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 전10권 세트 대산세계문학총서
오승은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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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또 못샀어...재판매 알림 신청 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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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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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일어났을 때 당신이 흉물스럽고 거대한 벌레로 변해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다리는 멋대로 움직이고 고개도 가눌 수 없고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한 마리의 벌레로 그렇게 변신한 남자가 여기에 있다. 그는 아무런 영문도 모른다. 단지 빨리 일어나서 일을 가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한 남자의 변신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충격적인 시작으로 운을 뗀 후, 이 소설은 주인공인 잠자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집의 가장이 벌레로 변신하고 가족들은 그를 대신해 생계수단을 꾸린다. 처음에 물었듯이 당신이 벌레로 변한다면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당신은 현실이 아닐 것이라 여기고 부정을 시작할 것이다. 허나 이 가족들은 다르다. 놀람은 잠시이고 즉각적으로 현실에 복귀한다. 한 남자의 변신을 허무할 정도로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족들은 일을 시작한다. 사업에 실패한 후 쓸쓸한 허울 좋은 가장으로 있던 아버지는 은행의 사환으로 취직을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며 여동생은 점원으로 취직을 한다. 그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아버지는 서서히 가장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그는 점점 더 자신의 방으로만 몰두한다. 언뜻 그를 빼면 완벽하게 조화로운 가정으로 변모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작가는 한 인간의 변신을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의 변신이란 현 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존재를 보여준다. 단순한 육체의 변태가 아닌 사회에서의 인간의 몰락을 말한다. 주인공은 벌레로 변신함으로써 부양능력을 읽고 주변인과의 소통이 단절되었다. 이는 가치에 따라 몰락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는 인간의 군상이다. 곧 쓸모없이 다른 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이미 인간이 아닌 한 마리의 벌레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 가치가 무엇으로 판단되고 있는지 드러낸다. 그것도 벌레로 변신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잠자가 벌레로 변신했다고 해서 인간이 아닐까? 아니다. 그는 아직도 여동생의 바이올린 연주에 감동을 받는, 지극히 감성적인 인간이다. 단지 그는 돈을 벌 수 없는, 일을 할 수 없는 비생산적인 인간일 뿐이다. 결국 그는 가족들의 외면으로 쓸쓸하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그는 꼼짝하지 않고 누워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가족은 언제 그런 존재가 있었냐는 듯이 화창한 날씨에 밖으로 소풍을 떠난다.

한 남자는 결국 죽고야 만다. 가족의 철저한 무관심을 통해서 그는 점점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잃고 퇴락한다. 그의 변신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을 위해서 그만두고 싶은 직장도 이를 악물며 다녔으나 부양능력 즉, 더 이상 가치 창출을 못하는 그는 가족에게서 추방되는 이 아이러니. 진정한 벌레는 가족이고 벌레의 형상을 한 주인공은 인간이다.

우리는 가끔 역 같은 곳에서 노숙자들을 볼 때가 있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은 가치 창출을 더 이상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인공 잠자인 것이다. 어떤 이는 지나가며 대체 왜 우리의 세금으로 저런 사람들을 부양해야 하냐고 하고, 어떤 이는 저들이 미관을 상하게 한다고 하여 한 곳에 수용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는 그들을 한 마리의 벌레처럼 보고 있다. 그런데, 과연 단순한 가치의 유무로서 사람을 봐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도 실은 그 가족처럼 가치에만 급급해하는 진정한 벌레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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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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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바쿠이(horror vacui)라는 단어가 있다. 직역을 하자면 빈 공간에 대한 무서움 정도가 되겠다. 글을 막 쓰기 전에 백지를 보면서 어떤 글을 써야 할까,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등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공포가 잘 표현된 단어다. 하얀 백지를 주고 그 안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쓰라고 했을 때, 단시간에 막힘없이 써내려갈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냥 글도 아니고 소설을 쓰라고 하면 어떨까?

인터넷의 보급과 발달로 1인 미디어 시대가 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글을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더더욱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이 책은 어쩌면 시기적절하다고 해야 하겠다. 단지 글을 좀 더 잘 쓰고 싶은데, 소설은 좀 비약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나는 단언하건대 소설이야 말로 글쓰기 중에서 가장 고급 단계라고 말하겠다. 실제로 책에서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소설 쓰기를 시작하고 책과 함께 조금씩 쓰다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 정도는 술술 쓸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책과 함께 소설을 쓰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소설에 대한 개념을 바로잡는 것도 좋겠지만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간편하게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보자. 소설을 쓰려면, 소설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호로바쿠이처럼, 빈 공간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소설이 너무나 어려운 것, 내가 하기엔 모자란 것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이 쓰려고 하는 어떤 글도 한 편의 소설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편하게 써내려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소설 혹은 백지에 대한 공포가 사라진다.

