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 - 나를 달뜨게 했던 그날의, 티베트 여행 에세이
박동식 글.사진 / 북하우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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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사람이 떠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자신이 살던 곳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으려는 요량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없다. 여행이란, 제 살던 곳을 등 뒤로 남기고 잠시 홀로 되는 것이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 다시 익숙한 곳으로 되돌아가기까지. 나는 바로 그 여행이라는 것을 오로지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 티베트 여행은 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의 종말, 소멸이 새로운 시작을 불러왔다. 저자 박동식은 그렇게 지상에 마지막 남은 낙원이라던 티베트로 열리지 않는 문을 뒤로 하고 나섰다. 상실이 상실이 낳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 빈 곳을 채워야 할 것을 찾으러 갔는지, 상실의 빈자리를 좀 더 덤덤하게 보기 위해서 갔는지는 본인만이 알 일이다. 그렇게 떠난 여행이 지금 한 권의 책으로 나와 내 앞에 있다. 그리고 이 책을 덮고 나는 머나먼 고원의 티베트의 갈색 흙들을 내 손으로 쥐는 상상을 한다. 메마른 흙이 내 손에서 자꾸만 부스러진다.

티베트에 대해서 자세히 알았던 적이 없다. 단지 중국의 아래에서 탄압을 받고 있으며 달라이라마는 끊임없이 티베트 반환을 위해서 세계를 돌고 있다는 것. 그리고 2006년 6월에 있었던 ‘세계 노벨평화상 수상자 광주 정상회의’에서 비자 발급 승신 거부로 인해서 달라이라마가 참석할 수 없었다는 것.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천장(天葬)이라는 장례 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티베트 관련된 영화를 몇 편 봤다는 것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골랐던 것처럼 나는 티베트에 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천국과도 같이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대한 탐미나 박해 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이나 그저 떠나고 싶다는 자기 연민이 아닌, 그저 무심하게 흙만이 있는 티베트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거기에 가서 내가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 무엇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여긴 것은 아니다. 단지 나는 그렇게 홀로 고원 위에서 서있고 싶었다.

그래서 만난 이 책은 나에게 수많은 질문과 해답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내가 동경, 연민, 동정 등의 감정을 가지지 않고 그저 티베트 자체를 보고 싶어 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곳은 끝내주게 멋진 풍광을 지난 곳도 아니며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밖에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티베트. 단지 여기가 아닌 낯선 곳. 절대 누군가가 흥분하며 말했던 것처럼 티베트는 지상에 마지막 남은 낙원이 아니다. 거기에는 여느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나도 여느 때와 같이 가서는 보고 올 수 있는 곳이다. 사람이 떠나는 여행에 사람이 없는 곳은 없을 것이며, 거기에서 또 사람을 보고 오지 않는다면 무엇을 얻겠는가. 저자가 본 것과 같이 나는 티베트에 살고 있는 사람을 보았고,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고원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지천의 산을 보고 느끼는 것처럼 꼭 같은 고원으로 여기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했다. 나는 이제까지 티베트라는 이국적인 향을 맡고 붉은 흙을 떠올리면서 제 멋에 눈을 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티베트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보는 풍경과 저자가 느낀 허심탄회한 여행기를 통해서 나는 티베트를 다시 보았고 사람을 다시 보았고 여행을 다시 보았다.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에 멀리 떨어진 심사가 아닌, 어쩌면 내가 떠나는 것 자체가 특별할 뿐인 다른 평범한 곳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저자는 상실과 함께 여행을 떠났고 마지막에 그것을 채웠는지, 덤덤하게 볼 수 있게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책을 덮으며 무엇인가를 채우거나 혹은 덤덤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같은 마음으로 인사를 할까. 안녕, 티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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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사랑 파사랑
다이도 타마키 지음, 이수미 옮김 / 현문미디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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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열정이 넘치면서도 한편으로 가장 불안한 시기가 언제일까. 성인이 되기 바로 직전인 열여덟, 열아홉이 아닐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 모든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러기 위해선 자기가 하는 일에 확신이 없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어른이 되기 전인 바로 그때. 미래에 대한 불안과 또 펼쳐진 무수한 선택의 기로에서 흥분이 되는 그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걱정하고 지키고 싶고 나아가고 싶은 나이. 그 나이에 서있는 다섯 명의 아이들. 작가는 이 아이들에게서 불안하지만 또 반짝일 수밖에 없는 한때를 뽑아냈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그때에는 한창 불안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지만 그건 아직 완전히 결정된 것이 아닌 잡힐락 말락하는 가느다란 끈과 같은 것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되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주저 않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해서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데 선택은 쉽지가 않았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도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이고 오로지 나 자신만이 해낼 수,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마치 ‘케사랑 파사랑’처럼 혼자서 자라고 혼자서 번식하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는 불안했지만 결국 조심스럽게 발을 뗐다.

