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치 문명
권용립 지음 / 삼인 / 2003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
내가 권용립의 <<미국의 정치 문명>>을 서평도서로 결정하게 된 이유는 이 책이 미국의 정치를 제도나 사건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고찰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오고 난 후 지금까지의 미국 행정부는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었고, 따라서 내가 제대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미국 역시 부시 정권 하의 미국이었다. 그런데 미 정권이 보여주었던 행동과 입에 담았던 말들은 대단히 특이한 것들이었다. 이란, 북한, 이라크 등 끊임없이 자신들의 외부에 적을 상정하는 태도, ‘악의 축’ 발언 등을 통하여 드러나는 선악의 대결구도, 정교 분리를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암시되는 기독교적 태도 등 부시 행정부가 보여주었던 행동들은 세계의 다른 국가들의 행정부와는 사뭇 다른 것들이었다.

   물론 현재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며 따라서 발생하는 트러블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트러블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각각 그럴 듯한 답변을 제시하였다. 이란이나 북한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핵무기 때문이며, 이라크에 대한 침공은 석유 때문이라는 등의 답이 그것들이다. 물론 그 대답들은 상당한 현실 설명력을 지닌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미국의 행위를 그 기저에 놓인 일관된 사상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많은 것을 하나의 틀로서 파악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우리는 미국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역시 들었다. 한쪽에서는 미국을 마냥 찬양하고, 한쪽에서는 제국이라든가 세상의 모든 악의 근원인양 묘사한다. 그러나 이 양쪽 모두 ‘미국은 왜 그런 행위를 하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어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전자는 관심이 없어 보이며, 후자는 탐욕 때문이라는 막연한 말을 할 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물론 국가는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움직일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관이라든가,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 등은 존재하여 그것에 맞추어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그 프레임이 무엇인가라는 것인데, 권용립의 책은 그 틀로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그리고 캘빈주의라는 미국 건국에 있어서 중요한 세 이념의 융합물이며, 이는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 있어서 기본적인 이념이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반부는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의 기원을, 그리고 후반부는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서 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떻게 반복하여 표출되어 왔는지를 살핀다. 이 서평은 주로 전자, 즉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떠한 배경 하에서 성립되었고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정리하는 데에 그 주된 목적이 있으며, 이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 어떻게 표출되어 왔나에 대해서는 미국의 평등관, 그리고 신보수주의를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2.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결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이 미국의 주도적인 역사학인 합의 사학(Consensus History)이다. 권용립에 의하면 이 합의 사학은 미국이 그 내부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으로서, 미국이 그 성립과정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이념을 지도적인 정치 이념으로 삼아 왔으며, 따라서 미국 내에서의 정치적인 대립과 투쟁은 서로 상이한 비전(vision)을 실현하기 위한 대립이 아니라 합의되었던 토대 이념의 실현을 위한 방법론적 투쟁에 불과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다만 미국 건국에서 주도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미국을 주도하고 있는 정치적인 이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이 대립한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은 지금도 미국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관점으로, 자유주의를 미국의 합의된 토대 이념으로 보는 관점이다. 여기서의 자유주의는 존 로크의 자유주의로, 재산권의 보장을 근간으로 하여 국가는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만 존재하며 따라서 국가가 국민의 권리에 부당한 침해를 가할 때 국민은 국가에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결국 로크의 자유주의는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유주의라고 할 것인데,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무절제한 자기 이익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일종의 ‘덕성’을 요구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로크의 자유주의가 18세기 스코틀랜드 사상, 대표적으로 아담 스미스의 사상과 결합하여 미국의 건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반면 공화주의가 미국 건국에서 중심적인 이념이었다는 것이 공화주의 합의 사학이다. 