마음가짐을 편하게 하고 글을 써보자. 인물이니 설정이니 세계관이니 하는 복잡한 것들을 잠시 미뤄두고, 먼저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은지를 생각해야 한다. 멋진 것, 그럴싸한 것, 한 번쯤 써보고 싶었던 것. 쓰고 싶은 것들이 많은 것이다. 하지만 그 수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골라야 할 것은 자신이 잘 알고 잘 쓸 수 있는 것이다. 그저 동경하기 때문에 아름답기 때문에 등의 이유보다는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잘 쓸 수 있는 그런 가까운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남도 잘 알리라는 보장도 없거니와 그래야만 작위적이지 않은, 자신의 글이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들이다. 책에서는 바보가 되어야만 한다고 우긴다. 확신하지 말고 꾸미지 말고 자연스럽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색다른 시각, 그럴싸한 느낌 등 우리가 흔히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들을 버리고 쓰기 시작할 때 글은 나오는 것이다. 첫걸음은 어렵지만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고 저자는 또 우긴다.

글을 조금이라도 써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하면서 읽고 또 자신의 습관이나 자세를 교정하거나 되돌아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며, 글을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이라면 편안하게 웃으면서 따라갈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소설이 어려운 것이 아닌 것처럼 글을 쓰는 방법 또한 어렵지 않게 쓰여 있다. 나는 전자에 속했는데 평소에 내가 생각하던 소설관과 맞아 떨어진 것도 있었고, 다른 시각인 것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다음에는 좀 더 편안하게 글을 써야하지 하는 마음이 생겼다. 글을 쓰면서 내가 너무 잡생각이 많지는 않았나, 알고 있는 것들을 내세워 좁은 방에 갇혀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얗고 넓은 빈 공간에 무엇인가를 가득 채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선뜻 점 하나를 찍어 넣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편안하게 어느 부분에는 이런 이야기를 넣고 반대쪽에는 다른 생각도 집어넣고. 나중에 뺐다가 집어넣었다가 할 수 있는 편안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 그것이 첫걸음이다. 왜냐하면, 빈 공간은 아니 빈 종이는 단 한 장이 아니라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써야할, 쓸 수 있는 글들은 소설들은 무궁무진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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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베스파
박형동 지음 / 애니북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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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이던 시절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꿈을 가진, 어른을 꿈꾸는 아이 시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어른들도 한때는 아이였다. 어른들은 한 번씩 떠올린다, 다시 아이의 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어른들 안에 아직도 아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 아무것도 몰랐지만 꿈결 같았던 그 시절을 헤아리며 다시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 하지만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다. 이미 어른이 된 사람은 절대 다시는 아이가 될 수 없다. 비록 아이 같은 어른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만화에는 동물과 사람, 과거와 미래, 현실과 몽상이 한 데에 뒤섞여있다. 꿈을 꾸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 지독한 현실이기도 하고, 소망이었으나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린 현재가 있다.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와, 아직도 아이이고 싶은 어른. 사랑과 현실, 회상과 괴리 등. 누구나 한 번쯤은 어렴풋하게 경험하는 것들이 특유의 색채로 어우러져 있다.

이제는 닳고 닳아 귀퉁이가 바래고 종이는 다 헤지고 색깔도 누렇지만 서랍의 맨 아래 칸에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나 일기처럼. 이 만화의 색깔은 밝지도 반짝거리지도 새 것도 아닌, 갈색이다. 이미 되새길 대로 되새겨서 단물이 다 빠진 것들이다. 하지만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때는 사랑하고 아껴 마지않았으나 이제는 가끔씩 술 마실 때에나 알싸하게 떠오르는 것이 된 것들. 그것은 세월이다.

