원은 타자에 대한 환멸과 모순을 받아들이는 자신의 내적 자아의 확대에서 오는 것일까. 아주 사회적인 소설에서 그 결말은 괴테류의 교양소설이나 기독교적 논리를 보는 것 같아  결말이 흔쾌하지만은 않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먼 희망을 향하여 끝없이 좌절하고 넘어지며, 망설이며......그러면서도 바보처럼 다시 일어나 실패가 예정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길. 그 실패의 기록, 그 몰락의 기록,그 희생의 기록 그게 인생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인간은 몰락하도록 운명지워진 존재다" 짜라투스투라의 목소리였던가!

작가 되블린의 말처럼 변하고 망가지고 몰락했지만 끝내는 올바른 길을 찾은 한 사나이 프란츠 비버코프의 이야기는  인생에서 빵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프란츠 비버코프처럼 그러한 좌절과 몰락을 겪고 운명이나 거대한 권력이나 힘앞에서 무기력해져 크고 작은 불운을 거듭하며 인간을 불신하며 사는 우리에게 귀기울일 가치가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제 보다 나은 몰락을 꿈꾸며!!!
 

3.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유투브에 가면 대강 그 단편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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