공화주의는 “덕성과 타락간의 팽팽한 긴장을 전제로 해서 정치를 파악하는 정치 윤리이며 정치 도덕이다.”(p.104)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i)법에 의한 지배, ii)공화주의적 자유, iii)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공공 정치체(commonwealth), iv)인민에 의한 정부 사상, v)혼합 정체의 다섯 개의 기본 관념을 중심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공화주의 사상의 핵심 윤리는 공민적 덕성(Civil virtue)이며 사치와 타락의 경계인데, 포칵, 베일린 등 공화주의 합의 사학자들에 의하면 미국의 건국 시조들은 덕성과 타락의 대립을 설정하고 공민적 덕성을 정치의 핵심으로 보는 고대의 정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건국 시조들은 영국이 시간 속에서 타락을 면할 수 없으며 따라서 타락을 회피하고 ‘최선의 과거’를 보존하기 위해 미국을 건립하였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은 한 가지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에 있어서 주도적인 이념이 하나라는 점, 즉 미국은 단일한 이념 하에 성립된 국가이며 그 단일한 이념이 지금까지 정치 문명으로서의 미국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 대립은 ‘미국의 예외성’과 또 ‘원초적 이념’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미국적 사고 방식 안에서의 대립인 것이다.(p.331) 저자는 이러한 전제를 “합의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인다. 미국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누려온 합의 사학은 왜 이렇게 합의된 이념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일까? 이는 미국이라는 국가가 가지는 특수한 성격에 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서유럽 문명권의 국가는 피를 나눈 역사적 민족과 그 집단적 기억이 교직되면서 형성된 민족 국가인데 반해서 미국은 국가와 이념을 먼저 설계해 놓고 그 이후에 받아들인 여러 인종으로 민족과 그 기억을 제조해 온 나라”(p.8)이며, 이러한 미국의 특성, 즉 삶이 우선하고 국가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신대륙이라는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국가가 먼저 설계되고 집단적 기억을 제조해 온 국가라는 특성이 미국인들에게 합의 콤플렉스를 갖게 한 것이 아닐까? 어떤 집단이든지간에 그것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떤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중심은 일단 집단이나 조직체가 형성된 이후에는 그들이 가지는 정체성의 기반이 된다. 다른 국가에서는 공유된 기억, 즉 역사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인은 고조선 이래로부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의 집단적인 기억을 공유하며, 중국은 한(漢)족으로서의 정체성을 공유한다. 그러나 미국은 그러한 기억을 가지지 못한 나라이다.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미국과 미국의 정체성을 얻어내기 위해서 의지하게 되는 것이 이른바 ‘건국 이념’, 즉 건국 당시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상들이고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것이 이러한 합의에 대한 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자신이 ‘미국인’임을 자랑하는, 즉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짐을 유별나게 강조하는 것이 미국 사람들이고, 이러한 강조는 오히려 공유하는 기억을 갖지 못하는 결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니 말이다.

3.
자유주의 합의 사학과 공화주의 합의 사학은 각각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다. 양자가 보여주는 건국 과정에서의 자유주의의 영향과 공화주의의 영향을 받은 예들은 모두 각각의 설명틀을 지지하며, 따라서 사실은 건국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모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합의의 가정을 과도하게 주장하게 되면 건국 과정을 주도하였다고 보는 이념과 합치하지 않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유주의 합의 사학이 미국에 존재하였던 반자유주의의 전통을 역사 서술에서 차례차례로 빠뜨리고, 제퍼슨이 자신이 소유한 노예에 대하여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미국 내부의 욕구가 불러온 이 합의 콤플렉스를 벗어나면 미국 성립 과정에서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기여한 부분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 문명으로서의 미국의 기저에 깔려 있는 기본적 토대로서의 관념을 보다 더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보수적 아메리카니즘’(Conservative Americanism)'은 저자의 독창적인 개념으로서, 이는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공화주의, 캘빈주의 등 미국사를 지배해 왔던 주요 이념들의 내부적 융합과 긴장의 결과 생성된 독특한 형태의 미국적 보수성을 지칭하기 위한 개념”(p.19)이다. 즉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우선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에 의하여 형성된 이념이며 그 융합은 보수적으로 행하여졌다. 그런데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는 융합이 가능한 이념들인가? 자유주의는 사익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인간을 상정하고 그 이념을 전개하는 반면, 공화주의에서의 인간상은 공민적 덕성을 실행하는, 다시 말하면 사적 이익보다 공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인간이다. 상이한 인간관에서 출발하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18세기에 미국에서 융합할 수 있었던 단서를 저자는 근대성에서 찾는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가 당시의 근대성을 기준으로 해서 만났다면 고대와 근대의 간극을 뛰어넘는 상호 융합의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p.146)
 