유독 이 만화의 전반에 깔려 있는 코드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시간 혹은 나이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려면 꼭 건너야 하는 것이 바로 시간의 다리인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아이에서 어른이 되듯이, 누구나 세월을 거스를 수 없다. 그 불가항력의 거대한 힘에 수그리고 하염없이 따라가고 마는 것이 사람인 것처럼, 만화에서는 시종일관 시간과 관련된 테마들이 나온다.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누구나 시간을 먹고 아이에서 어른이 된다. 하지만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 어떻게 변할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선택한다. 원래 그렇게 될 것처럼 자라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살면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 먼 후일에도 가슴 속에 남는다. 그것은 자라는 동안에 우리가 감수해야 할 것이 비단 시간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결국 이 만화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따라 어른이 된 우리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서 된 어른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누구도 후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프로스트(Frost)의 시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에서처럼 지금의 순간 아무리 만족할 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뒤를 돌아보고 하나쯤 내가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상상한다. 우리가 모든 가능성의 길이 열려 있었던 때로부터 무엇 하나를 선택해서 온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방법은 다양하다. 거대한 물고기의 배에서 잠을 취하고 밤새 산길을 달려 다시 되돌아오고, 떠난 연인과 어째서 우리는 그렇게 되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한 무수한 선택들이 있다. 각자의 소망 각자의 사랑 각자의 삶이 우리와 닿아있다.

좀 더 곱씹으며 읽으면 좋을 다섯 편의 만화. 거기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지만 정작 그 전하는 방법이 약간 미숙하고 너무나 직설적이지 않았나 싶어 아쉽다. 만화 자체가 그림과 함께 있는 것이니 글보다 기본적으로 표현에서는 앞설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을 많이 활용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글을 따라가는 그림보다는 그림과 글이 혼연일체가 되어 조금만 덜 말하고 느낄 수 있도록 안배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지적하자면, 작가는 아이템이나 소재 선택에 좀 더 의미를 유기적으로 두었으면 했다. 조금 더 걸출해보이고 그럴싸해 보이는 것보다는 필요할 수밖에 없는 물건들을 배치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겉멋은 잔뜩 들었지만 그저 분위기를 위한 소재들의 남발이 아쉬웠다. 무릇 시대가 70년대라고 가정한다면, 이야기 자체가 꼭 70년대여야만 하는 이유가 필요하다. 그러니 작가여, 조금만 겉멋을 줄이고 작품을 생각하라. 그럴싸한 것보다 더 멋진 것은 정말로 그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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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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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자, 창조주 혹은 세계의 진리로도 대변되는 신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신화를 통해 그 존재의 유무를 떠나 인류의 역사와 오랜 시간 함께 해왔다. 이러한 신에 대해서 과연 신이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나 하는 문제 역시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 해왔다. 신은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등 많은 신의 유무(有無)에 대한 입장 중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무신론(無神論)이다. 무신론은 현대에 이르러 여전히 과학의 발전과 탈구조주의의 유행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아니나, 그 역사가 유신론(有神論)에 비해 턱없이 짧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의 비약적 성장하여 무엇에 이르러 타당한 하나의 이론으로 정립되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한 이야기를 지금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작 『만들어진 신』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이다. 흔히 신의 존재론에 대해서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과연 신이 제 할 일, 그러니까 신에게 부여된 속성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실제로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신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할 수 있으면 신이 존재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있어서 다윈이 진화론은 곧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리처드 도킨스는 과연 어떤 방법을 제시했는가. 그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한 집단,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종교가 주는 의의와 신의 존재와 그의 기능에 대한 의구를 던졌다. 이를테면 종교가 오늘날 종교의 필요성을 말할 때 첫 순위에 꼽는 윤리적인 측면에 대한 반대 입장과 신이 주는 것들이라고 밝힌 ‘상상의 친구·위로·영감’을 들어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이라는 데에 입장을 굳힌다.

물론 종교와 신은 같지 않다. 신이 없는 종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유신론을 말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종교인이라는 것과 무신론이 종교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에 종교와 신의 이야기는 뗄 수 없다. 신이 존재한다면 종교의 존재 역시 타당하게 되는 것이고, 신이 없다면 종교에서 하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 된다. 신의 이야기가 재현되는 곳이 바로 종교라면, 종교의 필요와 기능을 반박하는 것은 신의 존재와도 직결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고로 이 책은 종교가 끼친 사회적 해악과 그의 순기능을 잃고 맹목적인 믿음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한 집단에 대한 전면적인 스트라이크라고 해야겠다.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신이 과연 존재하나 하지 않나.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책에서도 저자는 무신론의 맹점인 신이 없음을 증명할 수 없음을 이야기했다― 이제 우리는 사회를 되돌아보고 과연 신이 필요하나 필요하지 않나 하는 문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오늘날 순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차별과 병폐만을 낳는 것이 신과 종교라면 어째서 우리는 그러한 사회에 대놓고 나는 ‘무신론자’다, 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사람을 위해 태어났다. 세상에 대놓고 나는 ‘무신론자’다,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책이 『만들어진 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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