   여기에 등장하는 아이들도 그렇다. 그들은 결국 앞으로 나아간다. 그건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다.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회 때문에 주변의 압력 때문에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이 그저 서있기만 하고 유예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소 과정이 힘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매끄럽진 않지만 그래도 그들은 이제 막 앞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작고 섬세하고 흔들리기까지 하는 그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야 할 과도기이기에 어쩌면 부질없어 보일지도 모르고, 사회는 기다리는 흔들리는 사람은 받아주지 않으니까 더더욱 안타깝기도 한 그들. 그들의 삶은 한 꺼풀 벗기면 그대로 제 몸뚱이를 비치는 아직도 딱딱한 껍질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이다. 하지만 딱딱한 껍질을 가지지 못하면 알맹이에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아는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이 딱딱한 껍질 혹은 야문 알맹이 만들기 과정을 거치고 있다.

   타인의 고민은 그저 유치한 투정으로 복에 겨운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일이라면 누구나 심각하다. 그건 당연하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보일지 몰라도 당시엔 심각하다. 하물며 그것이 아직 온전한 어른이 아닌 예비 성인에게 일어난 일이라면 어떨까. 그들은 심각하다. 이미 어른이 된 내가 보기엔 어쩌면 아주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순간엔 나도 심각했을 수 있는 일이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그토록 작고도 섬세하다. 큰 사건도 큰 위기도 큰 갈등도 없다. 담담하고 건조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솜털처럼 약간 부분이 존재한다. 바람이 이끌리듯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한때이기에 건조함조차 미약한 시작처럼 보이기에 더 알맞다.

   허나 여기에는 알싸한 맛이 없다. 귤은 까면 그 톡하는 새콤한 냄새가 나는 것이 좋고, 멜론은 자르면 달달한 향이 나는 것이 좋다. 그들의 이야기 안에는 그런 맛이 없다. 청춘은 있을지언정 고민은 있을지언정 그 면면이 너도나도 단조로운 것이 흠이라 차라리 내 인생이 더 소설처럼 여겨질 정도다. 담담하게 그들을 비추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그들의 삶에는 그들은 있을지언정 그 밖의 사람들도 그리 없다. 온전히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비추는 것은 좋지만 그건 그들의 삶을 같이 하고 또 비춰줄 존재가 필요하다. 선생이나 부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민의 대상이 있되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거나 함께 보여줄 사람이 없다. 황량하다. 귤은 여러 알맹이가 서로 제 몸을 꼭 붙이고 있다. 그것처럼 같이 살아가는 삶도 있고 해야 그들의 삶이 더더욱 내 눈에 콕 박힐 텐데 말이다. 하나의 테마로 엮인 단편 소설들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주제이외에는 다른 관계 설정이 없다는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소설을 떡하고 펼치고 보니 그 안에는 오롯이 알맹이만 있을 뿐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도 그것을 까는 재미도 없다. 성장소설이기는 하나 성장에 비견될 것이 없어서 더더욱 아쉬운 채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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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없다
버지니아 펠로스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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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이 책의 장르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과연 서점에서는 이 책을 어느 장르에 포함시켰을까. 답을 알고 나는 안도했다. 적어도 독서하는 도중에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어 좋았고 이 책에 대한 배신감을 서평에 토로할 수 있음에 다행이었다.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이다. 셰익스피어는 없다고 단언하는 한 편의 잘 만들어진 허구인 것이다. 만약에 이 책을 읽고 이것이 사실이라고 확증하는 사람이 있다면, 죄송하지만 나는 그에게 소설이라는 장르를 좀 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겠다. 겉으로는 참고문헌과 복잡 다양한 연구의 끝에 탄생한 하나의 걸출한 이론을 표방하고 있으나 속은 설득도 아닌 우기기의 끝을 보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논문은 논리가 없는 논문일 것이며, 가장 쓸모없는 이론은 역시 논리가 없는 이론일 것이다. 이토록 내가 논리, 논리를 부르짖는 이유는 이 책에 논리의 ‘논’ 자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 책 소설이니 내가 그럴싸한 겉모습에 속았다고 치부하겠다.