   그렇다면 근대성이란 무엇일까?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면서 인간의 정신적 영역에는 많은 변모가 일어났지만 무엇보다 근대 최고의 성취 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개인’의 발견이다. "공화주의는 인민(people)을 내부적 갈등이나 대립이 없는 균질적인(homogeneous) 집단으로 인식"(p.108)하였고,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로마에서 사회나 경제의 기본 단위는 가(家)였으며, 개인은 자기보다 큰 집단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게 인식되었다. 반면 데카르트가 사유하는 자아를 발견한 이후 근대의 사상은 개인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로크의 자유주의는 재산권을 중심으로 하는 개인의 제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을 축소하여야 한다는 사상이며,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공익에 합치함을 <<국부론>>에서 논증했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여 "도덕철학으로 시작된 자유주의가 사사로운 이익만 추구하는 '사익 이데올로기'로 변모하면서 근대화했고 공화주의 또한 사익 이데올로기의 시대적 필연성을 인정하면서 근대화했다고 보면, 두 전통은 결국 '근대성'이라는 접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p.108)
 
   저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모두 근대화를 겪으면서 접근해 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 많은 변모를 겪은 것은 공화주의인 것으로 보인다. 공화주의적인 덕성은 공익을 위하여 사익을 희생하는 것이며 사익의 추구가 일상화되는 것을 ‘타락’으로 파악했지만, 실제로 인간이 사익을 추구하는 존재라는 관념이 보편화되고 인간이 공공적인 특성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당파적 존재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화주의는 현실과의 타협점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공화주의적 덕성에 대한 환상에 매달리는 대신 ‘이기적 인간’으로 ‘덕성의 사회’를 이룰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었다.”(p.149) 즉 이기적 인간과 공민적 덕성의 양립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공화주의의 근대화’일 것인데, 독립 혁명 직후부터 고전적 덕성의 존속 가능성에 대한 회의가 발생했으며, 공화주의자들은 정치적 자유와 상업적 번영이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을 이룬다.
 
   공화주의는 근대적 현실을 수용하기 위해서 그 자신이 근거하고 있던 인간관을 변경하였다. 그렇다면 공화주의는 자유주의에게 이념으로서의 주도적인 지위를 내준 것일까? 저자는 “‘근대적’ 자유주의와 ‘근대화한’ 공화주의가 만난 지점의 좌표는 정치 윤리로 보면 자유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공화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p.175)라고 말한다. 공화주의가 이기적 인간관을 수용했지만 여전히 고전적 덕성의 달성이라는 목적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융합 이후 이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여전히 덕성의 국가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은 공화주의적 윤리의 틀 안에서 진행되었으며 그렇다면 결국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귀결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공화주의란 타락을 경계하는 이념이며 논리 필연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던 온전한 과거를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마치 공자가 춘추전국시대를 개탄하며 주(周)로의 회귀를 꿈꾼 것처럼 공화주의 역시 기본적으로는 과거로의 회귀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보수적 융합의 기반 위에 퓨리터니즘, 즉 캘빈주의가 가세한다. 아메리카대륙으로의 이민자 중 중요한 구성원이 신교도들이었기에 미국의 성립 이전부터 캘빈주의는 구성원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이다. 캘빈주의 교리의 내용 중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천년 왕국 사상, 즉 지상에 신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사상이다. 퓨리터니즘의 지도자들은 미국으로의 이민 행렬이야말로 천년 왕국을 실현하려는 신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신대륙에 건설된 국가, 즉 미국은 신의 의지가 구현된 국가이며 궁극적으로 미국 정치와 외교에서 드러나는 선민 의식, 그리고 팽창을 정당화 하는 소명 의식의 근원이 된다. 미국은 선택받은 국가이며 따라서 미국인은 다른 국가에도 신의 왕국을 구현할 역사적 사명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캘빈주의의 천년 왕국 사상은 덕성의 보존이라고 하는 미국 건국 시조들의 목표와도 기묘하게 부합한다. 즉, 타락한 구세계를 경계하고, 타락 이전의 고전적 덕성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이 건국되었다는 논리와, 타락한 구세계를 떠나 새로운 땅에 신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논리는 덕성, 고결함과 타락의 대립구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치하며, 이 점에서 칼빈주의가 공화주의와 자유주의의 융합물과 얽혀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사적, 상업적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서 덕성의 보존이라는 궁극적, 보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자유주의, 공화주의, 캘빈주의의 융합이다.

4.
