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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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 <정의의 사람들>만을 읽음.  

이 책은 내가 대학 입시때 자기소개서에 감명깊게 읽은 책으로 쓴 것이다. 오랜만에 읽으니 기분이 새록새록하다. 희곡의 제목은 p.76에 있는 도라의 대사 중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아냐. 정의의 사람들일 뿐이야. 세상에는 뜨거운 열기가 있지만 그건 우리와 인연이 없어. (돌아서며) 아! 불쌍한 정의의 사람들!"(p.76)

제정 러시아기에 실제로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의 테러를 바탕으로 한 희곡. 정치적 테러는 장래의 추상적인 인간을 위해 현재의 구체적 인간을 희생하는 행위이다. 테러가 윤리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해 카뮈는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2막에서 칼리아예프는 대공이 탄 마차에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는 이유로 폭탄을 던지지 못한다. 대공 암살에 성공한 후에는 스쿠라토프의 회유와 대공비가 제시하는 종교적 구원의 길을 모두 거부하고 죽음을 맞는다. 어째서 칼리아예프는 죽어야만 했는가? 대공비의 말: "살아야 해요. 살아서 살인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p.103) 이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대공은 테러리스트들에 있어서 전제와 탄압의 상징. 즉 어떤 추상화된 관념적 존재였다. 그러나 그걸 걷어낸 이후에는 대공 역시 하나의 구체적인 사람이다. 이념을 걷어냈을 때 남는 것은 칼리아예프가 대공을 죽였다는 것. 따라서 그는 대공비의 말대로 살인자라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어쨌든 하나의 생명이라면, 생명의 대가는 이념일 수 없다. 생명의 대가는 생명이어야 한다. "이념을 위해 죽는 것, 그것만이 이념의 눈높이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것만이 나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어."(p.34) 피흘리게 한 자 스스로 피흘릴 때에만 살인은 정당화된다.

이 희곡의 서글픈 점. 이 희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인 칼리아예프와 도라가 사랑의 말들을 나누는 장면. 도라는 칼리아예프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사랑이란 좀더 다른 어떤 것이 아닐까, 독백이기를 그치고 더러는 대답도 들을 수 있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난 이런 상상을 해봐. 하늘에는 태양이 빛나고 고개가 부드럽게 숙여지고 마음은 거만함에서 벗어나고 두 팔이 활짝 벌려지는 거야. 아! 야네크, 잠시 동안만이라도 세상의 이 참혹한 비참을 잊고 몸과 마음을 푸근히 맡겨둘 수만 있다면! 잠시 동안만이라도 다 잊어버라고 제 생각에만 몰두하는 것, 그런 걸 생각해볼 수 있어?(pp.73-74)

누구도 이 아름다움에, 이 부드러움에 도달하지 못한다. 칼리아예프는 아름다움과 행복을 사랑하기 때문에 혁명과 테러에 참여했지만, 그의 아름다움과 사랑은 결국 추상적인 관념에 대한 것이다. 그는 민중에게 삶을 돌려주길 원하지만 그가 가진 민중의 관념은 추상적이다. 그래서 그는 도라가 가진 의문, "과연 인민은 우리들을 사랑하고 있을까?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p.73)라는 의문에 답하지 못하고 사랑은 단지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정신적 자위.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칼리아예프는 이를 억누른다. 그는 구체적인 사랑, 부드러움을 간구하는 도라에게 답변하지도 못한다. 그는 도라와 조직을 분리할 수 없고, 의롭지 못한 도라를 사랑할 수 없고, 가볍고 철없기만 한 과거의 도라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말하고 싶은 맘 굴뚝 같아."(p.75) 관념과 추상에 비끄러매인 채로 그는 테러와 교수대로 나아가고, 마지막에 도라 역시 칼리아예프가 나아간 길로 나아갈 것을 결의한다. 정의를 위해 나아가 죽음 속에서만 묶일 수 있고, 부드러움 속에서 하나가 되지는 못할 운명인 두 사람을 생각할 때, 내 가슴은 약간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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