셰익스피어의 실제 인물이 프란시스 베이컨이며 그의 가장 확실한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저작 중에서 튀거나 도드라지거나 이탤릭체나 대문자로 이루어진 단어들과 문장들을 조합했을 때 프란시스 베이컨의 삶과 합일 시키자면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일단 저자는 말한다. 문제는 1. 오웬이라는 사람이 쓴 셰익스피어의 암호문이 모두 진실이라는 가정을 가정이 아닌 진실로 전제하고 시작한다는 점 2. 프란시스 베이컨을 셰익스피어라고 단언하는 데에 있어서 셰익스피어의 저작을 프란시스 베이컨의 생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만 사용했다는 점―곧 프란시스 베이컨을 아예 셰익스피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른 설명이 없다는 것 3. 대조군과 더불어 논리의 역행과 같은 기초적인 논리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점 4. 이 책의 저자는 오웬이라는 사람의 책을 절반 이상 인용했다는 점 5. 가장 큰 문제점으로 자기가 좋을 부분만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물론 더 찾아들자면 다른 문제점도 많지만 가장 크게는 이렇다.

만약에 처음부터 소설같은 느낌의 소설이었다면 나는 읽는 내내 흥미롭게 프란시스 베이컨의 삶을 따라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물론 여기에서 다뤄지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생은 모두가 가정에 가까운 짜깁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나― 하지만 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며 설득당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끝에 가서 더더욱 설득당하지 않아 화가 났다. 일면 논리적인 방법을 차용해서 전혀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난 것이다.

영국의 튜더왕조의 비밀과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실제 인물 간의 미스테리에 대해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을 차라리 강조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래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의심을 갖고 파해지는 것에는 수고가 따른다. 그 방법에 있어서도 기존의 것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로 프란시스 베이컨을 열렬하게 사랑하는 한 작가의 수고로운 소설이다.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음모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에게는 음모의 진실도 증거도 보여주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라는 한 인물을 이토록 자세하게 뒤따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진짜 인물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친자식 이 둘 사이에 진짜로 프란시스 베이컨 말고는 들어갈 사람이 없는가. 물론 이 책에서는 그 어떠한 해답도 얻을 수 없다. 아마 프란시스 베이컨 본인도 저승에서 이토록 자신에 대한 자신도 모를 정도의 행적을 파해진 점을 의아해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에는 진짜 셰익스피어가 없다. 책 안에는 모든 음모를 알고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저자와 그에 따라 만들어진 프란시스 베이컨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셰익스피어가 낄 자리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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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야마 동물원에서 배우는 창조적 디자인 경영
이병욱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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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옛말에 그른 말 하나 없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이 말은 이 책에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는 세상이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고 심지어 보기에 좋지 않은 떡은 팔리지도 만들지도 않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저자는 어째서 이 보기에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은가를 설명해주고 있다. 보기에 좋은 떡은 단순히 미적인 측면만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먹는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장 큰 예로 일본의 홋카이도에 있는 아사히야마 동물원을 들었다. 동물원을 생각해서 설계된 시스템이 아닌, 동물과 관람객의 입장을 생각해서 만들어진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 디자인, 보기 좋은 것은 사실 보는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보는 사람의 입장을 보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할 테고 생각하는 것을 꿰뚫어봐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쉽게 될 리 없다.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며 원활한 피드백과 그에 따른 수정을 거쳐 지금의 디자인, 보기 좋은 것과 보는 사람도 좋은 것이 탄생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바로 디자인 경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디자인의 실체와 효용은 우리의 삶에 얼마나 다가와 있을까? 누구든 아름답고 좀 더 간편하면서도 기능은 전보다 나은 것을 원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전보다 좋은 것을 원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인력이 필요하다. 신제품에는 언제나 제품의 새롭고도 좋은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째서 어떤 제품은 약진을 하고 어떤 제품은 사장(死藏)을 면치 못하는가. 이 책의 위에서 제시된 여러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모두 제시하려 한다.