자유주의, 공화주의, 캘빈주의의 융합은 보수적인 방향으로 귀결되었고, 이렇게 해서 형성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이후의 미국의 정치와 외교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독립 혁명부터가 보수적이다. 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독립 혁명의 본질은 영국 체제의 원형을 지키려는 것이었으며, "연방헌법은 자유주의적 근대성을 포용하면서도 '세월'로 인한 정치 체제의 변질 가능성을 최소화시킬 제도적 장치로 고안된 것이다."(p.186)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 상원, 하원은 3자 견제하며, 헌법의 개정은 극도로 어렵게 되어 있다. 또한 미국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매카시즘 등의 우익 이데올로기는 근본적으로 미국의 원초적 가치가 '비미국적'인 영향 때문에 변질되는 데 대한 경계심, 즉 보수적 회귀 의식이 깔려 있다. 이외에도 저자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과 긴장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음을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이른바 ‘미국적 평등관’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융합에 의해서 생성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즉 캘빈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는 모두 ‘기회 균등’의 필연적 산물인 ‘결과의 불평등’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일치”(p.221)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화주의적 의미에서의 평등이 사람의 자질과 능력에 합당한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며, 따라서 “미국의 평등관은 동일한 출발선, 즉 기회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 인습적인 여러 특권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되, 그 대신 경쟁의 결과로 생기는 자연 귀족과 나머지 사이의 불평등은 당연하게 보는 것이다.”(p.227) 이러한 공화주의적 평등관은 캘빈주의의 중요한 교리인 예정설, 즉 신은 구원받을 자를 정해놓고 있으며 현세에서 노력하여 성공을 이루었다는 것은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논리와 맞아 떨어진다. 나는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평등관에 완전히 동의한다. 그러나 과연 ‘출발선에서의 완전한 평등’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제퍼슨은 균등한 교육 기회, 즉 무상 교육 등을 통하여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는 지금은 불가능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평등관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의 평등관이 이렇게 관념적인 색채를 띠게 된 것도 미국이 관념에 의하여 건설된 국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보수’에 대한 언급도 인상 깊었다. 저자에 의하면 신보수는 20세기 중반 이후 대두된 급진적 평등주의, 즉 기회의 평등만을 중시하는 기존의 미국적 평등관에 반발하여 결과와 원인을 도치시켜 결과의 불평등으로부터 기회의 불평등을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분위기에 대한 보수 측의 대응이다. 따라서 신보수는 결국 공화주의적 전통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예전에 막연했던 것이 좀 더 명확히 보였다. 샤디아 드러리는 대표적인 신보수주의 사상가인 레오 스트라우스가 니체와 칼 슈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고 있다. 박성래가 그의 저서인 <<레오 스트라우스>>에서 정리한 그의 견해에 의하면, 니체가 신을 죽였고 따라서 도덕의 근거가 사라졌는데, 레오 스트라우스는 이를 받아들였으나 무지한 대중들이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고 서구 문명에 재앙이 닥칠 것이므로 이를 내버려 두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는 계속 덕성을 강조하고, 그의 제자인 하비 맨스필드는 마키아벨리의 덕성 개념을 연구한 책을 내는 등 네오콘들은 끊임 없이 덕성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네오콘들의 주장은 결국 공화주의에서 말하는 타락의 저지를 다시 한번 반복한 것이다. 즉 스트라우스는 신이라는 절대적인 도덕과 윤리의 근거가 니체에 의해 사라진 이상, 시민들이 맞이할 것은 ‘타락’밖에 없다고 보고 이에 맞서 ‘덕성’을 보존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그 보존의 방식이 전쟁 등이라는 곤란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저자가 제시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미국의 정치행위에 일관된 패턴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상당 부분 성공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개념이 정치현실을 단순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권용립 역시 이를 시인한다. "미국 정치 문명으로서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은 결국하나의 지적 구조물(intellectual construction)이다.즉 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상, 보수적 아메리카니즘도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 어쩌면 사상과 역사를 통해서 집단 정신의 모습을 그리는 일은 구르는 낙엽을 보고 바람의 모습을 짐작하는 일과 같다."(pp.336-337) 물론 정치적 현실은 급변하고, 이를 하나의 틀로서 잡아내려는 시도는 오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해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틀이 필요한 것 역시 사실이다. 특히 한국처럼 미국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극한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나라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국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일일 것이며, 그 파악을 위한 도구로서의 권용립의 '보수적 아메리카니즘'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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