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강남 쪽에 잠깐 일이 있어 택시를 탔는데, 기사 아저씨는 굳이 내가 30분쯤 볼일 보는 것을 기다렸다가 다시 날 태우고 강북으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강남이 너무 차가 막혀 다시 강북으로 오고 싶은데, 좀 기다리더라도 손님을 태우고 오는 게 낫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오고 가고 거의 세 시간을 그 기사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택시가 경기에 제일 민감하지요. 요샌 손님처럼 장거리 가는 손님도 별반 없어요.” 쉰 중반쯤 보이는 아저씨는 개인택시 경력 4년, 번호값 5000만원을 빚내서 시작했지만 아직 빚도 다 못 갚고 시집 보내야 할 딸만 셋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아저씨는 맏딸이 사귀던 남자가 얼마 전에 좀더 조건이 좋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려서 딸이 상심해서 아침밥도 안 먹는 것을 보고 나왔다고 했다.

“가슴 아프지요. 못난 애비 둬서 자식 상처받는 게. 서로 죽자 사자 하는 것 같더니만…. 참 신사적이지 못하지요. 하긴 세상이 그러니 그놈만 탓할 것도 못되지만…. 오늘 25만원 이상 올리면 딸내미 갖고 싶어하는 카메라폰 사 갖고 들어갈 겁니다.”

‘위대한 유산’(1861)이라고 번역되는 찰스 디킨스의 작품은 어떻게 보면 바로 이런 ‘비신사’에 관한 이야기다. 가난한 고아로서 대장장이 매형의 조수로 살던 주인공 핍은 어느 날 마을 근처 습지에서 탈옥수 매그위치를 만나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몰래 음식과 줄칼을 갖다 준다. 같은 마을에는 결혼식 한 시간 전에 약혼자에게 배신당한 노처녀 해비셤이 살고 있는데, 그녀는 남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미모의 소녀를 양녀로 삼아 남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냉혈 여성으로 키우고 있다. 핍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갖지 못한 모든 것을 다 누리고 있는 에스텔라를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핍은 이름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거액의 유산을 물려받는다. 런던으로 나가 상류층의 ‘신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부자가 된 핍은 자신의 과거 신분을 부끄럽게 여기고 은인인 매형까지도 구박하는 비열한 인간으로 타락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핍에게 익명으로 돈을 준 사람이 탈옥수 매그위치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추리소설처럼 전혀 뜻하지 않았던 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디킨스는 에스텔라에 대한 핍의 사랑이 순수한 감정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 상승의 욕구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에스텔라 당신은 내 존재, 나 자신의 일부입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우아한 환상을 구체화하는 상징입니다….”

그러나 결국 이 작품에서 디킨스가 강조하는 것은 핍의 인간적 성숙이다. 핍의 친구 포켓의 입을 통해 그는 말한다. “마음으로 신사가 아닌 사람은 예법으로도 진정한 신사가 될 수 없어.” 즉 진정한 신사란, 신사다운 매너와 더불어 참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핍은 교육이나 재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매그위치의 맹목적 애정과 매형의 한결같은 사랑에서 서서히 사랑의 고귀함과 진정한 신사도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기사 아저씨가 여전히 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공덕동 쪽으로 들어서던 차에서 갑자기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앞쪽에서 시커먼 연기가 났다. ‘라디에이터 호스’가 터졌다고 했다. 금방 고쳐질 고장이 아니라며 아저씨는 내게 다른 택시를 잡아 주었다. 연기 나는 차 옆에서 내게 멋쩍게 손을 흔드는 기사 아저씨를 돌아보며, 나는 ‘비신사적’ 남자에게 버림받은 딸을 위해 오늘 밤 카메라폰을 못 사 갖고 들어갈 가난한 아버지의 빈손이 마음에 걸렸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조선일보 Books 서평위원)   

                                                             - 북스조선(2004.06.05)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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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혀니^^ 2004-06-0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뭉클해진다.
진정한 마음의 신사, 숙녀가 많은 그런 사회가 되길...