     아쉽게도 그래서인지 하나의 관통하는 맥이 없이 중구난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게다가 이야기를 쭉 들여다보면 이제까지 나왔던 ‘혁신적인’, ‘창조적인’, ‘새로운’ 등등의 수식어를 붙인 방법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보는 사람이 있고 보기에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의 역점을 디자인이냐 방식이냐 하는 풀어쓰기 방법을 어디에 두느냐가 다를 뿐. 기존과 차별화된 디자인에의 역점에도 문제는 있다. 여러 가지 예와 풍부한 인용은 좋으나 지나치게 반복적이고 나열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를테면 이야기는 다 맞는데 이야기의 구성은 오히려 독자를 혼란스럽고 불편케 하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지금 아사히야마 동물원에 대해서 집중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스타벅스 신화가 튀어나오고 삼성이 튀어나오고 하는 식이다. 자연스럽게 맥이 있고 그 옆을 감싸며 예들이 있으면 좋으련만. 이 책은 어쩌면 디자인이라는 거대한 화두를 두고 디자인에 관련된 일화들과 중요한 점을 모두 모아다가 구슬 꿰기를 해서 내놓은 목걸이 같다. 비즈들은 서로 모양도 다르고 빛깔도 다르다. 하지만 모두 비즈다. 그러므로 한 실에 모두 묶어서 내놓은 것이다. 차라리 아사히야마 동물원의 이야기를 다 풀어 놓고 그 뒤에 차근차근 정리해서 단계와 관계를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일례들을 보여주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디자인에 관해서는 나 역시 문외한이고 아는 바가 없어 어떤 것이 기업 경영에의 디자인이며 역점을 두는 포인트라는 것은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하지만 내가 경제 경영에도 게다가 디자인에도 문외한이라서 단지 디자인 경영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다른 경영과는 어떠한 차별을 가지는지,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영인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디자인 경영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가도,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말인 것 같은 정리되지 않은 정보의 홍수 속에 난파된 기분이다. 이 책의 제목을 차라리 『창조적 디자인과 경영』이었더라면 좀 더 나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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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진화 - 자기정당화의 심리학
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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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홍보문구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홍보문구에는 분명 이렇게 적혀있다. ‘실수하지 않으려거든 꼭 이 책을 읽어라.’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문구를 비웃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이미 실수를 한 사람’에게 더 필요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가 저지른 끔찍한 실수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좋은 쪽으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필요한 것이다.

