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의 진화 - 자기정당화의 심리학
엘리엇 애런슨.캐럴 태브리스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홍보문구를 지적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홍보문구에는 분명 이렇게 적혀있다. ‘실수하지 않으려거든 꼭 이 책을 읽어라.’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문구를 비웃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이미 실수를 한 사람’에게 더 필요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미 우리가 저지른 끔찍한 실수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써 그것을 외면하고 좋은 쪽으로 자신을 설득하려고 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필요한 것이다.

     사건은 이렇다. 무엇인가 일이 일어났다. 끔찍한 선택이었고 그에 따른 결과는 더더욱 끔찍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순전히 나의 판단과 선택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할까. 옛날 옛날에 살았던 착한 나무꾼처럼 자신의 일에 확실히 순응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까?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아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설마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나 때문은 아닐 거야.’ 그리고 자기정당화를 하기에 이른다. ‘그래, 이 일은 실은 이렇고 저런 일들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순전히 나 때문은 아닐 거야. 나는 그날 기분이 나빴잖아? 모두가 실수는 하는 거야. 게다가 술도 마셨어. 우리 모두가 알코올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알고 있어.’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잘못은 외면한 채, 기억까지 바꾼 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봐, 나는 옳았다고. 설령 틀렸다고 해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 그 상황이 안 좋았던 것뿐이야.’ 이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는 자기정당화의 메커니즘이다.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확증을 하고 반확증은 외면하는 것.

     자기정당화는 거짓말보다 더 나쁘다. 거짓말은 스스로가 꾸며내는 것을 알고하는 행위이지만 자기정당화는 아예 그런 사실조차 모른 채 거짓을 진실로 만든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 그리고 비난을 모두 덮기 위해서 우리는 모두 자기정당화를 한다. 그건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기정당화 때문에 사회는 어떻게 되는가. 정치인들은 자신의 부정을 은폐하기 위해서 국민을 우롱하고 국가를 배신한다. 아주 작은 자기정당화 때문이다. ‘이런 작은 로비 하나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뭐 얼마나 달라지겠어. 게다가 이런 작은 선물은 누구나 받는다고. 나는 정직하고 이런 일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옳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의사들이 실수를 저지르고 한 환자를 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환자의 가족들 앞에서 자기정당화를 한다. ‘이런 건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 수술은 위험도가 높은 수술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검사들은 자신이 잘못된 용의자를 잡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려들고 결국 무죄인 사람을 거짓자백을 받아서 사형선고를 받게 만든다. ‘그는 범죄자야. 자백을 받기 위해서 내가 12시간이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로 나쁜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을 거야. 게다가 작은 증거 하나를 수집하기 위해서 약간 위법을 했으면 어때. 이놈은 정말 나쁜 놈이라고. 나는 국가와 국민 그리고 정의를 위해서 옳은 일을 한 거야.’

     자기정당화의 대가는 크다. 어떤 사람을 상처 입히는 걸로만 끝나면 다행이다. 자신의 그른 선택을 정당화함으로써 누군가는 굉장히 힘든 삶을 살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자기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누구나 다 저지를 수 있는 것이 자기정당화이기도 하다. 윤리적이거나 비윤리적이거나를 떠나서 이건 자신의 작은 실수를 덮기 위한 첫발을 내딛음으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떠올려보자. 자신은 과연 자기정당화를 한 번도 한 적이 없는가? 아, 이건 괜한 말이다. 정말이지 오픈 마인드가 아니라면, 스스로가 자기검열에 의해서 자기정당화를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왜냐하면 자신이 스스로 기억하고 있는 것마저도 실은 자기정당화에 의해서 재구성된 하나의 픽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정당화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책에서 펑! 하고 정답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정당화의 역사만큼이나 긴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스로 끊임없이 회의적인 사고를 하면서 되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나의 실수를 되짚고 인정하며 그것을 사과하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실수이건 간에 말이다. 쉽지 않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입을 열면 나를 비난할 수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우리는 어릴 때에 부모님 앞에서도 그건 동생이 그랬어요, 라고 자기정당화를 하지 않았던가! 가장 가까운 가족 앞에서도 잘못을 시인하기가 힘든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라면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일들에 관해서 감히 겸허하게 나의 자기정당화에 희생된 피해자의 입장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말을 들었을 때의 상처를 떠올려보자. 반대로 내가 그랬던 적, 내가 잘못했던 적을 또 떠올려보자. 나는 지난 날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다시 나에게 집중하자. 나 역시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이 있지는 않은가?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고 거기서 나아가자.

     책을 덮고 나는 나의 자기정당화를 되돌아보았다. 부모님에게 사회에게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한 사건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내가 이제까지 보통사람 보다 편견이 없고 원칙을 고수하는 사람이라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은 사람도 떠올랐다. 내가 스스로의 허물을 감추려고 할 때에 그것에 대해 도움을 주려고 했던 사람에게 끔찍하게도 나는 이유를 대어 상처를 주었던 것이다. 스스로 나는 지금 한심하지 않아, 라고 자기정당화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완벽하게 그 달콤한 자기정당화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직, 사과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 이것도 사실 내가 아직은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으로 무마하려는 자기정당화인가? 생각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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