     사건은 이렇다. 무엇인가 일이 일어났다. 끔찍한 선택이었고 그에 따른 결과는 더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순전히 나의 판단과 선택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옛날 옛날에 살았던 착한 나무꾼처럼 자신의 일에 확실히 순응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아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설마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 때문은 아닐 거야.’ 그리고 자기정당화를 하기에 이른다. ‘그래, 이 일은 실은 이렇고 저런 일들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순전히 나 때문은 아닐 거야. 나는 그날 기분이 나빴잖아? 모두가 실수는 하는 거야. 게다가 술도 마셨어. 우리 모두가 알코올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고 있어.’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잘못은 외면한 채, 기억까지 바꾼 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봐, 나는 옳았다고. 설령 틀렸다고 해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그 상황이 안 좋았던 것뿐이야.’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자기정당화의 메커니즘이다.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확증을 하고 반확증은 외면하는 것.

     자기정당화는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 거짓말은 스스로가 꾸며내는 것을 알고하는 행위이지만 자기정당화는 아예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거짓을 진실로 만든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 그리고 비난을 모두 덮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자기정당화를 한다. 그건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정당화 때문에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 정치인들은 자신의 부정을 은폐하기 위해서 국민을 우롱하고 국가를 배신한다. 아주 작은 자기정당화 때문이다. ‘이런 작은 로비 하나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뭐 얼마나 달라지겠어. 게다가 이런 작은 선물은 누구나 받는다고. 나는 정직하고 이런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옳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의사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한 환자를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환자의 가족들 앞에서 자기정당화를 한다. ‘이런 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 수술은 위험도가 높은 수술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검사들은 자신이 잘못된 용의자를 잡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려들고 결국 무죄인 사람을 거짓자백을 받아서 사형선고를 받게 만든다. ‘그는 범죄자야. 자백을 받기 위해서 내가 12시간이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나쁜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작은 증거 하나를 수집하기 위해서 약간 위법을 했으면 어때. 이놈은 정말 나쁜 놈이라고. 나는 국가와 국민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옳은 일을 한 거야.’

     자기정당화의 대가는 크다. 어떤 사람을 상처 입히는 걸로만 끝나면 다행이다. 자신의 그른 선택을 정당화함으로써 누군가는 굉장히 힘든 삶을 살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자기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누구나 다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자기정당화이기도 하다. 윤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이거나를 떠나서 이건 자신의 작은 실수를 덮기 위한 첫발을 내딛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떠올려보자. 자신은 과연 자기정당화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가? 아, 이건 괜한 말이다. 정말이지 오픈 마인드가 아니라면, 스스로가 자기검열에 의해서 자기정당화를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왜냐하면 자신이 스스로 기억하고 있는 것마저도 실은 자기정당화에 의해서 재구성된 하나의 픽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정당화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책에서 펑! 하고 정답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정당화의 역사만큼이나 긴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스로 끊임없이 회의적인 사고를 하면서 되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나의 실수를 되짚고 인정하며 그것을 사과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실수이건 간에 말이다. 쉽지 않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입을 열면 나를 비난할 수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우리는 어릴 때에 부모님 앞에서도 그건 동생이 그랬어요, 라고 자기정당화를 하지 않았던가! 가장 가까운 가족 앞에서도 잘못을 시인하기가 힘든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라면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일들에 관해서 감히 겸허하게 나의 자기정당화에 희생된 피해자의 입장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말을 들었을 때의 상처를 떠올려보자. 반대로 내가 그랬던 적, 내가 잘못했던 적을 또 떠올려보자. 나는 지난 날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시 나에게 집중하자. 나 역시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거기서 나아가자.

     책을 덮고 나는 나의 자기정당화를 되돌아보았다. 부모님에게 사회에게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한 사건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제까지 보통사람 보다 편견이 없고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은 사람도 떠올랐다. 내가 스스로의 허물을 감추려고 할 때에 그것에 대해 도움을 주려고 했던 사람에게 끔찍하게도 나는 이유를 대어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스스로 나는 지금 한심하지 않아, 라고 자기정당화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완벽하게 그 달콤한 자기정당화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사과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 이것도 사실 내가 아직은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무마하려는 자기정당화인가? 생각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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